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90화 (90/164)

00090 8. 낮게 나는 독수리 =========================

10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소년의 생김새조차 어렴풋했다. 쟐레 왕국에서 왔다는 사실만이 기억났다. 스란의 살색은 제국인치고 어두운 편이었으므로, 가무잡잡한 쟐레인에게 친숙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소녀 적에는 중키에 근육질도 아니었다. 용병 길드를 드나드는 남자에게 희롱당한 일도 잦았다. 쩔쩔매는 스란을 소년이 도와주기도 했다.

“쟐레에는 여전사도 있다지 않습니까. 저한테도 별 생각 없이 그랬겠죠.”

“쟐레 사람이었어? 그럼 스란 경의 검술은 그쪽 식이겠네?”

“아닙니다. 그 애한테 배운 건 정말 기초적인 것뿐이고, 그나마도 돌이켜보면 허술했습니다. 저는 암무에 들어가 정식으로 검술을 배웠으니 제국식입니다.”

이에샤는 “아아…….” 하며 아쉬워했다. 외국의 검술이기를 바랐다. 자신도 벨체터의 용병과 같이 싸웠으나, 쟐레는 먼 바닷가 왕국이었다. 평생 가 볼 일 없을 터였다. 접할 기회가 많은 제국 검술보다 관심이 갔다.

상념에 빠졌다가 스란의 나이가 떠올랐다. 꼽아 보면 십 대 중반에 검술을 시작한 셈이었다. 이에샤가 브링어가 된 무렵이었다. 지금 스란은 제국 기사와도 견줄 수 있었다. 소질이 제법인 듯했다. 어느 용병 소년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으리라.

“그 애가 없었으면 지금의 스란 경도 없었겠네.”

“얘기가 그렇게 됩니까.”

“스란 경은 걔한테 아무 감정 없었어?”

스란이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눈동자가 신비로웠다. 저토록 짙은 빛깔은 벨체터에서나 볼 수 있었다. 이에샤는 스란이 혼혈이 아닐까 짐작했다. 그렇다면 ‘천한 출신’ 운운한 것도 이해되었다. 제국인들은 전쟁국에서 몰려든 난민을 깔보았으니까.

스란은 생각에 잠겼다. 이에샤에게 과거를 털어놓게 될 줄은 몰랐다. 사사로운 이야기를 삼가는 것은 암무단원으로서의 버릇이었다. 대단한 비밀은 없었다. 말해도 괜찮으리라. 하지만 그 소년은 유쾌한 이야깃거리가 아니었다.

“하루하루 살기도 벅차서 아무 생각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쪽에서 먼저 저를 싫어하게 됐고요.”

“응? 어째서?”

“제가 조금씩 강해지고, 대련에서도 이기자 꺼림칙해 하더군요.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쟐레로 돌아갔는지 다른 나라로 갔는지.”

소년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태도가 바뀌어 섭섭했기는 했다. 이십 대 중반에 이른 지금에서는 소년이 왜 그러했는지 알았다. 신물이 날 만큼 하잘것없는 까닭이었다. 지긋지긋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란 여자가 자길 위해 무언가 해 주길 바라지만, 자기보다 잘하면 짜증 부리는 족속입니다. 제가 본 놈 대부분이 그랬습니다.”

“그, 런가?”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셈브리온을 떠올렸다.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자신을 따라잡을 때마다 기뻐했다. 브링을 깨치자 “것 봐, 넌 천재라니까!” 하며,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기까지 했다. 한 번도 이에샤를 질투한 적 없었다. 스란의 이야기는 낯설었다. 스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에샤가 물정에 어두운 줄은 보기만 해도 알았다. 아리송할 만도 했다.

“여자를 자기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제국 기사단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 그러네.”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단장님, 으음, 암무단장의 눈에 들어 에브라힐로 왔습니다. 교육을 받으면서도 남자 동기들에게 많이 시달렸어요.”

스란은 제 소속이 백화 기사단임을 기억했다. 말을 고쳤다. 이제 ‘단장님’이라 한다면 이에샤를 일컬어야 했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제국 기사를 예로 드니 알 성했다. 결투에서 지고, 인정할 수 없다고 소리지르던 치들. 이에샤는 몇 번이나 속임수를 썼다고 의심받았다. 여자가 그만한 완력을 지녔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몸수색을 받기도 했다. 보다 못한 엘테르트가 백화 기사단장의 실력을 트집 잡는다면 엄벌하겠다며 나섰었다.

“…….”

“왜 그러십니까?”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동안 지나치게 엘테르트나 루시온, 라제카의 권위를 빌려 왔다. 스스로 납득시키지 못했다. 이대로는 안 되었다. 백화 기사단장이, 이에샤 앨저가 해내야 했다. 계기가 필요했다.

“스란 경.”

“예.”

“내가 제국 기사단장을 몇 번째까지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스란은 입을 다물었다. 예사로이 던져졌으나, 엄청난 물음이었다. 제국 기사단장은 브링어로만 이루어졌다. 델페레타의 브링어는―이에샤를 빼고―열넷. 네 명은 노쇠했다. 네 명은 동서남북 지방 기사단을 이끌었다. 나머지가 수도의 최정예였다. 성년도 되지 않은 계집애가 제국 기사단장을 이긴다?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스란은 웃어넘기지 않았다.

“……4 기사단까지는 되지 않겠습니까.”

“흠! 역시 그 정도인가?”

“예. 3 기사단장부터 미묘하죠. 상반과 하반의 격차는 크니까.”

“그럼 스란 경.”

이에샤가 거듭하여 불렀다. 스란은 귀만 기울였다.

“내가 날마다 근위 기사단장급 브링어랑 대련을 해 왔다고 치면, 3 기사단장하고 붙어서 어떻게 될까?”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체사로가 2 기사단장보다 못하더라도, 기사의 정점이었다. 실력으로만 따져도 세 손가락 안에는 들었다. 스란은 이에샤의 말속을 알 수 없었다. 구태여 가정해 본다면 답은 뚜렷했다.

“필승하겠죠.”

“그럼 됐어.”

“앨저 경?”

이에샤가 양팔을 앞뒤로 저었다. 튕기듯이 일어났다. 검을 집어 들었다. 허리띠로 갈무리했다. 스란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됐다니, 무어가? 이에샤는 스란의 의문을 풀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등허리를 휘며 기지개했다. “들어가자.” 하고 부추겼다. 스란은 한숨지었다.

아, 사무 일 싫다. 이에샤가 꿍얼거렸다. 3 기사단장과 결투를 벌일 야심에 부풀었던 마음이 삭아앉았다. 지각한데다, 오자마자 연무장으로 나왔다. 아침에 보아야 할 서류가 쌓였을 터였다. 미엘라는 발을 동동 구를 테고.

브로치가 망가져 목에 감은 스카프를 만지작거렸다. 엘테르트의 모습과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연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이. 그때는 놀랍고 쑥스럽기도 했지만, 아무런 느낌도 남지 않았다. 사랑은 이루어져야만 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묻어도 되고, 흘려도 되고, 떨쳐 내도 되었다.

이에샤는 델페레타에서 가장 행복한 숙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엘테르트를 받아들인다면 훗날이 되리라. 제 이름이 ‘멘델린’마저 뒤덮을 수 있게 되고, 엘테르트의 감정이 변함없다면.

‘……그런 날이 올까.’

첫사랑은 접기로 했었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석곡궁으로 들어가는 샛문을 당겨 열었다. 지금은 어지러운 고민보다 일이 먼저였다.

흰색 육두마차가 알디온 후작 저택 앞에 멈추었다. 집사가 맞이했다. 안내인을 내보내지 않고 직접 나오다니, 귀빈이라는 뜻이었다. 마부가 마차 문을 열었다. 아름다운 청년이 머리를 숙이며 나왔다. 발받침을 밟았다. 땅으로 뛰어내렸다. 집사가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소공작님. 주인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안내해라.”

“오찬을 함께하고 싶다 하셨는데,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성의는 고맙지만 식사를 마치고 왔다. 후작에게도 그리 전해라.”

당황했지만 토는 달지 않았다. 알디온은 멘델린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처지였다. 멘델린의 투자금을 남에게 융통해 준 일이 들통나, 경을 쳤으므로. 주인님은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하다며 큰아가씨를 불렀었다. 하지만 이에샤가 다녀가고 남은 것이라고는 동강 난 대리석 테이블뿐이었다. 오스터는 며칠이나 드러누웠다.

현관문을 지나쳤다. 하인과 하녀가 줄지어 고개를 수그린 채였다. 엘테르트는 이러한 환영에 익숙했지만, 불편했다. 가운데에서 밀레나가 드레스 옆 자락을 들어 올렸다.

“어서 오세요, 엘테르트 님. 오랜만에 찾아 주셨네요.”

“안녕하십니까. 못 보던 사이 더 아름다워졌군요, 영애.”

엘테르트는 상투적으로 치례했다. 거짓말도 아니었다. 밀레나는 만날 때마다 눈부셔졌다. 왜 사교계가 밀레나의 발아래에 엎드렸는지 알 것 같았다. 엘테르트는 ‘리타 밸리의 별’ 사건에 관하여 위로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밀레나도 묻고 지나가기를 바랄 터였다.

이에샤가 떠올랐다. 중증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의 서재에서 처음 만났으니까. 밀레나와 사이가 나쁘다는 사실도 기억났다. 밀레나는 이복언니의 안부를 묻고는 했었다. 모양새만 낸 행동이었을까? 엘테르트는 밀레나가 이에샤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탓할 바는 아니라고 여겼다. 화목한 가족을 연기하는 것은 귀족 대부분이 짊어진 ‘일’이었다.

다만 연모하는 여인이 싫어한다니, 엘테르트도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오해를 살까 봐 두려웠다. 신년맞이 무도회에 파트너로 나가기도 하지 않았는가. 거리를 두어야 할 성싶었다.

“그럼 알디온 영애, 저는 부친을 보러 이만. 편안한 오후 되십시오.”

“……감사해요. 방해가 안 된다면 이따 다과를 올리러 가도 될까요? 아버지께서 제가 우린 차를 좋아하시거든요.”

“그런 일은 하녀를 시키시지요. 귀한 몸으로 직접 움직일 것 없습니다. 나는 서재로 가 있겠다고 후작에게 전하도록.”

엘테르트는―예의에 어긋나지 않게끔―밀레나를 물리쳤다. 계단을 디뎠다. 집사는 식당으로 달려갔다. 하인들이 누가 엘테르트를 수행할지 우물쭈물하는 사이, 엘테르트는 성큼성큼 올라가 버렸다.

밀레나는 양손을 모았다. 가슴 밑을 감싸쥐었다. 후우우. 숨을 골랐다. 속을 다스리는 티가 뚜렷했다. 밀레나의 측근 하녀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언니가 무언가 말을 옮긴 모양이구나.”

“큰아가씨께서요?”

“……이 집의 아가씨는 나뿐이란다. 앨저 백작님이라고 제대로 불러 줘야지.”

하녀는 민망하게 “죄송합니다.” 하고 사죄했다. 밀레나는 빙그레 웃었다. 손을 내저었다. 서투른 하녀가 드레스에 차를 엎질렀을 때도, 격분하는 셀더리를 말렸던 저였다. 이만한 실수로는 노엽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답답했다. 한동안 산뜻했던 기분이 날아가 버렸다. 엘테르트가 담을 지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밀레나의 미소만 보아도 얼어붙는 청년들과 엘테르트는 판이했다. 의아스러웠다. 밀레나는 한쪽 뺨을 감싸 쥐었다.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이렇게 예쁘게 굴어 주는데 왜 아무렇지도 않지?’

헤아려 보아도 엘테르트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은 저였다. 둘만큼 어울리는 쌍은 없었다. 주방 하녀를 불러왔다. 차와 가벼운 요깃거리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엘테르트가 무어라 했든지, 다과는 가져갈 셈이었다. 아버지에게 차를 올리겠다는 레이디를 누가 쫓아낼 수 있을까.

============================ 작품 후기 ============================

자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누구 좋아한다고 얽매이고 끌려다니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일은 약속이 있어서 쉽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말것냥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