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4 9. 아이는 어른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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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죄송했습니다.”
부슬비가 내렸다. 석곡궁 결계에 부딪치는 빗방울도 자디잘았다. 습기 탓으로 불쾌했지만, 더위는 잦아들었다. 이에샤는 천에 기름을 먹인 비옷―총무부에서 받은―을 벗었다. 건물로 들어섰다.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기다리는 사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세라가 방 안을 서성거리다 반색했다. 동시에 근심스러운 듯도 했다. 어수선한 낯이었다.
“뭐가?”
“멘델린 경하고의 문제, 함부로 끼어들어서요. 제가 도를 넘었습니다.”
이에샤는 네세라를 멀거니 보았다. 네세라에게 사과받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네세라가 잘못했다는 상정을 못 했다. 곰곰 따져 보았다. 네세라가 왈가왈부해서 벌어진 일이기는 했다. 이에샤는 “괜찮아.” 하고 답하는 대신 물었다.
“왜 그런 소리를 했어? 아, 탓하는 거 아니야. 순수하게 궁금해. 페리튼 경이 신중하라고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셈브리온 덕분에 속을 다스릴 수 있었다. 모임에서 엘테르트가 가 버린 뒤,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했었다. 진정하고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발버둥친 것이 아까웠다. 이에샤는 믿었다. 엘테르트는 까닭도 없이 성낼 사람이 아니라고. 제가 엘테르트의 가슴을 후볐다면, 사과해야 했다. 사과하려면 자기 잘못을 꿰뚫어야만 했고.
네세라는 손깍지를 끼었다. 남에게 굽히고 자기 허물을 고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결혼은 생각보다 준비할 게 엄청나게 많고 복잡한 문제예요. 보통은 어머니가 이끌어 주는데, 앨저 경은 홀몸이시잖아요? 저도 비슷했어요.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제 알아서 해야 했죠. 그래서 놓친 점도 많았고, 지금껏 남은 앙금도 있답니다.”
“나도 그럴까 봐 염려한 거야?”
“네. 경이 충분히 생각해 보셨으면 했어요. 제가 결혼 준비를 하던 나이가 지금 앨저 경과 같으니까요. 주제넘지만, 멘델린 경한테 앨저 경을 재촉하지 말라고 상기시키려는 의도도 있었고. 하지만 전,”
네세라는 낱말을 고르고 골랐다. 사과하는 처지에 이유를 구구절절 갖다 붙이는 짓만큼 꼴불견도 없었다. 이에샤에게 책임을 돌리는 양 비치면 안 되었다. 말에 신경을 쏟았다.
“앨저 경이 당장 멘델린 경한테 빠져서 결혼을 서두르겠구나 생각했지, 아예 결혼할 맘 자체가 없으실 줄은 몰라서.”
“남녀가 만나면 혼삿말 오가는 게 당연하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샤는 묵묵했다. 네세라의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 자신은 늘 이단아였다. 세간이 밀레나가 올바르며 이에샤는 미쳤다고 여기듯이, 네세라 쪽이 상식적일 터였다. 엘테르트는 당연하게 저와 함께할 꿈에 부풀었으리라. 이에샤가 앨저의 핏줄을 포기하고 엘테르트를 받아들인 것과 같이, 엘테르트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쓸 각오로 이에샤에게 고백한 것이었다.
한숨이 흘러넘쳤다. 빠른 눈치와 주변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설명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면 아집에 빠질 수 있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모르면 나는 잘못하지 않았노라 우길 수 있었다. 이에샤는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었으나, 실수를 알고도 눈감을 만큼 약아빠지지는 못했다.
머리로는 알았다. 젊은 귀족끼리의 만남은 결혼으로 이어진다는 걸. 남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러한 사실들을 까먹고는 했다. 행동과 상식이 이어지지 않았다. 고치기가 어려웠다.
“됐어. 언젠가는 터질 문제였다고 생각해.”
“제가 때를 앞당긴 건 사실이잖아요. 용서는 앨저 경 몫이지만 죄송하다는 말은 드리고 싶었어요. 사실 그 자리에서 바로 사과했어야 했는데…….”
“스란 경이랑 올센 경도 다 있었는데 뭐. 괜히 나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아, 이미 망친 상태였나. 아무튼 됐어. 생각해 볼 테니까 경도 일에 지장 없을 만큼만 신경 써.”
네세라는 어렴풋이 웃었다. 이에샤다운 대답이었다. 냉큼 용서할 만큼 무르지는 않았으나, 사과하는 사람을 물고늘어지지도 않았다. 엘테르트와 닮았다. 엘테르트의 관용과 이에샤의 성정이 섞인 느낌이었다.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옛날의 이에샤는 꼬투리를 잡으며 싸움을 그치지 않는 면이 있었다. 엘테르트를 따라 하기 시작하며 달라졌다.
“그럼 이제 나도, 가 봐야겠네.”
“멘델린 경이라면 진득이 얘기 나눌 수 있으실 거예요. 그런 분이니까요.”
“페리튼 경이 남자 칭찬을 하니까 낯선데.”
“뭐, 그 정도로 말이 통하는 분이라면 명예 여성으로 대접해 주죠. 저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랍니다?”
픽 웃음이 터졌다. 네세라의 재치는 싫지 않았다. 긴장을 풀고 북돋워 주려는 뜻이 고마웠다. 엘테르트를 만나러 간다 생각하면 손끝이 차가워졌다. 하나 부딪쳐야만 했다. 마주 본 끝이 화해이든지 파국이든지.
비옷을 걸쳤다. 사무실을 나섰다. 네세라가 “조심히 다녀오세요.” 하고 배웅해 주었다. 이에샤는 진 땅을 밟았다. 찰박찰박. 걸을 때마다 조그마한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뺨과 귓가에 달라붙은 천을 통하여, 빗방울 떨어지는 느낌이 소름 끼치게 전해졌다. 갑갑했다. 후드를 벗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엘테르트가 걱정하지 않았는가. 빗줄기가 가늘어서 견딜 만했다.
빗길을 헤치며 고심했다. 자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지. 투둑투둑! 땅이 물을 받아 내는 소리가 집중에 도움되었다. 엘테르트를 잃기는 싫었다. ‘대단한 남자’의 부인으로 남기도 싫었다. 엘테르트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멘델린 공작이 후계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양자를 들이기도 불가능할 터였다.
‘모르겠다.’
젖은 입술에서 뜨거운 숨이 새었다. 바람과 현실이 팽팽했다. 남은 잣대는 하나뿐이었다. 엘테르트의 뜻.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결정을 받아들이겠노라 마음먹었다. 자신은 멋대로 굴 수 있을 만큼 굴었으니.
송악궁에 다다랐다. 비옷을 벗었다. 엘테르트가 호랑가시궁으로 떠나지 않았기를 빌며, 계단을 올랐다. 4층은 변함없었다. 고요했다. 다른 사람의 자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방을 메운 것은 엘테르트의 부드럽고 산뜻한 냄새뿐이었다. 복도 끝으로 나아갔다. 사무실 문 너머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샤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안쪽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문이 밀려 들어갔다. 엘테르트의 몸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엘테르트는 피곤해 보였다.
“……어떻게 저인 줄 알았어요?”
손수 맞아들이다니, 방문자가 누구인지 알았다는 티가 났다. 이에샤는 궁금증을 누르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아무도 올려 보내지 말라고 일러 뒀는데 찾아올 사람이라면 앨저 경뿐일 테니까요.”
“많이 바빠요? 미안해요, 몰랐어요.”
“아닙니다. 바쁜 게 아니라, 아니, 물론 바쁘기는 하지만. 경이랑 차 한 잔 마실 짬은 내도 되겠지요.”
엘테르트가 마른세수했다. 눈초리가 거무스름하게 부은 채였다. 밤잠을 이루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미안해졌다. 엘테르트가 물러섰다. 길을 터 주었다. 이에샤는 어정쩡한 걸음새로 사무실에 접어들었다.
차를 마시자고 했으나, 엘테르트는 티세트를 내오지 않았다. 이에샤도 찻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었다. 둘은 응접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엘테르트가 툭 중얼거렸다.
“젖지 않았군요.”
“예?”
“머리랑 얼굴. 젖지 않았군요. 후드를 제대로 쓰고 왔습니까?”
“아, 네. 오늘은 빗줄기가 얇아서 괜찮았어요.”
“다행입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에샤는 제 허벅지만 만지작거렸다. 애가 끓었다. 소리 내서 숨을 터뜨렸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지켜보기만 했다. 눈길이 따가웠다.
“미안해요.”
“뭐가 말입니까.”
“놀리거나 장난칠 생각 전혀 없었어요. 헤어질 준비 하고 만난 거 아니에요. 전 그냥 결혼하지 않더라도 둘이 같이 있으면 좋겠다, 남들이 수군거려도 우리만 좋으면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제 멘델린 경이 왜 먼저 가 버렸는지도 나중에 깨달았어요. 미안해요.”
이에샤가 입을 옥깨물었다. 악문 이가 아랫입술을 파고들었다. 엘테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엉덩이를 떼고, 윗몸을 내밀었다. 팔을 뻗었다. 섬세한 손가락이 이에샤의 입가를 쓸었다. 이에샤는 반사적으로 힘을 풀었다. 멍하니 엘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맞닿은 살갗이 타는 듯했다.
“상처 나게 그러지 마십시오.”
“아, 그, 그래요. 고마워요.”
“앨저 경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습니다. 경은 멘델린 소공작의 연인으로 불리기는 싫다고 분명히 말했고, 멘델린 공작 부인도 마찬가지일 테죠. 그 마음이 바뀌었다고 나 혼자 착각했을 뿐입니다.”
“그게, 아니, 당신이 맞으니까요. 제가 이상한 거고 멘델린 경이 정상…….”
말끝이 수그러졌다. 정상이 아니라고 자칭하기는 서글펐다. 참말로 제가 그릇된 인간인 듯했다. 그동안 해 온 모든 행동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고분고분하게, 검 따위 쥐지 말고, 알디온 부부가 시키는 대로 살다가 정해 주는 남자와 결혼했다면 달랐을까. 모두가 이에샤 앨저를 받아들여 주었을까.
“앨저 경?”
“미안해요. 네. 멘델린 경이 정상적인 생각을 한 거니까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엘테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샤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에샤의 진심은 곤란하리만큼 닿아 왔다. 화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바로잡아 주어야 했다. 자신이 속상한 까닭은 ‘결혼은 하지 않겠다.’ 하는 이에샤의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앨저 경이 뭐든 말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네? 뭘요?”
“그냥 뭐든지요. 혼자 생각하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매듭짓고. 그러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앨저 경이 내 마음을 받아 주면서 하지만 혼담을 주고받기는 싫다, 그렇게 말해 줬다면, 물론 아쉬웠겠지만 수긍했을 겁니다. 강요할 순 없는 문제니까.”
스스로가 얼마나 바보같았는지 몰랐다. 들고일어날 게 뻔한 애버토스와 엘로나 때문에 궁리를 쥐어짰다. 엎드려 빌 생각까지 해 보았다. 아버지와 절연한 이에샤가 주눅 들지 않을 결혼식은 어떤 모양새일까 상상했다. 이도저도 안 되면 푸른 사자 성에서 나오리라 다짐했다. 꼬락서니 한 번 우스웠다.
“나를, 사람을 왜 그렇게 비참하게 만듭니까.”
“아니,”
“당신이 좋습니다. 좋아하고 좋아해서, 부모님께 무슨 벌을 받더라도 곁에 붙잡아 두고 싶을 만큼 빠졌습니다. 당신이 날 받아 줬을 때 울고 싶기까지 했습니다. 근데 왜 당신은 나랑 아무것도 함께하지 않으려고 합니까?”
“멘델린 경, 아니에요. 전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요.”
“내가 무슨 생각까지 했는데.”
한 손바닥으로 눈가를 감싸 쥐었다. 이에샤는 흠칫 놀랐다. 엘테르트의 어깨가 떨렸으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을 돌아 엘테르트에게 다가갔다. 얼굴에서 손을 벗겨 냈다. 홍차 빛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방울져 떨어질락 말락, 흔들거렸다. 얼떨떨했다. 남자가 울먹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저 때문에 엘테르트가 울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앨저 경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공작성의 도개교를 올리지 않겠다고, 그렇게 말하며 청혼하고 싶었습니다. 원할 때 마음대로, 어디로든 갈 수 있도록. 그러니까 돌아올 장소만 내 곁으로 해 달라고. 그리 말하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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