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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98화 (98/164)

00098 9. 아이는 어른이 된다 =========================

“최근 사교계에서 앨저 경 얘기가 빠지는 날이 없더군요.”

네세라가 이에샤의 책상에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백화 기사단장 사무실이 휑해진 지 나흘째였다. 미엘라의 책상과 스란의 나무 의자가 빠졌다. 미엘라와 네세라에게는 개인 사무실이 주어졌다. 공용 휴게실도 마련했다. 스란은 휴게실로 되었다며 방을 사양했다. 네세라는 하녀 기숙사에서 보내온 탄원서들을 살펴보고, 중요도 순으로 정리하여 결재받으러 온 참이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페리튼 경, 사교 모임 안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

“요즘은 휴일마다 나가요. 기사단에 도움될 만한 화제는 드물지만 평판 듣는 재미도 쏠쏠하거든요. 그거 아시나요? 콘웰 가의 셋째 여식이 앨저 경 소문을 듣고 검술을 가르쳐 달라며 조른대요. 콘웰 경이 진땀을 뺀다네요.”

“그 영애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

“내년에 여덟 살이 돼요.”

한숨을 쉬었다. 솔깃했건만, 콘웰 영애를 동료로 맞을 무렵이라면 저는 삼십 대가 될 성했다. 9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다. 백화 기사단에 들어오겠다는 귀족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네 사람만으로 애써야 했다. 그래도 일이 두드러지게 줄었다. 거들먹거들먹하던 남자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여자가 검술을 배운다면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지만, 그 여자가 희대의 천재라면 얘기가 달라지잖아요. 기록상 최연소 브링어가 여자라니! 남자고 여자고 온 사교계가 들썩일 만하지 않겠어요? 정말 속이 다 시원하네.”

“으음. 사실 좀 얼떨떨해. 결투에서 한 번 이겼을 뿐인데 뭐가 많이 달라져서.”

네세라의 입꼬리가 늘어졌다. 남녀 사이의 간극을 파고들어 온 네세라는 꿰뚫을 수 있었다. 이에샤의 승리가 왜 관심을 끄는지. 글렘과의 결투는 기쁨뿐 아니라 씁쓸함도 남겼다.

“그동안 앨저 경이 해치워 온 남자들은 별 볼 일 없어서 그래요.”

“해치……, 뭐, 됐어. 근위 기사도 있었는데?”

“방심했다느니 속임수에 당했다느니 하는 변명이 먹힐 때였잖아요. 황실 공식 행사에서 브링어 대 브링어로 이긴 거랑 같나요? 남자가 깔아 준 판에서 이름 있고 권위 있는 남자를 꺾었으니 사람들이 앨저 경을 다시 본 거죠.”

“남자가 깔아 준 판? 페리튼 경, 설마 폐하랑 전하를 말하는 거야?”

네세라는 답하지 않았다. 후후 웃었을 따름이었다. 이에샤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네세라의 배짱은 이에샤조차 기가 질리게 했다.

“황후 마마나 공주님이 도와주셨더라도 일이 이렇게 잘 풀렸을까요. 모드리스 경과의 결투가 아니라 그냥 브링을 내보였어도 앨저 경이 인정받았을까요? 세상사 남자를 축으로 돌아가는 법이에요. 망할.”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이에샤는 네세라의 거친 말씨를 익숙히 흘려 넘겼다.

“앨저 경은 우리가 얼마나 불리한 위치에 내몰려 있는지 더 이해해야겠어요. 백화 기사단장이니까.”

이에샤의 펜이 마지막 서류에 서명했다. 네세라가 고개를 꾸벅했다. 이에샤도 손짓으로 인사를 돌려주었다. 네세라는 돌아서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에샤 앞에서는 깔깔거렸으나, 네세라의 속은 편하지 않았다. 제3 기사단장과 백화 기사단장의 결투로 남자가 움츠러든 것은 ‘브링어’ 이에샤 때문이었다. 대륙에 예순 명도 안 된다는 강자가 지켜보았으니까. 여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쉽고,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놈은 없으리라. 남동생의 손목을 걸고 장담할 수 있었다.

여성 자체가 안전해져야만 했다. 에브라힐은 넓었다. 이에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멍청한 짓을 벌일 남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네세라는 엄지손을 깨물었다. 어찌해야 할까. 애가 끓었다. 황궁 밖까지 백화 기사단의 영역을 넓히는 일은 아득해 보였다.

“……어라? 스란 경. 나간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들어오네요?”

“더워서.”

복도를 걸어오는 스란과 마주쳤다. 스란은 네세라에게 말을 놓게 되었다. 같은 기사여도 준귀족이 귀족에게 반말하기는 어려웠지만, 네세라 본인이 부추겼다. 미엘라와 같이 대해 달라고. 낯을 가리는 스란에게 다가가고자 한 행동이었다. 네세라는 평민 여자와도 허물없이 지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나 저는 스란에게 말을 낮추지 않았다. 스란이 평민이라면 괜찮았겠으나, 기사단 동료가 아닌가. 엄격한 눈초리에 둘러싸여 살아온 귀족 여자로서 부담감이 남았다. 대범한 네세라라도 어쩔 수 없었다.

“스란 경, 더위를 심하게 타나 봐요. 오늘 햇볕은 그렇게 뜨겁지도 않은데 땀 범벅이에요.”

“음…….”

“정 힘들면 찬물로 목욕이라도 하세요. 쓰러지면 큰일이잖아요? 그럼 전 일이 남아서 이만.”

목례를 보냈다. 스란을 지나쳤다. 네세라의 고개가 기웃했다. 검은색 눈동자가 칙칙하게 가라앉은 듯했으므로. 무더위 탓일까. 의아스러웠다. 곧 상념을 털어 버렸다. 스란에 관해서 알지도 못하는데, 이유를 헤아릴 수는 없었다. 괜한 생각에 매달리는 짓은 내키지 않았다.

스란은 윗몸을 틀었다. 네세라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바라보았다. 목욕을 권유받았으나, 오전 수련이 끝나고도 씻었다. 오후 수련 뒤에도 씻을 터였다. 땀만 닦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탈의실로 향했다―시더가 빨아 놓은 수건이 있었다.

더웠다. 더워도 지독하게 더웠다. 여름은 끔찍했다. 암무단장이 장기 휴가를 줄 만큼 스란은 이맘때에 약했다. 브로칸도 아니고, 중부와 멀지 않은 시어칸 출신이건만 그랬다. 닐보칸에 간다면 한시도 견디지 못하리라. 비척비척 걸었다. 처음 백화 기사로서 출근한 날 이에샤로부터 받은 물음이 떠올랐다. 혹시 벨체터에서 왔나? 피식 웃고 말았다. 외국 땅은 밟아 본 적도 없었다.

“후우!”

블라우스의 목둘레선을 집었다. 팔락팔락 흔들었다. 소리 내어 숨을 터뜨렸다. 더위가 날아가기라도 할 양.

같은 시각, 황궁에서 떨어진 주택가에도 쪄 죽어 가는 남자가 있었다.

“날씨 미친 거 아니야……?”

셈브리온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미지근해서 더위를 식혀 주지는 못했지만, 목마름이나마 가셨다. 땀이 쏟아졌다. 한여름 델페레타는―셈브리온에게―생지옥이었다. 해 저물 녘에 나가도 버거웠다. 이에샤를 거두어 먹이려면 장을 보아야 했다. 그러나 시장에서 쓰러져 이에샤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망상이 들었다.

벨체터는 추운 나라였다. 전국이 델페레타 북단보다 써늘했다. 산마다 만년빙이 얼었다. 얼음을 구하기는 쉬웠으나 얼음으로 할 일이 없었다. 피서법도 못 되었고 차가운 음식도 먹지 않았다. 끓여서 물을 만들 따름이었다. 그곳에서 스물여덟 해를 산 셈브리온에게 델페레타는 따뜻했다. 딱 불구덩이 속에 있는 것만큼 따뜻했다. 12년째 치르는 계절인데도 고난스러웠다.

돌이켜보면 7월부터 아고르의 소식이 끊겼다. 더워지기 전에 벨체터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열사병으로 비명횡사했거나. 어느 쪽이든 덥지는 않으리라. 셈브리온은 아고르가 부러워졌다.

‘벨체터는 요즘 어떠려나.’

델페레타는 따를 데가 없는 강대국이었다. 제국인은 외국인을 깔보았다. 다른 나라를 비렁뱅이 소굴쯤으로 여겼다. 제국인 대부분이 세계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벨체터가 쩍 갈라져서 싸우든, 레오웰이 식량 부족으로 도시끼리 전쟁을 벌이든, 쟐레의 천부장이 해적섬에 쳐들어가 피바람을 일으키든 제국은 평화로웠다. 대륙의 나머지 나라를 합쳐도 델페레타 땅덩어리만 못했다. 신문에 외국 이야기가 실릴 턱이 없었다.

‘내전은, 안 끝났겠지.’

한숨이 흘러넘쳤다. 기후 문제가 아니더라도 조국은 그리웠다. 나고 자란 땅에 대한 향수가 사무쳤다. 억지로 떠나왔기에 더더욱. 델페레타의 잿빛 머리카락 소녀에게 마음을 붙였지만, 미련은 끊어 낼 수 없었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양팔을 엇갈았다. 눈가를 감추었다. 볕이 드셌다. 집 안으로 들이치는 햇살조차 견디기 힘들었다.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았다. 서둘러 밤이 찾아왔으면 싶었다.

‘힐가의 무덤도 아무도 안 돌보겠지. 묘비는 남아 있으려나.’

힐가. 세상의 모든 빛 같았고, 불꽃 같았던 셈브리온의 양어머니. 헛웃음이 새었다. 자신은 여자 검술사와 인연인 모양이었다. 힐가가 죽지 않았다면, 두 해 안에 브링을 얻었으리라. 높은 경지에 다다르고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랬다면 최초의 여자 브링어도 이에샤가 아니었겠네.’

부질없었다. 힐가가 살았더라면 셈브리온도 벨체터를 떠나지 않았을 터였다. 이에샤를 만나지 못하는 삶이라니.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낡은 추억과 품 안의 현재를 견주면, 소중한 쪽은 정해졌다. 힐가에게는 미안했으나.

팔을 내렸다. 벨체터인 특유의 어두운 눈이 드러났다. 이에샤도 눈매가 매서웠지만, 셈브리온은 위압적일 정도였다. 익숙해진 미소를 낯에 걸었다. 청소를 거른 채였다. 퇴궐한 이에샤가 집 안 꼴을 보고 질색할지도 몰랐다. 몸을 일으켰다. 브링을 끌어 올렸다. 더위가―개미 눈물만큼―가셨다. 창고로 향했다. 청소 도구를 꺼내고자.

창고로 쓰는 방은 작고 어스레했다. 쪽창 하나가 덩그렇게 달렸다. 이에샤와 셈브리온은 짐이 많지 않았다. 창고도 휑뎅그렁했다. 빗자루, 자루걸레, 양동이, 사다리, 망치, 밧줄……. 자질구레한 물건만 널브러졌다. 달칵.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셈브리온이 들어섰다.

셈브리온의 머리통보다 높은 창문에서 빛이 스며들었다. 바닥에 푸른빛이 웅덩이처럼 괴었다. 떠다니는 먼지도 푸르게 물들었다.

“파란, 햇빛?”

멍하니 중얼거렸다.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빛이 색깔을 입은 게 아니었다. 푸른 기운이 창고 안을 메웠다.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벨체터의 아지트, 아고르의 연구실이 이러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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