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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03화 (103/164)

00103 9. 아이는 어른이 된다 =========================

이에샤는 돌아오자마자 자기 방으로 향했다. 셈브리온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침대에 뛰어들었다. 삐걱삐걱 소리가 울렸다. ‘우리 관계 같네.’ 하고 떠올렸다. 몸을 틀어 똑바로 누웠다. 엘테르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었다. 엘테르트도 마찬가지 기분일까.

숱한 이야기가 오갔으나 머릿속에 남은 것은 없었다. 스란이 먹고살려고 해 본 일들에 관하여 늘어놓았다. 미엘라가 고향 풍경과 가족 관계를 설명했다. 네세라는 달신교와 함께한 봉사 활동을 줄줄 읊었다. 어렴풋하게 그랬지, 하는 기억만 났다. 내용은 깜깜했다.

똑똑.

이에샤의 방문을 두드릴 사람은 정해졌다. 이에샤는 답하지 않았다. 손으로 얼굴을 감추었다. 셈브리온이 문을 열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든 채였다.

“우유 데워 왔어.”

“안 마셔.”

“그러지 말고 따끈할 때 후루룩 마셔. 마음 다스리고 얘기 좀 하자.”

“오늘은 아무 말도 하기 싫어.”

“정말? 나하고도?”

이에샤는 대꾸를 삼켰다. 어떻게 셈브리온과 이야기하기 싫다고 말하겠는가? 온종일 보고 싶었는데. 화풀이했을 뿐이었다. 사실은 셈브리온의 허리를 끌어안고, 오늘 겪은 일들을 토해 냈으면 했다. 어리광이 절실했다. 재차 삐거덕 소리가 났다. 셈브리온이 이에샤의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사람들한테 맞춰 주느라 힘들었어?”

“……이젠 싫어. 세비처럼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지겨워. 지쳤어.”

“고생했네. 그래도 부하들이 그동안 잘해 줬으니까 나간 거잖아. 마음 몰라줘도 고마운 사람들이고, 우리 이-샤도 기특하고.”

“모르겠어. 몰라, 몰라. 너무 복잡해. 전부 다! 생각하기도 싫어.”

목소리가 달아올랐다. 한바탕 울게 할까 했다가, 그만두었다. 눈물로 도망칠 나이는 지났다. 문젯거리와 마주 보아야만 한다고 가르쳐야 했다. 늦었다. 제가 이에샤를 감싸고만 돌아, 이에샤의 시야가 비좁아졌다. 이제라도 바로잡기로 했다.

“나한테 다 말해 봐. 들어 줄게. 그리고 가르쳐 줄 수 있는 거라면 가르쳐 줄게. 스승님이니까.”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에샤는 얼굴에 손바닥을 얹은 채 손가락만 벌렸다. 짙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물기로 반들거리는 모양새가 안쓰러웠다.

“세비.”

“응.”

“세비, 세비. 세비.”

“그래그래.”

“나 이제 기운이 다 빠졌어. 힘이 안 나. 자신감이 하나도 안 생겨.”

셈브리온은 귀를 기울였다. 끝으로 갈수록 말소리가 격렬해졌다. 감정이 북받치는 듯했다. 우유가 담긴 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식더라도 상담을 끝내고 먹이는 편이 좋을 성싶었다.

“모르겠어. 나 그동안 여기저기 잘 맞춰 왔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봐. 남들이 나를 이상하게 봐. 내가 틀렸대. 나만 틀렸대.”

“왜 그렇게 됐는데?”

“그 사람한테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했더니 그래.”

입이 다물어졌다. 이에샤의 말은 파격적이었다. 남녀가 만나면서 결혼은 하지 않겠다니. 평민끼리의 연애는 흔했지만, 귀족의 연애란 삶을 함께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헤어지면 커다란 흠이 되었다. 용병인 셈브리온도 아는 사실을 이에샤가 모를 턱이 없었다. 자기는 괜찮으리라 여긴 듯했다. 엇나간 길을 밟아도 잘 풀릴 것이라고.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그렇잖아. 그 사람은 멘델린 공작이 될 거고,”

“뭐?”

“응?”

“아, 아냐. 계속해.”

셈브리온은 치밀어 오른 놀라움을 삼켰다. 멘델린이라니. 그 멘델린? 독수리를 문장으로 쓰는 공작 가문? 황가의 친척? 거기의 후계자? 얼이 나갈 것 같았다.

“그 사람 부모님은 공작 각하랑 공주님이야. 내 아버지는 오스터 알디온 개자식이고. 심지어 엄마는 이제 없어. 우리가 어떻게 결혼을 해?”

“그래도 이-샤. 저쪽이 자연스럽긴 하잖아.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겠지.”

“난 멘델린 부인은 되기 싫어! 앨저 백작이고 싶어. 소공작이 우리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오는 게 가당키나 해? 답은 뻔하잖아. 우리 결혼 못 해. 내가 하겠다고 해도 안 돼.”

“이-샤.”

“그냥 같이 있기만 하면 안 돼? 꼭 결혼을 해야만 해? 뭐가 그렇게 중요하고 단단한 약속이라고? 딴 여자 만나서 부인이랑 자식 버리는 새끼도 있잖아!”

한숨이 넘쳐흘렀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으나, 이에샤의 마음에는 ‘결혼’이나 ‘부부’ 따위에 대한 불신이 박혔다. 두 사람의 수준이 다르다는 말도 맞았다. 어린 시절의 상처도 한몫했을 터였다. 셈브리온은 먹먹해졌다. 딸 같은 아이가 다른 사람은 다 겪는 인생의 행사를 단념하겠다는데, 슬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샤. 네 마음 알아. 근데 말이야, 사람들은 젊은 남녀가 만나면 곧 결혼하겠구나 생각해. 그냥 그렇게 정해져 있어. 그러니까 멘델린 소공작은 이-샤한테 놀림당한 기분일 거야.”

“나, 그 사람이 나 싫다고 하기 전까지 먼저 헤어지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었어. 근데 곧 싫다고 할 거 같아.”

“이-샤 생각은 그렇지만, 저쪽에서는 이-샤가 언제든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으로 들었겠지.”

이에샤는 가까스로 알아차렸다. 엘테르트가 괴로운 얼굴로 떠나 버린 까닭을. 하나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에샤에게 결혼이란 부질없었다. 한다면 앨저의 대를 잇고자 사무적으로 치르는 형태뿐이었다. 엘테르트와 연인이 되기로 하며, 피붙이를 남기기는 포기했다. 그만큼 각오를 세우고 엘테르트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오해를 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까부라졌다.

“뭐가 이렇게 다 복잡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 단순하게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내가 뭘 어떡해야 하는데?”

“……지친 게 결혼 문제 때문만은 아니구나?”

“기사 시험에서도, 기사가 돼서 자리잡을 때도, 내 안 좋은 소문만 들은 여자 도와줄 때도, 브링어라고 밝히면서도 너무 힘들었어. 왜 이렇게 버겁지? 그런 생각 골백번도 더 했어. 그래도 포기 안 했잖아. 여기까지 왔잖아. 나 열심히 했잖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서러웠다. 서글펐다. 발버둥치고 발버둥쳐도 인정받을 수가 없었다. 밀레나가 손쉽게 얻는 ‘뭇사람의 사랑’을 저는 받지 못했다. 피로가 쌓여 갔다. 셈브리온 다음으로 마음을 연 상대에게마저 버림받을지도 몰랐다. 지긋지긋했다. 기사 작위도 내던지고 싶었다. 집에 틀어박혀, 셈브리온만 보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네가 열심히 한 거 난 아는데,”

이에샤는 코만 훌쩍거렸다.

“세상 사람 대부분이 너랑 똑같은 생각을 해. 난 열심히 했는데 남들은 몰라준다고. 그런 사람이 이해하려는 사람보다 훨씬 많아서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어.”

“세비는? 세비도 그래?”

“난 열심히 안 사니까 그런 생각 안 하지. 개판으로 사는데 개 같은 대접 말고 뭘 더 받겠어?”

푸훗!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입술을 비집었다. 서둘러 숨을 집어삼켰다. 딸꾹질이 나왔다. 울다가 웃음을 터뜨리다니 민망했다. 셈브리온은 빙그레했다. 이에샤의 얼굴에서 손을 벗겨 냈다.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어 주었다.

“정말 다 관두고 싶어?”

“…….”

“지금까지 해 온 게 아깝지?”

“……응.”

이에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린아이처럼 깜찍스러운 동작이었다. 셈브리온은 순간적으로 ‘내가 싸고돈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하고 합리화해 버렸다.

“내일 황궁에 나가면 소공작이랑 얘기해 봐. 기어이 너랑 결혼을 해야겠다 하면, 뭐 그만큼 이-샤한테 매달린다는 뜻이긴 한데, 서로 안 맞으니까 차 버려. 절대로 네가 차이면 안 돼. 기분 더러운 거 오래간다. 알지? 뭐든 선빵이 중요해.”

“아핫!”

이에샤는 참기를 그만두었다. 소리 내어 웃었다. 어깨를 들썩였다. 셈브리온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마음이 잔잔해졌다.

문득,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있잖아, 세비.”

“왜?”

“당신 나 시집보내는 게 꿈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이제 포기야?”

장난스레 물어보았다. 셈브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훌륭한 귀부인으로 키우겠다느니,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겠다느니 하기는 했다. 그는 이에샤를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아낀다는 뜻이었다. 이에샤의 삶을 쥐락펴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에샤는 백작위를 이었다. 기사―그것도 기사단장―가 되었다. 황실의 훈장도 받았다. 같은 브링어를 당당하게 이겼다. 이에샤에게는 길을 뚫어 나가는 힘이 있었다. 셈브리온은 지켜보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내 진짜 꿈은 이-샤가 행복해질 때까지 옆에 있는 거야.”

“행복해진 다음엔?”

“죽을 때까지 옆에 있는 거로 바뀌겠지.”

촉촉히 젖은 눈가가 움찔거렸다. 잔주름이 잡혔다. 웃음이 꽃처럼 피어났다. 이에샤의 낯을 보며 셈브리온도 웃었다.

누구도 모를 터였다. 이에샤 앨저가 얼마나 잘 웃는지. 집을 나서면 표정이 굳어 버렸으니까.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많은 이에게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 줬으면 했다.

제 품에만 잡아 두고 싶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아파할 일 없게, 다치지 않게,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도록. 어려운 일은 대신 해 주고 이에샤는 집고양이처럼 느긋하게 살면 안 될까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샤는 한군데에 얽매이기에는 눈부신 사람이었다. 끈기와 강단이 있었다. 머리도 돌아갔다. 검술에는 불세출의 천재였다. 얼굴도 예쁘장하지 않은가. 셈브리온은 이에샤를 독차지하기보다 온갖 곳에 자랑하고 싶었다.

힘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에샤는 힘내 왔다. 다른 응원을 해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너무 무리만 하지 마. 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제자님.”

“응. 고마워.”

“우유 다 마시고. 피곤할 테니 쉬어.”

“응.”

내려놓았던 머그잔을 집었다. 이에샤에게 건네주었다. 이에샤는 양손으로 컵의 몸뚱이를 쥐었다. 꼴깍꼴깍 우유를 들이마셨다. 셈브리온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오늘은 실력 발휘를 해야겠다 싶었다.

============================ 작품 후기 ============================

지난화 너무 대형 고구마 투척이라 안 되겠다 싶어서 다음편 써 왔습니다...내일 자정(이따 돌아오는 12시)은 쉬고 모레 자정에 엘에샤 대화편 들고 오겠습니다...

싸움은 빠르게 화해도 빠르게<-이런 모토로 쓰고 있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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