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5 9. 아이는 어른이 된다 =========================
넋이 빠질 것 같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뺨은 붉게 달아올랐다. 엘테르트가 쏟아 놓는 말들은 적나라하고 축축했다. 귀가 간질거렸다. 위험했다. 눈물방울에 갇혀 일렁이는 눈동자가 예뻤다. 끌어안고 내가 다 잘못했노라, 달래 주고 싶으리만치 사랑스러웠다.
그동안 엘테르트가 어떠한 상상을 해 왔는지 헤아렸다. 그 속에서 저는 성숙한 여인이었다. 죽을 만큼 부끄러웠다. 이에샤는 그 정도로 질척하게 엘테르트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함께하면 좋고 손잡으면 즐겁고 웃어 주면 기뻤다. 그만큼이었다.
“저, 저는, 그게, 저기.”
떠듬떠듬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엘테르트의 팔목을 스르르 놓아주었다. 연무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모든 생각이 날아갈 때까지 허공을 베고, 베고, 베어야 했다. 마음을 다스릴 방법은 그뿐이었다. 도와줘, 세비! 속으로만 외쳤다.
“이, 일단 울지 말아요.”
“안 웁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으니까 노려보지 마세요. 일단 진정만 해 주세요, 멘델린 경.”
“난 극히 차분합니다. 운 적 없습니다. 앨저 경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고 사과하십니까?”
‘환장하겠네.’
지난날을 돌이켰다. 이에샤도 말꼬투리를 잡으며 엘테르트를 몰아붙인 적이 있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른스럽던 엘테르트가 토라지니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고아하고 아름다운 낯에 서린 울음기를 보면, 제가 죽을 죄를 지은 듯했다. 멘델린 공작이 “내 아들을 울리다니!” 하며 장갑을 던져도 맞아 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벽에 주먹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멘델린 경! 전 그러니까, 저는 경이랑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았어요.”
“……거짓말입니다.”
“진짜예요! 결혼까지 생각조차 못할 만큼 지금 멘델린 경이랑 만나기만 해도 좋았다고요. 물론 결혼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전 경이 생각하는 거보다 훨씬 당신을 좋아해요. 그동안 멘델린 경한테 제 얘기를 하지 않은 건…….”
이에샤는 고개를 비꼈다. 엘테르트의 모습이 눈에 해로웠다. 안 보는 편이 나았다. 불쑥 억울해졌다. 용서를 구할 각오는 했으나, 삐쳐서 톡톡대는 것을 달래게 될 줄은 몰랐다. 셈브리온처럼 아양 한 번 떨어서 풀릴 상대도 아니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의문도 들었다. 엘테르트라면 사과하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받아들여 주리라 믿었다. 차근차근 거리를 좁힐 수 있을 줄 알았다. 아직은 속을 까뒤집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엘테르트가 그만큼 상처받았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전 정말 몰랐어요. 애인한테 자기 얘기를 다 털어놔야 하는 줄은.”
“다 털어놓으라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 사이에 관한 문제는 말해 달라는 거죠. 연인끼리 당연한 일이잖습니까?”
“정말이에요. 어떡해요, 난 서로 좋아한다고 확인하고 만나기로 약속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사귀는 게 이렇게 복잡할 줄은 몰랐어요. 19년 살면서 남자는커녕 여자 친구 한 명 없었는데 그게 당연한 줄 어떻게 알아요!”
“왜 경이 화를 냅니까? 어제 무시당한 건 난, 데, 앨저 경?”
이에샤의 숨결이 엉클어졌다. 소리치고 나니 설움이 치밀었다. 이에샤는 사람과 사귀고 어울리며, 사회에 나와 일하는 것이 이다지도 세밀한 활동인 줄 몰랐다. 손에 검 한 자루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에샤가 ‘보통의 열아홉 살 여인’처럼 굴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에샤는 보통으로 살아오지 못했다. 제국 최초의 여자 기사. 기록상 하나뿐인 여자 브링어. 용병을 스승으로 섬기는 몰락 귀족! 무엇 하나 예사롭지 않았다. 세간의 눈총을 견디기만도 벅찼다.
“정말이에요. 친구도,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도, 동경한 사람도, 좋아한 사람도 다 당신이 처음이에요. 몰랐다는 말로 용서받을 순 없겠지만, 난 진짜 그런 거 전혀 몰랐어요. 못 배웠다고요.”
“앨저 경, 심호흡을 좀 하고.”
“세비가 가르쳐 준 건 검술밖에 없었단 말이에요.”
“예? 세비?”
이번에는 이에샤가 얼굴을 부여잡았다. 슬펐다. 이렇게 밑바닥까지 내보여야만 한다니. 한 번 터진 말보는 그칠 줄을 몰랐다.
“내 스승님 이름, 이름은 아니고 애칭이에요. 일곱 살에 만났고, 엄마가 죽고는 계속 둘이서 의지하고 살았어요. 지금도 피올라 거리에서 같이 살아요. 나한테는 하나뿐인 가족이고, 그리고, 그리고 또…….”
‘자기 이야기’를 꺼내 놓으려고 용썼다. 엘테르트는 흠칫했다. 보물단지처럼 감추기만 하던 스승을 입에 올리는 꼴이, 실성한 듯이 아슬아슬해 보였다. 이에샤는 컴컴한 미로를 헤매는 것 같다고 느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놓아야 할까?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스승은 벨체터에서 온 용병이라고? 스물다섯 살에 브링어가 된 고강한 검사라고도? 이실리아 황후를 해치려던 자객과 안다고도 알려야 하나?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엘테르트는 튕기듯이 일어났다. 이에샤의 낯빛이 허옇게 질렸다. 몸도 떨렸다. 자기 감정은 억누르고 이에샤부터 보듬어야 할 성싶었다.
“앨저 경. 이제 됐습니다. 됐으니까 그만하십시오.”
“모, 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하나도. 나는 정말로 결혼하기 싫어요. 싫습니다. 멘델린 경이 아니라 누구랑도. 내가 다른 집안 사람이 되면 우리 엄마랑 외할아버지가 물려주신 가문은 어떻게 되죠? 알디온이 망하게 했는데, 다시 세우지도 못하고 포기해야 합니까? 사람들이 정말 나를 브링어 백화 기사단장으로 기억해 줄까요? 멘델린 경 옆에 서는 여자가 아니라? 내가 이만큼 잃어버리는데 당신은 뭘 잃어버리나요? 공작 각하랑 레이디 엘로나와 절연이라도 해 주실 건가요?”
이에샤는 하염없이 늘어놓았다. 엘테르트가 저를 답답하고 무례한 연인이라 생각해도, 욕망의 대상으로 보아도, 존중해 주려고 애써도 뭐든 괜찮았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왜 모르냐고 다그친다면 참을 수 없었다. 무엇도 손에서 놓지 않겠다는 태도를 탐욕스럽게 여겨도 싫었다.
엘테르트에게는 잃을 것이 없었다. 이에샤에게는 잃을 것투성이였다. 손바닥 밑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국, 울음을 터뜨려 버린 쪽은 이에샤였다.
“나한텐 그게 당연해요. 당연한 거라고요. 결혼, 일, 꿈 다 너무 당연해서 말할 필요조차 못 느꼈어요. 나는 꿈꾸면 안 되나요? 남들이 이상하게 보니까?”
“…….”
“내가 그렇게 잘못됐어요? 독신으로 살겠다는 것도 기사로 성공하겠다는 것도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것도 다 잘못됐으면, 그만둘게요. 당신 좋아하는 거. 같이 있는 거. 그걸 포기할게요. 나한테는 다른 일들이 멘델린 경보다 중요해요.”
“앨저 경!”
엘테르트가 비명처럼 부르짖었다. 더는 들을 수 없었다. 따가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이에샤가 괴로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꼿꼿하던 어깨가 늘어졌다. 이에샤는 고개를 쳐들고 두 눈을 가린 채, 입술만 벙긋거렸다. 어떠한 표정을 짓는지 보이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어찌할 줄도 모르고 이에샤를 부둥켜안았다.
“아닙니다. 내가 심했습니다. 사과할 테니 이제 그만하십시오.”
“멘델린 경이 뭐가 나빠요? 다 내가 멍청해서 생긴 일인데.”
“왜 자꾸 그런 말을 합니까!”
답답했다. 이에샤 앨저는 당당하고 자신을 추켜세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번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면 멈추지 못했다. 이야기를 나누러 왔다가 이성을 잃고, 아픈 소리만 뱉어 대는 모습이 그러했다. 엘테르트는 안타까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앨저 경이 모를 수도 있다는 걸, 내가 몰랐습니다. 경의 말대로 나는 잃을 것도 없는데 투정을 부렸군요. 제발 그치십시오. 얼굴 좀 보여 주세요.”
“멘델린 경.”
“예. 예. 듣겠습니다.”
“전 정말 잘해 보려고 했어요. 근데 제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요.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지금쯤 근위 기사단에 들어가서 누구 애인 노릇할 일도 없이 돈이나 벌고 있었을 텐데.”
입술을 깨물었다. 기사단 입단 시험부터 백화 기사단장이 된 뒤까지 이에샤를 지켜보았다. 이에샤가 얼마나 치열하게 애썼는지 모를 턱이 없었다. 지금 이에샤는 스트레스로 터질 것 같은 상태였다. 결혼이다 장래다, 짐을 얹어 주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짓눌리리라.
“내가, 내가 기다리겠습니다. 앨저 경이 바라는 바 다 이룰 때까지.”
“그냥 다른 사람 좋아하면 편하잖아요.”
“지금은 앨저 경밖에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샤가 코를 훌쩍였다. 엘테르트의 품에 묻힌 얼굴에서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놓아주었다. 무릎을 구부렸다.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얼굴에서 손을 하나씩 떼어 내고,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질끈 감은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발긋한 눈꺼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에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엘테르트는 그만두지 않고 다른 쪽 눈꺼풀에도 입맞춰 주었다.
“지금까지 앨저 경이 얼마나 많은 여인을 구했는데요. 남자 기사였다면 하지 못했을 일을 잔뜩 해내셨습니다.”
“…….”
“앨저 경 말대로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힘겨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만 쉽시다. 서로 시간을 가지고, 앨저 경이 괜찮아지면 우리 다시 만납시다.”
“……가 보겠습니다.”
“아! 잠깐만요.”
문가에 지우산을 기대어 놓은 채였다. 집어 들어 이에샤에게 내밀었다. 이에샤는 낯익은 우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속에서 건네받은 물건이었다.
“가지고 가십시오. 사실은 지난번에 선물하고 싶었는데 도로 가져와 버려서 쭉 마음에 걸렸습니다.”
엘테르트가 손을 만지던 느낌이 지금도 뚜렷했다. 어째서일까? 설레지 않았다. 기쁘지도 않았다. 이에샤는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우산을 받아 들었다.
탁! 사무실 문이 닫혔다. 엘테르트는 소파에 무너지듯이 앉았다. 미치도록 피곤했다. 몸을 돌려 나가던 이에샤의 뒷모습이 망막에 새겨진 것 같았다.
셈브리온은 창고로 들어섰다. 푸른 기운이 이전보다 짙어졌다. 실소를 머금었다. 아고르는 영리했다. 이에샤가 창고를 들여다볼 염려가 없음을 꿰뚫어 보았다. 자질구레한 일은 셈브리온이 도맡았으므로.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을까? 피올라 거리에 벨체터와 이어진 통신 마법진이 설치된 줄을.
허공에서 어렴풋한 목소리가 울렸다.
“준―비는――됐――――이브――.”
“대강은.”
“언제―――출발―.”
“조금만 더 시간을 줘.”
끊어졌다 들렸다 하는 아고르의 말에 셈브리온은 무뚝뚝이 답했다. 제국어만 쓰고 살았다. 벨체터어가 입에 설었다. 아고르가 입 다물었다. 못마땅한 기색이 느껴졌다. 셈브리온은―보일 리도 없지만―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안 가겠다면 뭘 어쩔 건데. 제국에 남아서 그냥 죽는 게 국경 넘는 짓거리보다 힘들겠냐?”
“그――건―――.”
“날 불러들이고 싶다면 닥치고 기다려. 내 제자가 마지막 수업을 끝낼 때까지.”
이에샤의 얼굴을 떠올렸다. 보기만 해도 애틋한 제자. 소중하게 지켜 온 가족. 델페레타에 마음을 붙이도록 도와준 구명줄. 소녀에서 여인이 된 셈브리온의 아가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영원을 믿었다.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으리라고.
“누누이 얘기했지만 착각은 집어치워. 다시 용병질 하겠다고 돌아가는 게 아니니까.”
“――――힐가는――.”
“죽은 사람이지.”
셈브리온은 쌀쌀하게 대꾸했다. 힐가를 떠올리면 목구멍이 미어지는 듯했으나 그뿐이었다. 이에샤를 볼 때처럼 충족감이 들지는 않았다. 이에샤의 사고(思考)는 셈브리온을 축으로 돌아갔다. 마찬가지로, 셈브리온의 모든 행동은 이에샤를 위한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예약 등록한 글입니다.
엘에샤는 허구헌날 싸우면서 절대로 헤어지지는 않는 커플을 컨셉으로 잡고 있습니다(농담입니다)
뻘소리지만 친구가 제국 기사들을 델남충이라고 부를 때마다 웃겨 죽겠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오전 11시, 내용을 조금 가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