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7 8. 낮게 나는 독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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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르력 753년 8월 1일.
백화 기사단의 하계 정복은 동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람이 통하는 재질로 지은 블라우스에, 가운데에는 자보가 달렸다. 코트 대신 조끼가 주어졌다. 가슴이 깊게 파인 상앗빛 턱시도 베스트였다. 아랫단에 금실로 꽃 덩굴이 수놓였다. 바지도 감이 얇아졌다뿐이지 비슷한 트라우저였다.
이에샤는 조끼를 여몄다. 거울 앞에 섰다. 훤칠한 몸태가 두드러졌다. 동복이 그러했듯이, 하복 또한 이에샤를 위해 디자인된 것만 같았다. 허리에 양손을 얹어 보았다. 누구라도―알디온 일가조차―멋지다고 인정할 성했다. 만족스러웠다.
셈브리온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이에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바지를 입고도 천박해 보이지가 않았다. 남성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말괄량이 부잣집 딸처럼 귀티가 났고, 생기로웠다. 몸치레를 해도 지금보다 눈부시지는 못할 듯싶었다. 하녀 한 명 없어서 산발한 채, 낡은 드레스만 입던 계집애였는데. 셈브리온이 세수를 시켜 주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 콧노래 하며 머리카락을 빗는 아가씨가 새삼스러웠다.
“어때? 세비.”
“시원해 보이고 좋네. 예쁘다.”
“당신도 돈 찾아다 새 여름옷 몇 벌 맞 춰. 나 이제 잘 벌잖아.”
“얼씨구. 이 스승님 아직 이-샤 돈으로 호의호식할 만큼 기력 떨어지진 않았어요.”
이에샤는 깔깔 웃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셈브리온은 식비를 빼면, 이에샤의 봉급에 손대려 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셈브리온의 저금으로 살 때 이에샤도 물욕을 죽였으므로. 이에샤는 셈브리온이 제 돈을 털어서 도박판에 쏟아붓더라도 괜찮았다. 그동안 진 빚이 얼마던가. 셈브리온이 사치도 부리고 지냈으면 싶었다.
“그럼 나 다녀올게.”
“잘 다녀와. 오늘도 너보다 약한 놈들한테 밀리지 말고. 힘내.”
“네에, 네에.”
이에샤는 꽃피듯이 웃으며 인사했다. 황궁 사람들이 본다면 눈을 비빌 모습이었다. 꾸밈없게 느껴지리만치 환한 낯은 셈브리온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본인은 남 앞에서 표정이 딱딱해지는 줄 깨닫지 못했지만.
역마차 정거장을 향했다. 가뿐가뿐히 걸었다. 옷이 얇아지니 산뜻했다. 허리께를 내려다보았다. 검을 차는 가죽띠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에는 양끝으로 바지 주머니가 자리했다. 오른쪽 주머니에 은 브로치로 이보르 센트라의 스카프를 매달았다. 가슴에 달까 했다가, 셈브리온의 권유로 허리 옆에 늘어뜨렸다. 퍽 그럴싸했다. 스카프를 보자 절로 누군가가 떠올랐다.
‘대체 뭘까.’
생각에 빠져들었다. 사흘 전을 돌이켜보았다. 엘테르트가 취한 행동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제 손을 힘주어 움직여, 우산을 쥐여 주던 접촉. 당신이 걱정되었다는 말. 젖어서 고혹적으로 반짝이던 살결……. 이에샤는 속으로 욕지거리했다. 자신이 이다지 육욕적인 사람인 줄 몰랐다. 달신교 사원에라도 찾아가서 뉘우쳐야 할 것 같았다.
루시온의 이야기도 떠올렸다. 이에샤가 엘테르트와 가장 가까운 여자라는.
‘그러니까 이건, 그거지?’
사랑에 눈이 멀어 망상증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엘테르트의 태도는 뚜렷했다. 감정의 크기나 깊이야 어찌되었든, 이에샤를 ‘여자’로 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한숨이 흘러넘쳤다. 골치가 아팠다.
첫째로, 엘테르트와 이에샤는 지독히도 안 어울렸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멘델린 공작 부부가 가만있지 않으리라. 이에샤는 멘델린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셈브리온에게 세상의 좋은 것은 다 안겨 주며 오래오래 살아야 했다.
둘째로, 이에샤는 사랑이 싫었다. 사랑은 오스터와 셀더리가 에이릴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던 핑곗거리였다. 도대체 그것이 뭐라고, 가문 대 가문의 약속을 깨고도 떳떳하단 말인가. 이에샤는 엘테르트에게 반한 자기 자신조차 끔찍스러울 때가 있었다.
셋째로, 세간의 눈총을 받고 싶지 않았다. 제가 알려진다면 ‘천재 검술사’로서 알려져야지, ‘멘델린 소공작의 염문 상대’로는 안 되었다. 엘테르트도 이에샤와 엮이면 곤란할 터였다.
처음부터 가망이라고는 없는 감정. 이에샤는 깔끔하게 결론지었다.
‘그냥 평소대로 대하면 되겠네.’
어느 쪽도 관계를 좁히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모르는 척하면 되었다. 생각이 정리되었다. 어수선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단골손님인 이에샤를 기다리는 역마차가 보였다.
그때였다.
“……무슨!”
일은 삽시간에 벌어졌다.
어린아이 둘이 까르륵하며 달려왔다. 이에샤는 가까이에 사는 꼬마들이겠거니 했다. 흔한 풍경이었다. 저를 지나쳐 가리라 여겼다. 여상히 걷는데, 한 아이가 손을 뻗었다. 이에샤의 허리를 노렸다. 매달린 스카프를 잡아당겼다. 투둑! 브로치의 핀이 휘었다. 스카프가 떨어져 나갔다. 이에샤는 멍해졌다. 녀석들이 건물 사잇길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에샤의 감각과 반응 속도라면 소매치기에 당할 턱이 없었다. 하나 상상치도 못했다. 아이들의 차림새가 깔끔했으므로. 비렁뱅이나 부랑아로는 보이지 않았다. 넋을 놓고 말았다. 조금씩 상황이 이해되었다. 온몸의 체온이 식는 듯했다. 이에샤는 망가진 브로치를 갈무리했다. 땅을 박찼다. 종아리부터 발끝까지 브링을 맴돌렸다. 아이들이 사라진 길로 뛰어들었다.
골목은 비좁았다. 이에샤의 몸집으로는, 몸을 비스듬히 하고 걷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감을 가다듬었다. 수도에서 사람 둘의 기척을 잡아내기란 불가능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노여움이 치밀었다.
“건방진 천것들이.”
스산히 중얼거렸다. 수더분하게 산다 해도 귀족이었다. 후작 영애로 태어나, 백작위를 이었다. 평민의 무례를 보아 넘길 아량은 없었다. 두 녀석을 찾자마자 베어 버릴 셈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빼앗긴 물건이 스카프가 아니었다면, 운이 나빴노라 하고 출근을 서둘렀을 터였다. 하지만 이보르 센트라의 스카프는 오래간만에 받은 선물이었다. 엘테르트가 준 것이기도 했다. 찾지 못한다면 응어리질 성싶었다.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의 굴욕처럼. 이에샤는 떨쳐 낼 수 없는 괴로움을 또 느끼기 싫었다.
양쪽 건물의 모서리가 보였다. 골목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걸어오는 동안 머리를 굴렸다. 여느 가정의 아이가 장난을 쳤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날카로운 청력으로 똑똑하게 들었다.
「야호! 이거라면 오늘은 사탕도 살 수 있을지 몰라!」
‘오늘은’. 다른 날에도 일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슬하에서 상습적으로 도둑질을 할 수 있을까? 수도의 준법성은 매우 높았다. 경비대에 붙들리면 몇 달치 생활비가 날아갈지도 몰랐다. 끼니가 아니라 사탕 같은 호사품을 사겠다는 것도 미심쩍었다. 보호자가 없지만, 의식주는 보장되는 처지. 이에샤는 근방에 무엇무엇이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
향해야 할 곳을 알 듯싶었다.
힘을 다해서 뛰었다. 행인이 많았다. 거치적거렸지만, 솜씨 좋게 헤쳐 나갔다. 바람처럼 달리는 바지 차림의 여자를 손가락질하는 이도 있었다. 이에샤는 개의치 않았다.
반원형의 지붕이 보였다. 벽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건물이었다. 빨강과 노랑 계통의 색유리가 해와 저울대 모양을 이루었다. 어린아이 여럿이 재잘재잘했다. 해신교에서 꾸리는 보육원이었다. 처음 와 보았으나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보육원 수녀가 쓰지 않는 물건을 기증해 주십사, 집집을 돌고는 했으므로.
이에샤는 야트막한 철문을 걷어찼다. 뜰로 들어섰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땅바닥을 비질하며 까불던 꼬마 무리를 살펴보았다. 소매치기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놀라서 입가를 가린 수녀에게 다가갔다.
“누, 누구신지요?”
“황실 백화 기사단장, 앨저 백작 이에샤요. 물을 말이 있소만. 신분 증명이 필요한가?”
“아, 예, 예! 백작님이시군요. 아닙니다. 앨저 백작님이라면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이에샤의 눈썹이 꿈틀했다. 수녀가 알디온 후작 부부의 스캔들을 말하는 줄 알았으므로. 짜증을 억눌렀다. 한 음절 한 음절 짓씹듯이 말했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 명부를 보고 한 명씩 얼굴을 대조하고 싶은데.”
“예?! 갑자기 그 무슨, 혹시 황실에서 감사를 나오신 겁니까?”
“아니.”
수녀는 움찔했다. 이에샤로부터 견디기 힘든 기세가 풍겼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분노한 귀족이 쳐들어온 까닭을 짚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해신교 보육원 중에서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여기 사는 사내애 둘이 내 물건을 도둑질해 간 듯해서 말이오. 심증뿐이니 확인해 봐야겠소.”
“……시, 심증만으로 그런 일을 하실 수는 어, 어, 없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아니라면 어, 어찌하시려고요.”
“만에 하나 그렇다면 내 명예를 걸고 보상하지. 자, 그럼, 여기 애들이라면 어찌하겠소?”
이에샤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망설임 없이 샛길에 뛰어들 만큼 지리를 아는 녀석들이었다. 부근에 다른 보육원이나 탁아소는 없었다. 정보를 짜 맞추어 보면, 여기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수녀가 이상하리만치 벌벌 떨었다. ‘사내애 둘’이라고 말했을 즈음부터였다. 틀림없었다.
‘금방 귀가한 두 놈이 있지 않고서야 이럴 리 없지.’
이에샤가 눈을 홉떴다. 말없이 다그쳤다. 수녀는 이에샤의 허리를 곁눈질했다. 불길해 보이는 검은색 롱소드에, ‘신이시여.’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샤가 도둑을 찾아내면 어찌할 셈인지 짐작되었다. 상대는 귀족에 기사단장이었다. 아이들을 지킬 방법이 없었다. 납작 엎드려 자비를 구하는 수밖에는. 원장 사제는 귀빈을 맞는 중이었다. 혼자서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배, 배, 백작님, 제발. 그 아이들도 설마 귀족 나리이실 줄은 모르고 그랬을 겁니다. 알았다면 그랬을 리가 없죠. 훔친 물건은 제가 찾아서 돌려드릴 테니 용서해 주십시오. 해신의 가르침대로 자애와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미안하지만 난 달신교 쪽이오. 짐작 가는 놈들이 있다면 당장 끌고 와.”
이에샤는 싸늘하게 잘라 말했다. 수녀의 둥그런 눈망울에 물기가 차올랐다.
“아아! 제발. 용서해 주세요. 심성은 나쁜 아이들이 아닙니다. 실수했을 겁니다. 제발…….”
“무슨 일인가?”
불쑥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이에샤는 주춤했다. 등허리가 뻣뻣하게 곧추섰다. 이 자리에서 들을 턱이 없는 목소리였다. 낮고 부드럽게 울리는 음색. 그 사람도 놀란 듯했다. “이런?” 하는 감탄사가 새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돌렸다.
“앨저 경? 경이 어떻게 여기 있습니까?”
“멘델린 경.”
엘테르트가 크게 뜬 눈으로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셔츠에 진녹색 조끼를 덧입었다. 크라바트를 드리운 모습이 우아스러웠다. 이에샤의 뺨이 달아올랐다. 빗속에서의 일이 되살아났다. 화르르 붉어진 낯을 알아차리고 엘테르트도 당황했다.
“저는, 그게, 도둑을 잡으려고.”
“도둑이요?”
“소매치기를 당했는데, 아.”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엘테르트가 준 스카프를 잃어버렸노라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칠칠치 못한 인상을 줄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는 멘델린 경은 왜 여기 계시죠?”
“제가 후원하는 보육원이라서 둘러보러 왔습니다.”
“이런 외진 보육원을 후원한다고요?”
“음, 정확히는.”
엘테르트가 고개를 기웃했다. 이에샤는 작은 움직임마저 귀엽다고 생각해 버렸다. 중증이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속도 모르고,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했다.
“중부 지방에 있는 모든 해신교 보육원을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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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포인트: 열받은 이에샤를 진정시킬 때는 엘테르트를 던져 주면 좋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오백삼십이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 오전 9시 30분, 오타 수정했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