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72화 (72/164)

00072 7. 리타 밸리의 별 =========================

(연참 1/2)

서향궁 접견실은 사용감이 적었다. 양탄자에 눌린 자국이 없었다. 탁자와 의자도 길이 들지 않았다. 열네 살짜리 공주를 찾을 손님은 드물었다. 교사나 학자와 만날 때는 공부방을 썼다. 이에샤도 처음 들어와 보았다. 평소에는 라제카가 놀러 오거나 밖에서 마주친 까닭이었다. 상석에 반듯이 앉은 라제카는 낯설었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스몄다. 커튼이 하느작거렸다. 너머가 비치리만큼 얇게 짠 것이, 여름용이었다. 최근에 갈아 바꾼 모양이었다. 라제카 또한 시원시원한 푸른색 드레스를 입었다. 벽라를 타고 흐르는 윤기가 물낯에 부서지는 햇살 같았다.

말비다가 탄 차는 맛있었다. 시더도 과일 차나 밀크티를 달콤하게 끓였지만, 말비다는 묵직한 향을 낼 줄 알았다. 이에샤는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초조했다. 반면에 라제카는 느긋해 보였다. 보통날 티타임을 즐기는 것처럼.

이에샤가 참지 못하고 “공주님.” 하고 불렀을 때였다. 라제카의 입이 열렸다.

“앨저 경.”

“아, 예! 말씀하십시오.”

“증거가 없어요.”

이에샤는 눈을 끔뻑했다.

라제카에게 설명을 마친 뒤였다. 슈리를 만난 일, 리타 밸리의 별 시리즈의 속사정, 아리타가 곤경에 처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라제카는 끼어들지 않고 들어 주었다. 허튼소리 취급하는 낌새는 없었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이에샤는 라제카가 일부러 소리 나게 굽을 컵받침에 부딪은 줄 알아차렸다. 흠칫했다. 라제카는 분위기를 풀어 줄 셈이었으나 역효과였다. 이에샤의 등골이 얼어붙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물증이 하나도 없잖아요. 간접 증거만으로 끼어들었다간 앨저 경이 난처해질 수도 있어요. 라제카는 말리고 싶네요.”

“하지만 공주님,”

“생각해 보세요.”

말허리를 잘라 냈다. 이에샤는 선생에게 꾸지람 듣는 학생의 심정이 되었다. 라제카에게는 나이와 겉모습을 잊게 하는 장악력이 있었다.

“경이 사이 나쁜 이복동생을 거꾸러뜨리고 싶다는 생각에 시야가 흐려진 건 아닌지.”

“그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죠?”

입을 다물었다. 받아칠 수 없었다. 라제카의 말대로였다. 이에샤의 속가슴에는, 밀레나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고 싶다는 욕망이 자리했다. 위험할지 모르는 아리타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도 참이었다. 밀레나를 공격하고 싶다는 마음도 참이었다. 목적이 두 가지이면 안 되는 걸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라제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에샤의 생각이 들여다보인다는 양.

“그 하급 사제의 말이 정말이라면 앨저 경의 사심이야 어떻든 나서야겠죠. 귀족의 일이 아니라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르는 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럼 왜 도와주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그녀가 알디온 영애의 사주를 받았을지도 모르잖아요? 덫을 놓으려고 경한테 잘못된 정보를 흘린 거라면 어쩌겠어요?”

이에샤는 얼떨떨해졌다. 생각한 적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상했다. 이에샤가 알디온 저택에 간 날, 슈리도 외출 허락을 받았다니. 절묘하지 않은가. ‘리타 밸리의 별’이 뜻하는 바도 가져다 붙였을지 몰랐다. 라제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들 싸움이라는 게 그래요. 정계도 사교계도, 온갖 속임수가 오가죠. 난 앨저 경이 신중했으면 좋겠어요. 라제카의 걱정이 이해됐나요?”

이에샤는 아둔하지 않았다. 라제카의 염려를 알았다. 고마운 일이었다. 라제카는 황제의 금지옥엽이었고, 이에샤는 별 볼 일 없는 기사단장이었다. 황송스러워 해 마땅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밀레나 때문이 아니었다. 이에샤 자신의 육감과 승부 근성을 믿는 까닭이었다. 슈리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이에샤에게 이로움을 불러올 터였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소리를 어떻게 풀어 밝혀야 할까.

“공주님.”

“말하세요.”

이에샤는 긴 숨을 들이마셨다. 머릿속으로 꼼꼼히 말을 골랐다.

“멘델린 경이 저한테 그러더군요. 여자는 남자보다 해를 입을 일이 잦은데, 남자처럼 자기가 당한 불이익을 드러내기 어려워한다고요.”

“……멘델린 경이요?”

“그러니 백화 기사라면 도움을 구하는 여자를 무조건 믿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더이다. 저도 동감합니다.”

라제카가 눈썹을 치켰다. 이에샤는 라제카가 엘테르트에게 약함을 알았다. 오라비는 거리끼지 않았지만, 스승과 같은 엘테르트에게는 고분고분한 것이었다. 라제카도 이에샤가 약점을 파고드는 걸 눈치챘다. 하나 무엄하다고 가로막지는 않았다.

“이게 에브라힐 안의 일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황궁 여인과 평민 여자 하나가 같을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저는, 공주님께서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무얼요? 황태자도 황자도 아닌 라제카가 아는 일은 많지 않답니다.”

“이벨리오노 전하는 공주님을 신뢰하시죠. 특히 백화 기사단 일에서는요.”

라제카는 헛웃음을 흘렸다. 왜 루시온과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두고 여간내기가 아니라 하는지 알 성싶었다. 그동안 귀여움만 받아 와서 몰랐다. 이에샤 앨저는 과감하게 치고 들어가기를 잘했다. 생각 없이 저지르고 보는 것도 아니었다. 호전가라는 낱말이 어울렸다.

“맞아요. 나도 오라버니가 달신교와 교섭 중이시라는 얘기는 들었어요. 하지만 하급 사제 한 명이잖아요? 우리 일에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칠 거예요.”

엘테르트에 이어 루시온까지 이에샤의 패가 되었다. 아리타는 일반인에 지나지 않아도, 부탁을 해 온 슈리는 서품받은 사제였다. 루시온이 달신교와 백화 기사단을 잇기 위해 일할 시간도 깎아 가며 애쓰는 걸 라제카도 알았다. 그뿐이랴? 조언을 건네기까지 하였다. 달신교 교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공부한 적이 있었으므로.

이에샤가 꿋꿋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예측할 수 있는 일도 많아요.”

“결과는 행동해야만 나오는 법입니다. 제가 제국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있었겠습니까?”

이번에는 라제카 쪽이 쩔쩔맸다. 누구도 기사단 입단 시험에 뛰어든 여자 수험자가, 진짜 기사가 되리라고 내다보지 못했다. 실례를 앞에 두자 할 말이 궁색해졌다.

이에샤의 주장에는 빈틈투성이였다. 허술했다. 곤욕을 치를 위험성이 컸다. 하나 이에샤는 뜻을 굳힌 모양이었다. 아리타 기즈라는 여인을 구해 내기로. 이러니저러니 해도 라제카는 이에샤를 좋아했다. 모르는 체하고 싶지 않았다.

끝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어쩔 수 없네요. 좋아요. 라제카의 지혜를 빌려줄게요.”

“정말이십니까? 공주님의 자애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앨저 경을 보조하는 건 내가 아니에요.”

“예?”

라제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말비다를 돌아보았다. 벨제아 부인, 양피지를 가져다줄래요? 말비다는 묵묵히 움직였다. 접견실을 나갔다. 조금 지나서 양피지와 깃펜, 잉크병을 들고 돌아왔다.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라제카가 글을 적기 시작했다. 애티가 나지 않는 유려한 필체가 펼쳐졌다.

“미엘라―이제는 올센 경이죠. 올센 경한테 전해 주세요. 그녀라면 곧장 알아보고 앨저 경을 도울 겁니다.”

“올센 경이요?”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엘라는 얼마 전까지 하녀였다. 사무 작업을 맡기고자 뽑은 평기사에 지나지 않았다. 엘테르트나 라제카 같은 힘을 지녔을 리가 없었다. 라제카가 방긋이 웃었다.

“기왕 일을 칠 거면 크게 쳐야 해요. 그 편이 나아요.”

“죄, 죄송합니다, 공주님.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통 이해가 안 가는데요.”

“이번 일을 백화 기사단의 공로로 만들라는 뜻이에요. 귀공녀들도 자신이 도둑질한 예술품을 샀단 사실을 알 권리가 있죠. 그렇다면 황궁 여인에게 봉사하라는 취지에서 벗어나지도 않아요. 나는 개입하지 않을 테니, 올센 경과 함께하세요.”

‘리타 밸리의 별’ 시리즈를 들쑤시는 일이었다. 사교계가 술렁일 터였다. 호사가들은 가십을 좋아했다. 여자 기사단장과 사교계의 꽃. 알디온 후작의 두 딸이 물어뜯고 싸운 꼴로 몰아갈 수도 있었다. 이에샤 혼자보다, 백화 기사단이 나서서 유행의 진실을 파헤쳤다는 쪽이 보기 좋았다.

이에샤는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내용을 살펴보았다. 라제카는 말리지 않았다. 이에샤가 읽어도 괜찮은 모양이었다.

「친족법 제5례의 3에 의거하여 움직이라. 앨저 경의 이야기를 듣고 관습상 성직자가 발휘하는 법정 효력을 기억하라.」

햇빛이 문장을 비추었다. 잉크가 반짝였다. 영문 모를 말만이 적혔다. 라제카를 곁눈질했다. 라제카는 잔잔히 웃을 따름이었다. 설명은 미엘라에게 들으라는 뜻이 느껴졌다.

양피지를 돌돌 말았다. 품에 갈무리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을 구부려, 공주에게 예를 갖추었다.

“따라 일어나지는 않을게요. 조심히 돌아가요.”

“오늘 공주님께 입은 은혜는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무얼요. 라제카도 그 사제의 말이 거짓이 아니길 기도할게요.”

다정한 인사가 오갔다. 이에샤가 빠른 걸음으로 떠나갔다. 라제카는 “휴우!” 하고 숨을 터뜨렸다. 말비다가 라제카를 내려다보았다. 발랄한 공주님이, 드물게 피곤한 낯을 했다.

“걱정되시면 명령으로라도 말리셨으면 됐을 텐데요.”

“걱정이요? 벨제아 부인, 앨저 경은 일을 맡겨 놓고 걱정할 만큼 섣부른 분은 아니랍니다. 난 다만…….”

라제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에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끼는 바가 있었다.

백화 기사단은 궁전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벌이는 폭력을 막고자 생겨났다. 에브라힐은 작았다. 제국 지도의 점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바깥에서 괴로워하는 여자를 지킬 수단이 없었다. 제도를 넓혀야만 했다. 여자 기사의 안건을 내고, 백화 기사단을 만들기까지도 3년이 걸렸다. 속이 답답했다.

“조급해 하면 안 되는 줄은 아는데, 오라버니를 재촉해야겠어요.”

“안 그러셔도 황태자 전하께서는 일이 많으십니다.”

“아바마마의 뒤를 이으실 건데 이쯤은 참아야죠.”

라제카는 짐짓 싱거운 소리를 재깔였다.

백화 기사단 사무실에도 가구가 늘었다. 이에샤 것보다 작은 미엘라의 책상, 스란이 들여놓은 나무 의자, 서류장 등등. 썰렁하기는 여전했다. 그래도 백화 기사 세 명에 시더까지 들어오면 복닥복닥한 맛이 났다.

미엘라는 제 책상에 앉았다. 상념에 잠겨 들었다. 이에샤에게 올릴 서류라면 정리해 두었다. 이에샤가 출근하자마자 “공주님께 다녀올게!” 하고 떠나 버려서 외로운 신세였다. 스란도 나갔다. 혼자만 사무를 보지 않는 탓에, 할 일이라고는 순찰과 수련뿐이었으므로.

오늘 집에 가면 널어놓은 이불부터 걷어야지. 터는 건 스란 경한테 시키자……. 멍하니 생각하던 참이었다. 사무실 문이 열렸다. 이에샤가 뛰어들었다.

“올센 경!”

“아, 다녀오셨어요? 공주님은 잘 지내셔요?”

“이거부터 봐 봐! 공주님이 올센 경한테 보여 주라신 거야.”

여기까지 달음박질해 온 모양이었다. 블라우스가 흐트러졌다. 미엘라는 눈만 멀뚱거렸다. 이에샤가 내민 양피지를 받아 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뜬금없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정도는 가르쳐 주었으면 싶었다.

상관이자 백작 나리께 대들기는 무서웠다. 라제카가 보냈다는 글을 들여다보았다.

“친족법 5례의 3?”

소리 내서 읽어 보았다.

백화 기사가 된 날, 라제카가 엘테르트 편으로 보낸 책들을 떠올렸다. 법률서가 끼었다. 남녀의 결속으로부터 태어나는 문제를 다룬―가족법에 관한 책이었다. 미엘라는 왜 그런 책을 읽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내용은 기억해 두었다.

“증거 방법에 관계없이 학대를 입증할 수만 있다면 사원의 인가 하에 부부 관계를 끊을 수 있다는, 그러니까 제삼자에 의한 강제 이혼을 말하는 조항인데요. 이걸 왜?”

이에샤는 직감했다. 신년맞이 무도회에서 엘테르트가 쓴 방법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딜란과 달리 알드릭이 아리타를 괴롭힌다는 사실은 증명할 수 없었다. 아리타가 정말로 위험한지조차 불분명했다. 슈리의 걱정만이 이에샤를 움직이는 단서였다.

이에샤는 막막한 일을 붙들고 망설이지 않았다. 다른 문제부터 짚어 나가면, 정답에 다다르는 법이었다. 라제카는 “앨저 경의 이야기를 들으라.” 하고 덧붙여 놓았다. 이에샤는 스란의 의자를 끌어왔다. 미엘라의 건너편에 두었다. 털썩 앉았다.

“얘기하자면 좀 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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