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112화 (112/164)

00112 10. 멈추지 않는 바퀴 =========================

(연참 3/3)

스란이 침음했다. 낭패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귀찮아 보인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이에샤는 허리띠에 덧댄 가죽끈을 잡아당겼다. 칼자루를 쥐었다. 스란이 혼혈은 아닐까 어림했었지만, 본인에게 들은 바는 없었다. 금방 한 말로 미루어 예상이 맞은 듯싶었다.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스란은 수련하면서 쓴 검을 나무통에 꽂았다. 큰 비밀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밝혀도 괜찮았다.

“있잖아, 스란 경이 다짜고짜 덤빈 날에…….”

“전에 제가 앨저 경을 기습한 뒤에…….

말머리가 겹쳤다. 이에샤는 주춤했다. 낌새를 살피다가, 앞질러 물어보았다.

“내가 혹시 벨체터인 아니냐고 물었었지?”

“짐작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전 제국인과 벨체터 난민 사이에서 태어났죠.”

“그래서 천한 출신이라고 했구나.”

정식으로 이주 절차를 밟은 외국인이라면 모를까, 피난민은 델페레타의 최하층 계급이었다. 이에샤는 스란의 고백을 듣고도 무덤덤했다. 난민에 대한 멸시는 보이지 않았다. 셈브리온이 그러한 처지였으니까. 앨저 백작가의 신원 보증이 아니었다면 셈브리온도 빈민굴을 떠돌았으리라.

에이릴리가 치른 품삯이라면 신분을 살 수도 있었다. 제국민이 되기를 포기하고 이에샤를 길렀으니,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삶을 쥐어흔든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울적해졌다.

“앨저 경은 벨체터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제 눈만 보고 벨체터를 연상하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아니, 거기 사람 한 명을 알 뿐이야. 가 본 적도 없고 별 관심도 없어.”

스란은 입을 다물었다. 길게 이야기할 거리도 아니었다. 이에샤도 흥미를 거두었다. 몸을 푸는 데에 골몰했다. 스란은 셔츠의 매듭을 풀었다. 구겨진 자락을 대충대충 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스란의 모습이 오솔길로 사라졌다.

이에샤는 검으로 가로선을 그으며 떠올렸다.

‘난민이랑 결혼하는 제국인도 다 있구나.’

그다음은 무아지경이었다. 언제나와 같았다. 검을 들면 이에샤의 시계는 흑백으로 바뀌었다. 칼끝을 스친 자리에만 색깔이 입혀졌다. 미치광이 같은 집중력 덕분에 이에샤는 백 번을 베어, 한 번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궤적을 그릴 수 있었다.

얼마나 수련에 묻혔을까. 종이 치기 시작했다. 느리고 깊게, 멀리 울리는 종소리가 열한 번 들렸다. 마지막으로 정오를 알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잔향이 완전히 사그라지는 순간, 이에샤의 검도 멈추었다. 일 초도 빠르거나 늦지 않았다. 이에샤는 검에 관해서만은 세상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었다. 셈브리온은 신이라도 들렸냐며 혀를 내두르고는 했다.

후우! 숨을 터뜨렸다. 온몸이 땀에 젖었다. 검을 허리띠로 되돌리자마자 상실감이 밀려왔다. 늘 이러했다. 아무리 검을 잡아도 질리지 않았고, 놓으면 어딘가가 허전했다.

흐트러진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빙그레 웃음 지었다.

“이제 나오시지요, 공주님.”

“흡.” 하고 놀라는 소리가 났다. 라제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돌담을 기어올랐다. 어린 공주는 드레스를 과하게 부풀리지 않았다. 활발한 움직임이 가능했다. 열여섯 살이 되면 치장을 어른스럽게 바꿀 터였다. 월장도 지금이나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처음 뵌 날처럼 공주님만이 아시는 길로 오셨, 공주님?”

“앨저 경…….”

“왜, 왜 울고 계시나요?”

이에샤는 당황했다. 라제카의 눈―엘테르트와 빼닮은―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스란이 떠난 뒤, 라제카가 수풀을 헤치고 오는 줄은 알았다. 장난을 칠 셈이겠거니 했다. 수련을 마칠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하나 라제카는 서러운 일이 있어 이에샤를 찾은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황후와 공주를 보살펴야만 했다. 직무를 방기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애, 앨저 경. 라, 라, 흑! 라제카 얘기 좀 들어 주세요.”

“이리 오세요, 공주님. 경청하겠습니다. 아! 안아 드릴까요?”

“정말요?”

“예. 그러니 울음부터 뚝 그칩시다. 코도 막히고 피부도 따갑잖아요.”

이에샤는 라제카가 부탁해도 머리를 쓰다듬거나 끌어안아 주지 않았다. 제국 기사들이 꼬투리를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켠 마당이었다. 책잡힐 짓은 하기 싫었다. 그렇다 해도 라제카는 귀여운 공주였고, 소중한 지기였다.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지켜보는 이도 없겠다, 무릎을 구부렸다. 흙과 풀씨로 지저분해진 라제카의 치맛자락을 털었다.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넣었다. 부둥켜안고 얼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앨저 경, 나 너무 억울해요. 서러워 죽겠어요.”

“어느 놈이 감히 델페레타의 공주님을 괴롭혔습니까? 제가 가서 반 죽여, 아니, 혼내 주겠습니다.”

“흑, 힝! 반 죽여도 돼요. 라제카가 허락할게요.”

라제카가 이에샤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무서운 소리를 재깔였다. 상냥하고 침착한 마음씨에 별일이었다.

“저, 공주님. 혹시나 해서 여쭙는 말입니다만, 벨제아 부인한테는 말씀하고 오셨겠죠?”

“알 게 뭐예요. 벨제아 부인도 싫어요. 해고예요.”

“으으음.”

말비다가―실직자가 될 위기에 처한 줄도 모르고―라제카를 찾는 중이리라. 까무러칠 기세로 “공주님!” 하고 부르짖을 모습이 훤했다. 이에샤는 진땀을 흘렸다. 아침에는 황태자가 사람을 부끄럽게 하더니, 점심에는 황녀가 문제였다. 저녁에는 황자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싱거운 상상이 들었다.

“있잖아요, 앨저 경.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아, 예!”

“돌아오는 무도회 때문에 어제 재무부와 총무부가 부딪쳤어요. 재무부에서는 돈을 줄 수 없다며 버티고, 총무부에서는 이 돈으로 뭘 하냐며 맞서고.”

이에샤는 라제카가 자신이 알아듣게끔 쉬운 낱말을 고르는 줄 알아차렸다. 흥분한 와중에도 빈틈없었다.

“재무부에서는 지난 신년맞이 무도회랑 영춘 사냥 대회를 수습하느라 마법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서 절약해야 한다고, 토너먼트가 무산되면서 여윳돈이 남지 않았느냐고 따졌어요. 총무부에서는 이번 무도회는 전에 없이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고, 남은 토너먼트 예산은 제국 기사와 담당 관리들의 위로금으로 배분한 지 오래라고 받아쳤고. 그 밖에도 백화 기사단 봉급의 상승과 앨저 경의 결투로 대연회장을 개방하면서 든 돈이…….”

“저, 공주님. 조금만 천천히 말씀해 주십시오.”

“간단히 할게요. 양쪽 모두 돈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인 상황이에요. 그 다툼을 듣고 라제카가 벨제아 부인을 시켜서 일렀어요. 상반기에 각국에서 들어온 공물 일부를 화폐로 바꿔 충당하라고. 공물은 신용 있는 대귀족에게 담보로 맡겼다가 내년 봄 행사에서 긁어모으는 돈으로 되찾으면 되고요.”

라제카는 어느덧 차분해졌다. 또박또박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에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빨라 놓친 구석도 있었지만,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황실이 담보물을 잡힌다면 위신은 떨어질지도 몰랐다. 하나 제국 귀족 사이에서 돌고 돌 돈이었다. 외국까지 퍼지지 않는 한 손해날 것은 없었다. 채권자를 대귀족으로 한정한다면, 황실과 귀족 사회 간의 유대감을 다졌을 뿐이라고 꾸며 낼 수도 있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은 봄 행사로 벌어들이는 돈을 쓰면 내후년까지 재정 문제가 이어진다는 거였어요.”

“아, 그렇군요. 예년보다 수익이 줄어드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돈을 허공에서 뚝딱 만들겠어요, 민중을 쥐어짜겠어요? 결국 절대액은 줄어들어야 하는데 머뭇거릴 까닭이 어디 있죠?”

“……듣고 보니 공주님 말씀이 옳은 것도 같고…….”

이에샤는 고민했다. 공주가 사람이라면 저는 똑똑한 원숭이쯤 되지 않을까. 사교계에 나서기도 전인 소녀에게 이리저리 맞장구만 치는 처지가 한심했다. 라제카가 미안스러운 목소리로 “알아듣기만 하면 됐죠, 뭐.” 하고 위로했다. 더욱 우울해졌다.

“라제카가 뭘 어쩌겠어요. 재무대신에 총무대신에 외무대신까지 내가 틀렸다는데. 그런데 금방 치른 어전회의에서 멘델린 경이 라제카랑 똑같은 의견을 냈대요.”

“설마?”

“통과예요, 통과! 만장일치로! 나한테는 틀렸다고 했으면서 멘델린 경은 맞대요! 내용은 똑같은데!”

“무슨 그딴 개 같은, 죄송합니다, 그런 불공평한 일이 다 있죠?”

“몰라요! 모르니까 억울해요! 내가 어린 계집이라서 무시하더라도 국정에서까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라제카는 이에샤의 등을 콩콩 두드렸다. 이에샤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으나, 자신의 승모근이 고운 손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했다. 라제카가 울먹거렸다. 설명하다 보니 서러워진 듯했다. “허엉!” 하고 목을 놓았다.

“베, 벨제아 부인은 황녀가, 내가, 그런 일에 끼어들어 봤자 명예에 누가 된다, 좋은 부마 못 얻는다, 헛똑똑이 같은 소리만 늘어놓고! 그런 말 더는 듣기 싫단 말이에요!”

“공주님, 이, 일단 진정하시고.”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멘델린 경도 그래요! 왜 그딴 의견을 내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급기야는 억지가 시작되었다. 엘테르트는 라제카의 말벗이었다. 선생이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빼더라도 사촌 오라비였다. 가족에 정이 깊은 라제카가 빈말이라도 엘테르트를 헐뜯다니. 예사롭지가 않았다. 이에샤는 쩔쩔맸다. 어른스럽던 아이가 떼를 쓰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때, 당차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앨저 경! 정오가 지났는데 아직도 수련 중이세요? 서류가 잔뜩 밀렸다고요!”

“페리튼 경!”

달가운 사람이 나타났다. 네세라에게는 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달래기도 잘할 듯싶었다. ‘나 좀 도와줘.’ 하는 눈짓을 보냈다. 네세라는 오도카니 섰다. 연무장의 꼴을 뜯어보았다. 엉망진창인 차림새로 통곡하는 공주. 안절부절못하는 기사. 네세라의 눈초리가 미묘해졌다.

“황제 폐하께서 공주님을 그렇게 아끼신다는데, 진노를 사지 않을까요?”

“내가 울린 거 아니야!”

이에샤는 라제카 못지않게 억울해졌다.

“자, 자. 진정되셨나요? 공주님.”

“……미안합니다. 두 분 경께 폐를 끼쳐 버렸어요.”

이에샤는 ‘저희가 아니라 벨제아 부인이 문제일 거 같은데요.’ 하고 생각했다.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네세라가 달래 놓은 라제카를 자극해서야 곤란했다.

네세라는 라제카가―눈물 콧물 뽑으며―늘어놓는 사정을 듣고, 인상을 팍삭 구겼다. 기세만으로 사람도 잡을 성싶었다. 이에샤는 시더가 내온 차만 홀짝거렸다. 이러한 일에는 자신이 없었다. 네세라가 뾰족한 수를 떠올려 주기만 바랐다.

네세라는 고개를 설레설레했다.

“답 없네요. 이건 그거예요, 그 유명한 남자들의 우정.”

“생뚱맞게 무슨 소리야?”

“저들이 한 번 틀리다고 치부한 방안을 왜 받아들였을까요? 자존심도 없이? 발의자가 멘델린 경이니까. 분명 혀가 닳도록 아부하고 뭐 떨어질 거 없나 희번덕거렸을걸요. 바르벨로샤 공주님은 자기네한테 줄 수 있는 게 없으시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렇잖아요.”

라제카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뺨과 뺨을 비비적댔다. 정겨운 장난질이었다. 라제카는 캥거루처럼 네세라의 품에 안겨 들었다. 네세라는 하얀 블라우스와 트라우저에 먼지가 묻어도 개의치 않았다.

“탈리오노 저하라면 모를까 우리 공주님은 남자 울타리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탈의실이랑 파티장만 오가면 되는 황녀를 어느 남자가 상전으로 받들겠어요? 미래의 멘델린 쪽이 백배 이득이죠.”

============================ 작품 후기 ============================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엘테르트와 라제카는 같은 날 같은 발상을 했을 뿐, 엘테르트가 라제카의 생각을 가로챈 게 아닙니다.

그동안 코멘트&쪽지로 받은 질문과 의견들 정리해서 답합니다

1. 엘테르트와 이에샤는 언제 연인이 되었나

<낮게 나는 독수리> 챕터 마지막, 이에샤가 엘테르트를 끌어안았을 때부터입니다.

2. 라제카는 왜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나

메인 스토리와는 상관없는 잡설정 때문입니다... 황녀가 자신을 이름으로 칭하는 건 사교계와 공석에 나설 나이(16살)까지로, 일종의 궁중어입니다. 엘로나도 어렸을 때 라제카와 비슷한 말씨를 썼습니다... 황자에게는 이러한 관례가 없습니다. 황제의 자식 중 딸에게만 강요되는 말씨로, 라제카 본인도 내색은 안 하지만 창피하게 생각합니다... 라제카가 이에샤에게 경어를 쓰고 란델은 반말을 쓰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3. 밀레나는 착하고 눈치 없는 캐릭터인가, 연기 잘하는 계산적인 캐릭터인가

이는 독자님들 마음대로 생각해 주세요.

선추코 감사합니다!

쁘띠마카롱 님, 지튼비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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