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6 7. 리타 밸리의 별 =========================
(연참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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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 기즈를 구해 내고 한 달.
가쁜 6월이었다. 여름철 제국 기사단 입단 시험이 지나갔다. 뽑힌 수련 기사 열두 명이 누구누구인지는 몰랐다. 제국 기사단의 신입이 백화 기사단까지 인사 올 필요는 없었으므로.
루시온은 이번에도 쓸만한 놈이 없었노라며 분해 했다. 라제카는 백화 기사의 선발 문제로 오라비를 볶아 댔다. 란델은 백화 기사단 사무실에 좋아하는 모험 소설 62권을 가져다 놓았다. 스란은 검을 손발의 연장선처럼 다룰 수 있게, 이에샤에게 사사하기 시작했다. 미엘라는 법률서에 흥미를 붙였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거들었다. 알드릭 기즈를 소송할 수 있도록.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물음을 받고 이에샤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이 밀레나를 감싸는 게 싫었다고 털어놓을 만큼 낯가죽이 두껍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섭섭한 기색이었다. “앨저 경이 모든 문제를 나랑 의논할 필요는 없지만…….” 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라제카와 미엘라의 조언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엘테르트의 목소리가 가슴에 콱 박힌 듯싶었다.
엘테르트는 저야말로 이에샤의 상담자라고 여겨 왔다. 이에샤가 입궁한 날부터 뒷받침한 터였다. 라제카에게 밀린 것이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느끼는 자기 자신도 낯설었다. 이에샤는 에브라힐의 일곱 기사단장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엘테르트의 부하도 동료도 아니었다. 어째서일까.
이에샤는―엘테르트의 속도 모르고―알드릭을 벌하고자 애썼다. 알드릭은 경비대에 붙들린 채였다. 아리타는 달신교 대사원에 머물렀다. 네세라가 페리튼 저택으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친구의 곁이 나으리라 판단했다. 사흘 전에 아리타가 마음을 굳혔다. 남편을 고발하고 이혼하기로. 슈리와 네세라가 증인으로 설 것이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관청에 진정서를 내는 방법, 피고소인을 세우는 과정 등등. 멘델린의 권력을 빌려서 일이 허투루 넘어가지 않도록 살피기도 했다.
이에샤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밀레나가 곤란해질 텐데 괜찮겠어요?”
“알디온 영애가 이번 일과 무슨 상관입니까?”
엘테르트는 담백했다. 이에샤의 고민이 객쩍으리만치. 밀레나 또한 알드릭에게 속은 피해자이지 않냐고 되물어 왔다. 사실이었다. 그러나 교과서적인 답이기도 했다. 인심이란 거칠게 흐르는 법이었다. 리타 밸리의 별 시리즈를 유행시킨 밀레나가 웃음거리가 될 것은 뻔했다. 엘테르트는 쓰게 웃었다.
“알디온 영애의 저력이라면 빠르게 딛고 일어날 겁니다. 나는 이 사건으로 그녀가 잃을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옅은 연민이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걱정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제가 과민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정이라는 놈이 사람을 겁쟁이로 만들었다.
‘리타 밸리의 별’ 사건은 퍼지지 않았다. 평민 부부 사이의 불화였다.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은 드물지 않았다―슬프게도. 이목이 쏠리기에는 모자랐다. 다만 이에샤와 라제카의 기대는 들어맞았다. 사교계에서 백화 기사단의 인기가 높아졌다. 가엾은 여자를 구한 기사님이 아니라 사기 행각을 파헤친 관리가 된 게 가슴 아팠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었다.
또다시 사건이 끝났다. 재판은 시작하지도 않았으나, 잘 풀릴 터였다. 멘델린 소공작이 이쪽의 편이었다. 알디온에서 보잘것없는 평민 남자를 지키려 들 턱이 없었다. 알드릭은 죗값을 치르고 아리타와도 헤어지리라.
지난주부터는 달신교에서 편지가 왔다. 내용은 시시콜콜했다. 아리타의 상태를 전하거나 교단 행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루시온은 상쾌히 웃었다. 폐쇄적인 달신교에서 이만큼의 반응이라니. 백화 기사단이 점수를 딴 모양이었다.
7월이 코앞이었다. 백화 기사들은 코트를 입지 않게 되었다. 블라우스와 트라우저만으로 황궁을 오갔다.
“예쁘다…….”
이에샤는 손가락만 한 은붙이를 들었다. 세선 세공으로 은을 꼬아, 꽃처럼 만든 브로치였다. 아리타가 보낸 선물이었다. ‘리타 밸리의 별’이라는 글귀는 새기지 않았다. 더는 얽매인 몸이 아니었으니까.
이에샤는 가슴께에 영춘 사냥 대회가 끝나고 엘테르트에게 받은 스카프를 달았다. 아리타의 브로치로 고정했다. 조화로웠다. 한사람이 만든 예술 작품 같았다. 두 물건 다 이에샤가 일을 잘 끝냈다는 증이었다.
여름이 피어났다. 처음 기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계절도 여름이었다. 1년은 채우지 못했으나, 머지않았다. 이에샤는 제가 퍽 잘해 왔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여유가 생길 터였다. 온 에브라힐을 놀래어 줄 날도 곧이었다.
* * *
벨체터에는 마법사가 귀했다. 당연했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할 만한 나라가 못 되었으므로. 마법은 기적 같은 기술이었다. 마법 연구와 풍요는 맞닿았다. 요즈음 마법사가 생길 만한 곳이라고는 델페레타뿐이었다.
아고르 틸트라는 마법사였다. 아고르가 마법을 배운 데는 우연에 우연이 겹쳤다. 아고르의 어머니는 레오웰 난민 2세였다. 레오웰어를 읽을 줄 알았다. 아고르에게도 가르쳐 주었다.
아고르는 열두 살, 내란통에 부모와 헤어졌다. 헤매다가 화적떼를 맞닥뜨렸다. 도망친 곳은 산이었다. 정신없이 뛰다가 발을 헛디뎠다. 땅굴로 떨어져 내렸다. 그가 옛날 마법사의 연구실 입구였다. 마법사는 아고르의 외조부모처럼 레오웰 왕국이 도시 연합으로 쪼개지며 흘러온 난민이었다. 연구서도 모두 레오웰어로 쓰였다. 똑똑한 머리를 타고난 아고르는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산을 빠져나온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다. 한동안은 거지꼴로 다녔다. 어느 날 누군가가 아고르의 팔을 낚아챘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힐가였다. 힐가는 아고르에게 밥을 먹였다. 양아들인 셈브리온과 킬타로스도 소개해 주었다. 아고르는 셋이 일하러 나간 사이 집안일을 하는 조건으로 잠자리를 얻었다. 그들이 아고르의 가족이 되었다.
지금은 한 사람도 남지 않았지만.
피올라 거리는 뒷골목도 깨끗했다. 아고르는 우두커니 섰다. 앞쪽의 독챗집을 바라보았다. 엷은 불빛이 흘러나왔다. 셈브리온이 거실에 있는 모양이었다. 벨체터 종전 세력 ‘빌버’의 동료가 다가왔다.
“마법사. 이제 정말로 떠나야 해. 계속 뭉개다간 위험하다고.”
“이브론과 함께 가야 한다.”
“등신. 몇 번을 거절당했냐?”
아고르는 이를 악물었다. 킬타로스마저 죽었다. 셈브리온을 되찾아야 했다. 접촉해도 벨체터 따위 잊었다는 대답만 돌아왔으나, 포기할 수 없었다. 외톨이가 되기는 싫었다. 세상은 왜 아고르가 사랑하는 사람마다 앗아가는가.
“……킬타로스의 복수도 하지 못했어.”
“이제 와 별수 있어? 촉매는 엉뚱한 인간한테 갔다며.”
분통이 터졌다. 킬타로스의 원수에게 앙갚음이나마 하려고 했다. 추적 마법을 짰건만, 어째서인지 엉뚱한 사람을 끌어들였다. 마법 ‘멈추지 않는 바퀴’를 건 보석이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몰랐다.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허망했다.
아고르의 동료는 혀끝을 찼다.
“이번 제국행은 실패야. 황후도 죽이지 못했고 별다른 수확도 없어. 돌아가서 계획을 새로 짜고 다시 오면 될 거 아니야.”
“이브론을 데려가야 해.”
“그놈은 안 가.”
경멸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문의 붉은 악몽은 이빨이 빠져 버렸다. 장바구니를 덜렁이며 거니는 꼴이란. 홀몸으로 기사단 하나를 없애 버렸던 브링어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탑 델페레타의 평화를 맛본 놈이 미쳤다고 벨체터로 돌아가겠냐? 고집 그만 피워, 아그레.”
“이브론은 내 가족이야.”
“넌 버림받은 거라니까.”
아고르는 질끈 눈을 감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힐가도 킬타로스도 떠났는데, 셈브리온마저 저를 저버리다니. 동료가 쉬어 터진 웃음소리를 냈다.
“어차피 제국은 곧 쑥대밭이 될 거야. 그때 우리의 개망나니를 죽인 새끼도 비명횡사하기를 바라자고.”
아고르의 고개가 뒤로 기울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았다. 매캐한 연기로 뒤덮인 벨체터의 하늘과는 달랐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땅에서 숨을 거둔 킬타로스는 운이 좋은지도 몰랐다. 아고르는 긴 숨을 쉬었다.
“……돌아간다.”
“잘 생각했어.”
셈브리온과 웬 계집이 사는 집을 돌아보았다. 깔끔하고 널찍해 보였다. 힐가의 오두막과는 딴판이었다. 서글펐다. 이럴 거였다면, 죽은 줄 아는 편이 나았었다.
============================ 작품 후기 ============================
아고르가 쏘아 올린 작은 보석...은 원래 이에샤를 노린 것이었지만 애꿎은 밀레나가 주웠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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