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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93화 (93/164)

00093 8. 낮게 나는 독수리 =========================

엘테르트는 고민했다. 이에샤와의 일을 루시온에게 말해야 하는가, 묻어 두어야 하는가. 실연은 엘테르트와 이에샤, 두 사람의 문제였다. 제삼자에게 늘어놓기도 우스웠다. 하나 루시온이 그리는 줄 아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은 잘못처럼 느껴졌다. 새치기한 듯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에샤는 줄을 선다고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이에샤의 뜻이었다.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는 상관없었다. 루시온과 경쟁하듯이 생각하는 건 실례였다. 그러나 사촌 동생을 저버린 기분도 떨치기 어려웠다. 이율배반적이었다.

일주일을 생각한 끝에, 엘테르트는 털어놓고 말았다. 이에샤에게 고백했노라고. 루시온은 눈을 치떴다. 입을 다물었다. 한참 만에 꺼내 놓은 답은 뜻밖의 내용이었다.

“왜 차였어?”

“무슨 소리야?”

“앨저도 너한테 마음이 있었을 텐데.”

엘테르트는 말을 삼갔다. 어떻게 풀어 밝혀야 할까. 속으로 낱말을 골랐다. 이에샤의 신념과 명예에 관한 이야기였다. 섣부르게 전달하고 싶지 않았다.

“나랑 함께하면 그녀는 앨저 경이 아니라, 멘델린 소공작의 연인이 된다는군. 오롯한 자기 힘으로 얻는 명성이 아니면 싫다고 했어.”

“푸하!”

루시온은 숨을 터뜨렸다. 배까지 잡고 킬킬거렸다. 엘테르트는 짜증스럽게 그 꼴을 지켜보았다. 어느 부분이 루시온의 흥미를 건드렸는지 몰랐다. 루시온이 가슴을 두드렸다. 웃음이 멎었다.

“꼴좋다, 형님. 나한테는 잘난 듯이 충고하더니.”

“장난치지 마.”

“장난 아냐. 에르디, 너 정말로 몰랐던 거야?”

엘테르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루시온의 말속을 알 수가 없었다. 루시온은 혀끝을 찼다. 엘테르트의 행동거지는 합리적이었다―지나치리만큼. 맞설 사람이 없는 탓인지, 고르는 선택지마다 예상대로 흘러갔다. 처세가 고루해졌다. 루시온도 라제카가 아니었다면 비슷했을지 몰랐다. 뒤에서 쫓아 붙는 천재 때문에, 수재인 루시온은 끊임없이 안목을 닦아야 했다. 하지만 엘테르트는 라제카를 가르칠 정도로 똑똑했다.

“앨저 경이 바라는 건 언제나 하나였어. 자기 자신을 인정받는 거.”

“위태로운 그녀를 내가 가진 조건들로 지지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이상적이고 이론적으로 참 좋은 방법이지.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딱딱 움직일 수가 없잖아.”

루시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엘테르트도 알았으리라. ‘계산’한 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다는 걸.

루시온과 엘테르트는 의좋은 종형제였으나, 딴판이었다. 루시온은 개인의 욕망과 재주를 꿰뚫는 데 뛰어났다. 엘테르트는 어울림을 꾀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조율하고자 했다. 따지자면 이에샤는 엘테르트보다 루시온과 맞을 터였다. 그런데도 마음을 준 상대는 엘테르트였다. 아이러니했다.

“솔직히 에르디 네가 앨저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윽.”

“기왕 반한 거 잘 도와줘. 힘들어할 때 얘기만 들어 줘도 위안일 테니까.”

“너는? 루시온.”

루시온은 빙그레했다. 엘테르트의 말마따나 저에게는 이에샤보다 황실이 중했다. 황태자로서 자긍을 지녔고, 델페레타 제국을 사랑했다. 이에샤를 첫 번째로 여기지 못했다. ‘내 모든 것을 이용하라.’ 같은 말은 할 수 없었다.

“앨저가 좋아하는 건 너잖아.”

“차였다니까.”

“그러게 나처럼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앨저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막아 버리면 쪽팔릴 일 없잖아. 얼마나 좋아. 우리 에르디는 성질이 급해서 탈이에요.”

“루시온, 너 지금 재밌어 죽겠지?”

루시온은 서류에 필기체로 서명하며 “당연하지.” 하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건을 의논했다. 냉방 마법이 걸린 객실을 살롱에 빌려줄지, 뱃놀이 중 벌어지는 사고에 어떻게 대처할지……. 브로칸에서 닐보칸으로 얼음을 옮기는 일도 이야기했다―닐보칸에서는 이모작을 할 수 있었다. 델페레타는 두 번 거두어들인 곡물로 식량을 비축했다. 여름에는 브로칸의 만년빙을 닐보칸으로 보내야 했다. 농가에 나눠주어,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농사꾼이 줄도록. 본디는 이동 마법을 썼다. 십여 년 전부터 비용 문제로 반영구 냉동 마법이 걸린 이동식 빙고를 쓰게 되었다. 9월이 오기 전에 얼음을 실은 마차가 출발해야 했다.

정오가 다가왔다. 점심은 가볍게 때우기로 했다. 하인을 부르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 숙인 시종이 들어왔다.

“전하.”

“무슨 일이냐.”

“백화 기사단장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엘테르트는 움찔했다. 루시온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서 들라 하라. 반갑게 맞아들였다. 시종이 물러갔다. 정복을 빠짐없이 갖춘 이에샤가 들어왔다. 엘테르트를 보고 멈칫했다가, 놀란 티를 감추었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멘델린 경도 안녕하십니까.”

“어쩐 일이야? 그대가 호랑가시궁으로 다 오고. 일어나, 이쪽으로 와서 앉아.”

“아닙니다. 서 있어도 괜찮습니다.”

루시온의 권유를 물리쳤다. 일개 기사단장이 황태자와 동석해서는 안 되었다. 가리킨 자리가 엘테르트와 가까워서이기도 했다. 일주일 전에 차 버린 남자와 나란히 앉을 만큼 신경이 무디지는 못했다. 루시온이 “딱딱하구만.” 하고 투덜거렸다. 이에샤는 루시온의 책상 앞에 섰다.

“교좌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전하께 올리고픈 청이 있어서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점심 뭐 먹을지나 얘기하고 있었는걸. 편하게 털어놔 봐. 그대라면 염치없는 부탁은 하지 않겠지.”

“으음.”

침음이 새었다. 루시온의 믿음은 황송했지만 무거웠다. 터무니없는 일을 꾸미고 온 까닭이었다. 황태자라도 쉬이 들어주기 힘든 부탁이었다. 손가락을 다짐하듯이 그러모았다. 루시온과 엘테르트는 어리둥절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무엇이기에 이에샤가 망설이는지 몰랐다.

“실은 전하, 제가 제국 기사와 명예 결투를 벌이고 싶습니다.”

“결투? 증인이라도 되어 달라는 건가? 내가 직접?”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입회해 주셨으면 합니다. 모두가 결과에 승복할 수 있도록.”

루시온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이에샤를 보았다. 이에샤의 부탁은 어렵지 않았다. 동시에 까다로웠다. 구경해 주기만 하면 되었으나, 황태자가 나서는 결투라. 예삿일이 아니었다. 당사자가 기사단장이기까지 했다. 소규모 황실 행사로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상대가 누구이기에 저를 끌어들이나 싶었다. 엘테르트도 놀란 모습이었다.

“누구와 결투할 셈입니까? 명분은?”

침착히 물어보았다. 엘테르트가 알기로 최근에 이에샤와 다툰 기사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모욕당하고 오는 길인가 걱정되었다. 이에샤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또박또박 뱉었다.

“제가 입궁한 이래 거듭해서 백화 기사단과 제 집안, 제 자신을 능멸해 온 제국 제3 기사단장에게 결투를 신청하려 합니다.”

“안 돼.”

루시온은 잘라 말했다. 겨울철 시험에서 이에샤에게 당한 기사가 3 기사단 소속이었다. 3 기사단장 글렘 모드리스가 앙심을 품고 이에샤를 들쑤신다는 보고는 받았다. 하나 글렘은 브링어였다. 이에샤가 천재라고 해도, 어린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한 합도 견디지 못하리라. 루시온은 승패가 뻔한 싸움에 이에샤를 밀어 넣을 수 없었다.

묘하기는 했다. ‘결투’라는 낱말을 듣자마자 들고일어났을 엘테르트가 조용했다. 3 기사단장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가 헛물을 켜겠다는데, 말릴 셈이 없어 보였다.

“이벨리오노 전하.”

“안 돼. 그 결투, 입회는 물론 허락조차 할 수 없다. 모드리스 경은 내가 타이를 테니 일단 진정하라고.”

“저는 지극히 이성적입니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브링을 내보이고 싶었다.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검을 빼 들 수는 없었다. 문밖에 근위 기사가 지키고 섰다. 황족 암살 미수죄라도 뒤집어쓰면 큰일이었다. 애가 탔다. 정원으로 나가자고 할까? 바쁘시지 않을까? 검 말고 다른 수로 브링을 증명할 수 있으려나?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앨저 경은 브링어이니 괜찮습니다, 전하.”

“……뭐?”

“그녀 또한 브링어라 했습니다. 다른 기사단장들과 마찬가지로.”

“에르디, 너 제정신이야?”

엘테르트는 픽 웃고 말았다. 지금처럼 루시온이 당황하는 일은 드물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샤에게 다가갔다. 이에샤는 흠칫 비켜서려다가 멈추었다. 루시온이 보는 앞에서 무슨 짓을 하지는 않을 터였다. 엘테르트는 복잡한 눈빛으로 이에샤를 내려다보았다. 안타깝고, 슬프고, 사랑스러웠다.

“그거 압니까? 앨저 경.”

“뭐, 를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앞으로 뻗었다. 이에샤의 왼 어깨에 손 끄트머리만 댔다. 시시한 접촉이었다. 만졌다기보다 찔렀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동안 내가, 당신을 건드릴 때마다, 얼마나…….”

이상스러웠다. 엘테르트의 말소리가 떨렸다. 손가락 또한. 이에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름다운 얼굴이 살며시―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찌푸려졌다. 낯빛이 바랬다. 홍차 색 눈동자에 괴로움이 깃들었다. 엘테르트는 무언가를 눌러 참는 듯싶었다.

“얼마나 무서운 걸 참고, 숨겨 왔는지. 황태자 전하, 보십시오. 이렇게 다가선 것만으로도 제 몸은 프리슬리 경을 기억하고 떨립니다. 증거가 더 필요하다면 밖으로 나가서 앨저 경의 브링을 친견하시지요.”

“에르디.”

“그녀의 청을 들어 주십시오. 저도 부탁하겠습니다.”

이에샤는 입술을 헤벌렸다. 몰랐다. 엘테르트가 이렇게까지 브링어를 두려워하는 줄은. 백화 기사단이 출범한 무렵에도―싫은 티는 냈지만―다가오기를 거리끼지는 않았다. 신년맞이 무도회에서 잡아끌었을 때도 겁먹었을까? 우산을 씌워 준 날은? 보육원에서 손을 맞잡은 것은 제 상태가 나빠 보였기에, 참고 한 행동이었는가.

옆쪽으로 옮아갔다. 엘테르트로부터 두어 발짝 떨어졌다.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루시온은 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처구니없었다. 저렇게 마음이 통하면서 함께하지는 못하겠다니. 바보들 아니야? 입맛이 쓰기는 했다. 엘테르트 때문에 쑥스러워하는 이에샤를, 귀엽게 여기는 자신도 바보같았다.

긴 숨을 내쉬었다. 궁금한 점이 있었다.

“에르디는 언제부터 알았어? 앨저 경이 브링어라는 거.”

“앨저 경이 불온의 장막에 빠진 날입니다.”

“……그게 언제였더라?”

“1월 중순에서 하순으로 넘어갈 때쯤이로군요.”

이에샤와 엘테르트는 화들짝했다. 루시온이 책상에 이마를 처박은 까닭이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전하! 걱정하는 소리를 들으며, 루시온은 배신감에 몸부림쳤다. 반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엘테르트는 이에샤와 비밀을 나눈 채 귀띔조차 해 주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믿는 사촌과 좋아하는 여자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결투, 허락 못 해.”

“예?”

“제길! 이제부터 앨저 경이 뭘 부탁하든 허락 안 해 줄 거다! 귀여워도 안 돼! 에르디 너도 마찬가지야!”

엘테르트는 눈만 멀뚱멀뚱했다. 심통 부리는 루시온은 퍽 하찮았다. 이에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상하게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앨저 경. 전하께서 허락하셨군요.”

“에르디!”

“감사합니다, 전하! 앞으로도 마음 바쳐 섬기겠습니다!”

이에샤는 눈치가 빨랐다. 잽싸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엘테르트와 야릇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루시온은 ‘저 부부 사기단!’  하고 떠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주변에서 '안티가 망하라고 써준 듯한 소개문'이라는 평을 받은 작품 소개를 바꿨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 오타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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