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9 9. 아이는 어른이 된다 =========================
밤 아홉 시가 코앞이었다. 이에샤는 언제나와 같은 시각에 퇴궐했다.
제3 기사단장과의 결투가 한 달 전이었다. 바뀐 점이 많았다. 바뀌지 않은 점도 많았다. 제국 기사들은 이에샤에게 꼬리를 내렸지만, 스란은 찍어 누르려 들었다. 호기심 많은 귀공녀가 구경하러 오기도 했다. 그러나 검술이 남자의 공부라는 생각에는 변함없었다. 이에샤는 저를 여자보다 ‘이에샤 앨저’로 보았으면 했으나, ‘이에샤 앨저’가 별날 뿐 나머지 여자는 남자보다 못하다고 듣기는 싫었다. 복잡했다. 두 사람만이 이에샤의 가슴을 틔워 주었다. 셈브리온과 엘테르트. 셈브리온은 “이-샤는 내 생각보다 굉장하네. 너라면 여자라도 역사서에 이름을 남길지 몰라.” 하고 칭찬했다. 엘테르트는…….
역마차 정거장에 내려섰다. 후텁지근했다. 마차에서는 바람을 맞아 괜찮았다. 순식간에 땀이 흘렀다. 이마를 훔치며 걸었다. 집에 다다랐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별일이었다. 이때쯤이면 셈브리온이 등불을 켜고 기다릴 터인데. 이에샤는 놋 열쇠로 문을 땄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분위기가 묘했다. 셈브리온은 거실에 있었으나, 이에샤를 맞이해 주지 않았다. 소파에 붙박였을 따름이었다. 등허리를 꼿꼿하게 펴니 앉은키만도 이에샤와 비슷했다. 이에샤는 조심스럽게 소파로 다가갔다. 셈브리온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눈동자가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이 저를 향하면서도, 딴 곳을 보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세비, 당신 왜 그래?”
“이-샤.”
“응. 나 지금 들어왔어. 불도 안 켜고 있길래 자는 줄 알았잖아.”
셈브리온의 입꼬리가 추어올랐다. 흩어져 버릴 것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덜컥 불안이 치밀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셈브리온의 팔뚝을 쥐었다. 딱딱한 근육을 만지면서도, 안심되지 않았다. 눈앞의 셈브리온이 허깨비처럼 여겨졌다.
“세비.”
“어서 와. 오늘 너무 더워서 내가 기운이 안 나네.”
“세비. 세비.”
“피곤하지 않아? 궁에서 별일은 없었지?”
“세비!”
이에샤는 하염없이 불러 댔다. 스스로도 까닭을 몰랐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이에샤의 감은 잘 맞는 편이었다. 손끝이 서늘해졌다. 수련할 때 셈브리온에게서 풍기던 조바심이 기억났다.
“세비, 어디 가?”
“응? 무슨 소리야?”
“어디 가는 거 아니지?”
셈브리온은 이에샤를 물끄러미 보았다. 비로소 낯에 활기가 돌았다. 눈매가 구부러졌다. 난처한 웃음이 번졌다. 여느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에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스르르, 손을 떨어뜨렸다. 맞닿았던 살갗이 땀에 젖었다.
“내가 가긴 어딜 가냐. 너 시집보내려고 쏟은 세월이 얼만데 아깝게.”
“방금 당신 진짜 이상했단 말이야.”
“더위 타서 그래. 왜, 여름이면 나 반쯤 정신을 놓잖아.”
“그건 그렇지만…….”
“빈말이라도 부정 좀 해 봐라.”
예사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셈브리온은 이에샤에게 예뻐 죽겠다는 눈길을 보냈다.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방금은, 그래, 무더위 탓에 허튼 생각이 들었을 뿐이리라. 이에샤는 소파 빈자리에 앉았다. 셈브리온의 팔짱을 꼈다. 다부진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절대로 어디 가면 안 돼. 난 평생 당신이랑 살 거야.”
“좋아하는 남자도 생겼다면서 그럼 안 되지. 귀족일 거 아냐. 내가 알디온에서 한 번 쫓겨났던 거 잊었어?”
“당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도 필요 없어. 계속 나랑 같이 있어, 세비.”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런담.”
셈브리온은 싱겁게 중얼거렸다. 붙들리지 않은 쪽 손으로 이에샤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다 커서는 응석받이였다. 어리광을 너무 받아 주었는가 싶었다. 아기 새처럼 쫓아다니는 꼴이 삼삼하여 도리 없었다. 힐가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래, 곧 죽어도 이-샤 옆에 꼭 붙어 있을 테니까 빨리 소개나 시켜 줘. 나도 사위 얼굴은 봐야지.”
“뭐래.”
이에샤는 야멸차게 대꾸했다. 셈브리온은 낄낄거리며, 이에샤의 머리 위로 뺨을 얹었다.
* * *
이에샤에게도 사교 모임 초대장이 오고는 했다. 응한 적은 없었다. 공주의 시녀장―벨제아 백작 부인의 티 파티에는 나갔지만, 속사정이 있었다. 사교계와 이에샤는 동떨어졌다. 밀레나가 주름잡는 곳이라 하니 관심조차 생기지 않았다. 네세라의 말에도 눈만 끔뻑거렸다.
“이번 휴일에 저희 집에 놀러 오지 않을래요?”
“페리튼 자작저에? 파티라도 있어?”
네세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귀족 영애의 초대이니 사교계가 떠올랐으리라. 자신은 파티는커녕 다과회조차 열어 본 적이 없었다. 여동생이 친구를 부르기는 했지만, 페리튼의 이름으로 벌이는 모임은 자작이 쓰러진 이래 멈추었다.
휴게실에 모든 백화 기사가 모였다. 테이블에 시더가 만든 쿠키, 과일즙, 사람 머리통만 한 얼음덩이가 놓였다. 얼음은 엘테르트가 보내 준 것이었다. 가까이에서 부채를 부치면 더위가 가셨다. 스란이 의자를 바싹 가져다 댄 채였다.
“앨저 경만이 아니고 스란 경이랑 올센 경도. 동료끼리 휴일을 같이 보내면 좋잖아요? 남기사들은 모여서 노름도 벌이고 한다는데.”
“페리튼 경이 자꾸 남기사, 남기사 하니까 이제는 그냥 기사라는 낱말이 어색해.”
“그게 바로 제가 노린 점이죠. 아무튼, 다들 어때요? 우리 저택이 크지는 않지만 어머니가 살롱을 여시던 방이 있어요.”
네세라 외 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피올라의 독채와 시오의 연립에 사는 가난뱅이들로서, 응접실이 딸린 저택은 충분히 호화로웠다. 페리튼 자작저가 알디온보다 크지야 못할 터였다. 하지만 그 집에 이에샤의 자리는 없었다. 살롱이라니 낯설었다.
“저, 저 같은 게 페리튼 경의 집에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요? 무슨 일이든 시키신다면 할 수는 있겠지만…….”
“하녀 면접을 보러 오라는 게 아니잖냐. 나는 상관없어. 휴일엔 어차피 잠만 자니까.”
“스란 경은 잠 좀 줄여야 해요! 출근 안 한다고 집에 틀어박히지 말고, 나가서 햇빛도 좀 쬐셔요!”
“이 날씨에? 너 지금 죽으라는 소리를 돌려 한 거지?”
스란과 미엘라가 옥신각신했다. 네세라는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이기는 편 우리 편!” 하고 추렴을 들면서.
이에샤는 고민에 빠졌다. 내키지 않았다. 일요일은 셈브리온과 보낼 수 있는 날이었다. 숲에서 대련을 벌이고, 셈브리온이 만든 밥을 먹고, 함께 빈둥거렸다. 남에게 쓰기는 싫었다. 바빠서 안 되노라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술이 달라붙었다.
“네? 앨저 경은요? 와 주실 거죠?”
“나는.”
결투 날을 돌이켰다. 백화 기사들은 휴게실까지 찾아왔었다. 상태를 묻고, 초콜릿을 건넸다. 이겼을 때는 라제카 다음으로 갈채해 주었다. 제 퉁명스러운 태도에도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이에샤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알았어. 갈게.”
“어머! 좋아라. 저 꼭 해 보고 싶었거든요. 같은 일 하는 여자끼리 모여서 회포도 풀고, 남기사도 욕하고. 귀족 여자 중에는 일하는 사람이 드물잖아요?”
“남자 욕도 해야 해?”
“저희 집에 오면서 안 할 생각이셨어요?”
미엘라는 공감했다. 하녀 기숙사에 살 적에는 밤마다 모여서 수다를 떨어 댔다. 잡담이라도 즐거웠다. 기사가 되고, 꿈도 꾸지 못했던 대접을 받았다. 하나 옛날이 그립기도 했다. 시더와 어울리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스란은 말수가 적었다. 한집에 살면서도 대화가 드문드문했다. 네세라와는 날이 저물도록 떠들어도 되리라.
이에샤까지 낀다니! 이에샤와 사사로운 만남을 가지기는 처음이었다. 백화 기사단에 들어온 지도 반년이건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란도 놀란 눈치였다.
이에샤는 집게손가락으로 목덜미를 긁었다. 꺼내고 싶은 말이 있었다.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저기, 페리튼 경. 한 사람 더 데려가면 안 될까?”
“시더요? 마음대로 궁 밖에 나오지 못할 텐데요.”
“그거야 알지. 시더 말고,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남자이긴 한데.”
네세라는 고운 눈썹을 찡그렸다. 달갑지 않았다. 남자들은 네세라의 환심을 사려고 다가와, 여자를 깎아내리고는 했다. 남성은 여성보다 똑똑하고 용감하다. 여자는 툭하면 울어서 번거롭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안 된다……. 눈앞의 사람도 여자라는 사실을 잊는 멍청한 무리였다. 남자가 낀다면 즐거운 모임이 개판 날 게 뻔했다.
거절의 말을 꺼내려는 참이었다. 생각이 누군가에게 미쳤다.
“혹시, 멘델린 경?”
“…….”
“어머, 어머, 어머. 맞췄나요?”
“어, 그, 내가, 주말엔 검술 수련 말고 다른 일을 한 적이 없거든. 모처럼 시간을 쓰는 건데 겸사겸사 멘델린 경도 만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다들 아는 사이니까. 싫다면 괜찮아.”
네세라는 방긋이 웃었다. 엘테르트 멘델린은 보기 드문 남자였다. 남성을 헐뜯으면, 기껍게 제 얼굴에 침을 뱉는. 엘테르트의 동성―주로 제국 기사―을 향한 혐오감은 격렬했다. 이따금 네세라조차 앞지를 만큼.
“시간은 나신대요? 주말에도 일하시는 분이잖아요.”
“내가 말하면 시간 낸댔어…….”
‘귀여워 죽겠네.’
흐뭇흐뭇했다. 이에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뺨이 불그레했다. 제국 기사단장에게서 승리를 거둔 브링어로는 보이지 않았다. 멘델린 소공작과 백화 기사단장이라. 구경만으로도 재미있을 한 쌍이었다. 네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낮게 나는 독수리를 저택으로 초대할 수 있다면 오늘내일하시는 아버지랑 남동생한테 더없는 영광이겠죠. 어지간한 대귀족의 연회가 아니면 초대장도 받지 않기로 유명하거든요.”
“그, 그래? 그럴 사람으로 안 보이는데.”
“그만큼 앨저 경을 신경 쓴다는 뜻이에요.”
미엘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에샤가 멘델린 소공작과 엮였다가 곤욕을 치르지는 않을까 겁났다. 고향에 남은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남자는 제게 차지도, 기울지도 않는 사람으로 골라야만 한다고. 엘테르트는 지나치게 거물이었다. 정든 상관인 이에샤가 걱정스러웠다.
기실 네세라도 두 사람이 잘되리라 여기지는 않았다. 멘델린 공작 부부가 이에샤를 받아들일 턱이 없었다. 이에샤 자신도 남자에게 얽매이기 싫어했다. 그렇다면 가볍게 즐기고 헤어지는 길뿐이었다. 엘테르트는 친절하고, 말이 통하는데다, 얼굴은 최상품인 남자였다. 이에샤처럼 능력 있는 여자가 데리고 놀기에 알맞았다.
이에샤는 미엘라의 염려도, 네세라의 비관도 모르고―스란이 더위에 죽어 가는 줄도 모르는 채―엘테르트와 함께할 생각에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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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모임에 남친을 데려가겠노라 선언하는 눈새짓을 우리의 이에샤가 해냈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greydoll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