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6 8. 낮게 나는 독수리 =========================
사람으로 보지 말자니. 괄괄하고 편파적인 소리였다. 엘테르트 멘델린이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이에샤는―자기가 생각하기도 웃기지만―엘테르트가 사랑에 눈이 멀어, 되는대로 뱉는 것인가 했다. 엘테르트의 태도는 예사로웠다. “놀랐습니까?” 하고 물었을 따름이었다.
“여성이 남성에게 도움받으면 얕잡히리라 생각합니까? 내 도움이 앨저 경의 업에 누를 끼칠까 봐요?”
“사실이 그렇잖아요. 멘델린 경이 제 가까이 오면 올수록…….”
“사람과 사람이 돕고 사는 게 특별하고 바보스러운 일이라 한다면.”
또박또박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에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연모하는 남자였다. 이에샤는 엘테르트가 연모하는 여자였다. 엘테르트와 저를, 사람과 사람으로는 대치해 본 적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치들에게 아, 너희는 서로 도울 줄도 모르는구나. 나랑은 다른 종자들이구나. 쏘아붙여 버리십시오.”
“메, 멘델린 경. 혹시 아침에 뭐 잘못 드셨어요?”
평정심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낯선 눈길로 엘테르트를 보았다. 이에샤가 알기로 엘테르트는 “그런 이들은 무시하십시오.” 따위의 말을 할 사람이었다. 상대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인정받을 것이다. 다툼을 피하라. 이러한 충고야말로 멘델린 소공작다웠다.
“간단히 신선한 과일로 끼니를 때웠습니다만.”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농담입니다.”
이에샤도 우스개에 서툴렀지만, 엘테르트 또한 기막혔다. 덤덤한 낯으로 건네는 말은 허튼소리 같지가 않았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휘말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엘테르트가 빙그레했다.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하면 화를 내리라.
“예전의 나였다면 훨씬 온건하고 객관적인 얘기를 늘어놓았겠지요.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다든가. 노력하면 못 이룰 일이 없다든가. 하지만 앨저 경, 나도 이제 압니다. 저들―제국 기사들이 앨저 경을 동등하게 보지 않는다면 경도 똑같이 해 줄 수밖에 없다고요.”
“똑같이, 라고요?”
“너희는 나보다 열등하다고 깔아뭉개십시오. 그간의 모멸을 갚아 주십시오. 앨저 경의 마음을 돌보고 저들에게 교훈을 내리십시오. 경은 천재니까.”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멍한 얼굴을 했다. 가슴속에서 궁금증이 치밀었다. 엘테르트는 어떻게 저에게 필요한 말을 해 주는 걸까? 어째서 필요한 말을 해 주지? 총명하게 빛나는 눈이 이에샤를 담았다. 이에샤는 어지러워졌다. 울고 싶었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다.
엘테르트는 시시각각 바뀌는 낯빛을 보며 떠올렸다. 참으로 생기롭다고. 이에샤가 세간에 달려드는 모습이 덧없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지금은 달랐다. 멈추지 않는 백화 기사단장에게 경애심이 피어올랐다.
“내가, 멘델린의 후계자가 왜 ‘낮게 나는 독수리’라 불리는지 아십니까?”
“글, 쎄요. 잘……. 그것도 상식인가요?”
“하하!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유가 뭐냐면 말입니다, 공작위를 잇기 전에 자신을 겸허히 하고 제국과 황실에 헌신하는 자세를 배우라는 뜻에서 붙여진 별명이지요.”
까닭 한 번 그럴싸했다. 이에샤는 새삼스럽게 거리감을 느꼈다. 자신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찼다. 나라에 이바지할 여유 따위 없었다.
끝난 줄 알았던 엘테르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난 달리 생각합니다.”
“예?”
“나는 낮은 곳을 날면서, 낮은 곳을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이제부터는 멍청한 아집에 사로잡혀 약한 자의 슬픔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속 깊은 곳이 울컥거렸다. 엘테르트를 바라보았다. 상냥하고 정겨운 사람이었다. 눈이 부시도록 곧은. 엘테르트에게 사랑받기에 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만 생각해 왔다. 엘테르트 같은 이에게 사랑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보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뿌듯했다.
“앨저 경도 내 손길을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길을 막지도, 빼앗지도 않겠습니다. 다만 뒤에서 돕겠습니다.”
엘테르트는 숨을 들이마셨다. “후우!” 하고 내뽑았다. 말이 길어졌다. 목이 말랐다.
“내 연인이 될 수 없더라도, 당신은 내가 친애하고 존경하는 지기이니까.”
“제가 멘델린 경의 친우인가요? 정말로?”
“물론입니다. 오늘도 지켜보며 응원하겠습니다. 꼭 이기십시오.”
그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샤는 붙잡지 않았다.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만 들어 올렸다. 엘테르트가 까딱,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탁! 출입문이 닫혔다.
굳었던 입매가 달싹이기 시작했다.
“……어쩜 좋니…….”
입가를 움켰다. 피식피식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기쁨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와 몇 번이나 엇갈리고도, 이에샤를 ‘지기’라 일컬어 주었다. 줄곧 함께하겠다는 뜻이었다. 셈브리온과 같이.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는 열 번째에서 멎었다. 결투를 벌일 시각이었다. 나가 보아야 했다. 이에샤는 발딱 몸을 일으켰다.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흰 셔츠와 가죽 바지. 편하고, 이에샤와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느낌이 좋았다.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듯싶었다. 늘어지라 기지개했다. 양 뺨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마음을 다졌다.
‘이기러 가자.’
문고리를 쥐었다. 엘테르트의 체온이 남은 것만 같았다. 잡아당겨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섰다. 창밖으로 커다란 콜로세움이 보였다.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소철궁을 빠져나갔다. 바깥에서 담소하던 이들이 이에샤를 보고, 길을 비켜 주었다. 이에샤는 대연무장 어귀로 접어들었다. 통로는 어둑어둑했다. 앞쪽에서 하얀 빛이 들이쳤다.
투기장에 다다랐다. 이에샤가 나타나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이윽고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관람석은 들어차지는 않았으나, 상당한 사람이 모였다. 서서 구경하는 이도 많았다. 글렘 모드리스는 먼저 나온 모양이었다. 한쪽 입꼬리를 추어올렸다.
“굼뜨군, 여기사.”
“모드리스 경. 괜한 시비는 하지 말게. 그러잖아도 곧 싸울 상대 아닌가.”
“실례했소, 에버렛 경. 백화 기사단장은 경이 아끼는 여자였지.”
“모드리스 경, 제발.”
체사로가 이마를 짚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근위 기사단장이 심판을 보는 일 또한 이례적이었다. 체사로의 자원이었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제자이니, 브링어와 싸울 궁계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글렘은 대강대강 해 줄 남자가 아니었다. 도를 지나치면 끼어들어야 했다. 셈브리온 데힐은 체사로의 젊은 시절을 뒤덮은 그늘이었다. 동경해 마지않았다. 그 제자가 망가지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에샤는 관람석의 가운데, 다른 자리와 나누어진 부스를 쳐다보았다. 이오르와 루시온이 무언가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앞자리에는 작은 황녀와 황자가 쪼르르했다. 이에샤는 라제카의 표정까지 알 수 있었다. 라제카는 평소와 다르게 얼어붙은 채였다. 이에샤의 비밀을 모르니, 승패를 점치고 겁먹은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미안스러워졌다.
허리띠에서 검을 끌렀다. 오른손에 칼자루를 쥐었다. 편하게 늘어뜨렸다. 새카만 롱소드의 자태에 글렘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토록 좋은 검을 여기사 따위가 쥐다니. 개 발에 편자였다. 비웃음이 흘러넘쳤다. 명검을 든다고 검술사가 되는 줄 아는가.
체사로는 이를 악물었다. 시작해야만 했다. 이에샤가 장갑을 던졌다. 황태자가 허락했다. 황제까지 나섰다. 물러설 데가 없었다. 자신이 제때에 끼어들어, 이에샤를 구해 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쪽 팔을 높이 들었다. 글렘도 검을 뽑아 쥐었다. 이에샤를 노려보았다.
“시작하시오!”
체사로의 팔이 떨어져 내렸다. 이에샤는 망설이지 않았다. 검을 아래로 향했다. 가로로 크게 베었다. 보이지 않는 브링이 이에샤와 글렘 사이의 바닥을 갈랐다. 모래땅이 진흙탕이라도 되는 양, 흙이 튀어 올랐다. 먼지구름이 일었다. 글렘은 놀라 주춤했다.
이에샤의 검이 가슴으로 찌르고 들어왔다. 서둘러 겅중겅중 물러났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바닥을 노린 위협도 거슬렸고, 방금의 공격도 께름칙했다. 속도와 날카로움이 마치…….
시야에서 이에샤가 사라졌다. 이에샤는 몸을 깊게 수그렸다. 글렘에게 달려들었다. 턱을 향하여 검을 올려 쳤다. 글렘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검을 뻗어 막았다. 그그극! 철검끼리 부대끼는 소리가 울렸다. 아래로 누르는 힘이 위로 추어올리는 힘보다 강해 마땅했다. 그러나 글렘의 팔이 튕겨 나갔다. 이에샤는 브링을 쓰며 움직였다. 땅을 박찼다. 텅 빈 글렘의 앞몸을 세로로 베었다.
“여기사!”
“방심했다는 핑계를 대기엔 브링이란 놈이 참 거치적거리지?”
브링어이면서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쪽팔리지도 않느냐. 에두른 조롱이었다. 글렘은 긁힌 뺨을 부여잡았다. 눈 한 짝을 내어 줄 뻔했다. 침묵이 대연무장을 메웠다. 글렘과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체사로는 이에샤가 ‘무엇’인지 알았다. 경악스러웠다. 검은색 검신이 버르르 떨렸다. 새파란 빛이 피어올라, 송골송골 맺혔다. 삽시간에 칼날을 뒤덮었다. 찬연하게 빛나는 브링이 이에샤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이에샤는 검을 글렘에게 일자로 겨누었다. 높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장내에 올랐다.
“황실의 모든 기사단장은 브링어다. 옛날에도, 지금도!”
============================ 작품 후기 ============================
휴식이 필요해서 오늘 한 편 더 올립니다. 분량이 애매하네요...하지만 이에샤가 멋있는 부분에서 자르고 싶었습니다...내일 하루 푹 쉬고 모레에 다음편 들고 오겠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