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3 10. 멈추지 않는 바퀴 =========================
(연참 1/2)
날카로운 말이 쏟아졌다. 라제카는 설움을 참고, 네세라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이에샤 또한 마찬가지였다. 네세라는 여성의 어려움에 훤했다. 이에샤가 업신여김당하는 까닭이 ‘검을 드는 여자’여서가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귀부인부터 하녀까지―황궁 여인이 백화 기사단에 상담을 청하면 도맡는 사람도 네세라였다. 이에샤는 네세라가 어떠한 답을 내놓을지 궁금했다.
“중요한 건 ‘무슨 말인가’가 아니라, ‘누가 말했나’예요. 여자의 목소리는 짓뭉개서 세상에 나올 수 없게 해야만 하거든요.”
“그게 뭐야. 어째서?”
이에샤의 물음에 답한 이는 라제카였다.
“금화 100개를 세상 사람의 반이 나눠 가지고 있어요. 그중 50개를 나머지 사람들에게 넘겨준다면 어떨까요? 앨저 경.”
“역시 우리 공주님. 하나를 말하면 열을 읊으시네요.”
“공주님과 페리튼 경의 말은 그러니까, 남자들이 영향력의 반을 잃어버린다는 건가요?”
“영향력보다 권력 쪽이 맞겠죠.”
네세라가 예뻐 죽겠다는 듯이 라제카를 부둥켰다. 라제카는 우중충한 낯빛을 띠었다. 라제카의 슬기는 천재로 알려진 엘테르트에게 뒤지지 않았다. 남녀 간의 불공평도 일곱 살 무렵에 깨쳤다. 하지만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화나고 억울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이에샤는 조심조심 운을 뗐다.
“멘델린 경은, 강자한테서는 빼앗고 약자한테는 얹어 줘야 한다고 하셨는데.”
“참, 드물게 좋은 신사분이죠. 하지만 남자 한 명이 세상사를 뒤집어엎을 수는 없답니다. 뭐, 멘델린 소공작이라면 일말의 도움은 되겠지만.”
네세라의 평가는 야멸찼다. 엘테르트의 연인으로서 움찔했지만, 네세라가 옳았다. 엘테르트나 루시온이 백화 기사단을 뒷받침해 주어 봐야 세간의 눈총은 여전했다. 단단하게 뭉친 집단은 개인의 권력으로는 아무리 강해도 부술 수 없었다.
네세라가 라제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담대하기 그지없었다. 이에샤는 새삼 놀랐다. 네세라뿐 아니라 스란과 미엘라도, 베빈이나 아리타도, 역경에 맞서는 여자들을 보면 제가 편하게 사는 듯이 느껴졌다. 의식주 걱정도 하지 않고 셈브리온에게 모든 일을 떠맡겨 왔으니. 이에샤만큼 치열하게 시류를 거스르는 여자도 드물건만, 자기 자신은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법이었다. 이에샤처럼 부정적인 생각에 먹히기 쉬운 사람이라면 더더욱.
“눈앞의 작은 문제부터 차근차근 치워야 해요. 목이 터지라 외치다 보면 언젠가는 뭐라도 되겠죠. 그 언젠가가 백 년 뒤일지 천 년 뒤일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페리튼 경은 여태껏 그런 생각으로 달신교 활동을 도운 거야?”
익숙한 이야기였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뜻을 떠올렸다. ‘후세를 위하여 지금 움직여야 한다’. 네세라처럼 참지 않고 여기저기 덤벼드는 사람이 같은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 목적을 달할 욕심은 없어요. 이상과 낭만은 다르니까요.”
“그렇구나. 페리튼 경은 대단하네.”
왜 엘테르트가 네세라와 죽이 맞는지 알 성싶었다. 둘은 닮았다. 평화와 조화를 이루고자 엘테르트가 싸움을 없애려 한다면, 네세라는 강자와 약자의 구분을 없애려고 했다. 이에샤는 두 사람에게 깊은 친애를 느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나아가는 사람은 사랑스럽기 마련이었다.
“전 앨저 경이야말로 굉장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나?”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선입관을 깨뜨리셨어요? 노력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틀리지 않은 말이죠.”
얼떨떨해졌다.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네세라가, 도리어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쑥스러움이 들었다. 일신의 안위를 찾아 뛰어다녔을 뿐인데 네세라는 이에샤를 칭찬했다. 라제카마저 동감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네세라가 라제카의 까만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헝클어진 곳을 손빗으로 빗어 주었다.
“공주님이 겪으신 일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지금 우리의 최선이라고는 백화 기사단을 열심히 꾸려 나가기. 그 정도랍니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너무 억울한걸요. 어떻게든 대신들에게 따지고 싶어요.”
“몸을 사리면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요. 공주님께서 빈민굴을 돌며 비쩍 곯은 여자들을 만질 각오가 서지 않으셨다면, 지금은 참으셔야 합니다.”
라제카는 입을 다물었다. 네세라는 우아하게도 에둘렀다. 싸우고 싶다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싸우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열네 살의 공주로서는 황녀의 지체도, 안락한 생활도, 주변에서 쏟아지는 사랑도 내던질 수 없었다. 네세라가 진창으로 뛰어든 나이도 열아홉 아니었던가.
“나는,”
“공주님!”
비명 같은 부름이 끼어들었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산발을 하고 드레스도 구겨진 말비다가 쳐들어왔다. 라제카는 놀라서 네세라의 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날씬한 네세라가 라제카를 가려 주기는 무리였다. 네세라는 쓴웃음을 흘렸다. 라제카를 떼어 놓았다. 말비다 쪽으로 등을 밀어 주었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아아! 다치신 곳은, 도대체 어떻게 그리 감쪽같이, 대체 무슨 수로, 도대체가 공주님은……!”
“부인.”
“또 저 여기사의 꼬드김에 넘어가신 겁니까. 그러니 제가 누누이 여기는 부정하다고!”
“벨제아 부인!”
라제카가 소리질렀다. 말비다는 주춤했다. 라제카의 태도에서 노여움이 배어났다. 지금처럼 단호하고 쌀쌀맞은 라제카는 처음 보았다. 라제카는 지긋지긋하다는 눈빛을 띠었다. 황후 대신 공주를 딸처럼 보살펴 온 시녀장은 충격받았다.
“돌아가요. 체통 없이 애꿎은 분들을 모멸하지 마시고요.”
“고, 공주님. 저는.”
“오늘은 부인의 잔소리, 듣기 싫어요. 라제카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만하고 가요.”
말비다는 입술을 악물었다. 망설이다가 “예.” 하고 대답했다. 라제카가 앞장섰다. 이에샤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에샤와 네세라는 약식으로 허리를 굽혔다. 공주님을 전송합니다. 입을 모아 인사했다.
고요가 찾아들었다. 폭풍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네세라가 이에샤를 돌아보았다. 이에샤는 가라앉은 낯빛을 지었다.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요? 앨저 경.”
“……말하면 페리튼 경, 화낼 거 같으니까 넘어가지.”
“어머? 그러시면 더 궁금하죠. 절대로 화내지 않을게요. 기사로서의 명예라도 걸까요?”
“됐네요.”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동안 야단맞은 일이 얼마인데, 네세라의 너스레가 얄미웠다. 네세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시선만 물끄러미 보냈다. 적갈색 눈동자에 뜻이 깊었다. 이에샤는 네세라의 압박에 약했다.
“알았어, 알았어. 말하면 되잖아.”
“진작 그러셨으면 얼마나 편해요. 그래서, 무슨 생각 하셨어요?”
“여자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죄라도 지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갖은 멸시를 당하면서도 여자로 태어나 다행이라니. 제가 뱉어 놓고도 웃겼다. 하지만 진심이었다―까닭은 집어 말할 수 없었으나. 네세라가 우스개나 놀림으로 받아들일까 봐 염려스러웠다.
네세라는 후후, 웃기만 했다.
“그야 우리가 남자였다면 멍청이 무리에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 그러네.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구나.”
“아무것도 모르고 속만 편한 머저리보다야 죽을 만큼 힘든 노력가 쪽이 사람답죠. 앨저 경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어려운 여자가 한 명이라도 살아나는 거예요.”
이에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편했으리라. 실지로 엘테르트에게 소리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움켜쥔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남을 깔아뭉갠다 상상하면, 가슴이 선득했다. 고달파도 여인을 지키겠다고 동분서주하는 백화 기사단장 쪽이 좋았다.
엘테르트가 떠올랐다. 권력자이면서, 권력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 이에샤처럼 별종이었다. 그러나 이에샤와 같은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타고난 울타리와 그늘이 있었으므로. 이에샤는 저도 힘을 기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슨 사건이라도 터져서 빵빵하게 공 세우고, 돈이랑 명예도 손에 들어오고, 온 세상에 내 이름 모르는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저런. 말이 씨가 되는 법이라잖아요.”
네세라는 가볍게 대꾸했다. 누구나 한 번쯤 꾸는 꿈이었으니. 그렇더라도 평화가 제일이었다.
눈꺼풀이 추어올랐다. 새파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밀레나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침실이었다. 내가 언제 여기로 왔더라. 언제 잠들었지? 윗몸을 일으켰다. 가운이 흘러내렸다. 한쪽 어깨와 빗장뼈가 드러났다. 여느 때의 밀레나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어둠 속에서 살결이 희게 빛났다.
가운 소매를 끌어 올렸다. 매무시를 바로잡았다.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속 하녀가 등잔을 들고 들어왔다. 불그림자가 일렁거렸다. 하녀는 “커튼을 열겠습니다, 아가씨.” 하며 창가로 향했다. 두꺼운 커튼을 양쪽으로 걷었다. 빛살이 들이쳤다. 한낮이었다. 밀레나는 연분홍색 캐노피가 늘어진 침대에 오도카니 앉았다.
“밀레나 아가씨?”
“……지금, 몇 시야?”
“오후 두 시쯤 되었어요. 오수를 즐기지 않으시던 분이 오늘은 아주 푹 주무시던걸요? 어제 파티가 피곤하셨나요?”
“피곤해?”
말꼬리를 물었다. 머리가 땅겼다. ‘삐이’하는 이명마저 들렸다. 별일이었다. 어제의 파티는 선 채로 술잔이나 기울이며 담소하는 모임이었다. 춤도 추지 않았다. 참가자 수십 명을 상대하기는 했지만, 어디서나 겪는 일이었다. 고단할 까닭이 없었다.
“이상하구나. 샴페인 두 잔밖에 안 마셨는데.”
“아가씨는 워낙에 주량이 적으시잖아요. 파티의 열기에 취하셨을지도 모르죠.”
밀레나 알디온이 분위기에 휩쓸렸다?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가느다란 신경줄로는 사교계 꼭대기에 올라앉을 수 없었다. 요즈음은 몸 상태도 좋았다.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춤춰도 지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잠이 쏟아지다니 이상했다. 달거리를 할 때가 되었는지도 몰랐다. 귀족 영애라면 몸무게를 줄이느라 주기가 불규칙하게 마련이었으니까.
“씨시, 가서 월경대를 좀 챙겨 오렴. 천 말고 탈지면으로.”
“어머! 아가씨, 시작하셨나요?”
“곧 시작하지 싶구나. 오늘은 몸이 영 좋지 않으니 손님은 모두 거절해 줘. 그리고 차 한 잔, 꿀이랑 우유 넣어서…….”
이마를 부여잡았다. 통성이 새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하녀가 놀라서 달려왔다. 감히 밀레나를 붙들 수는 없어서 “아가씨! 아가씨!” 하고 부르기만 했다. 밀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신경을 기울였다.
드르르…… 드르르…… 드르륵.
어라, 여기가 아니네.
무언가가 느릿하게 굴러가는 듯했다. 한참 만에야 소리가 멎었다. 알 수 없는 속삭임이 이어졌다. 밀레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신물이 올라왔다. 헛구역질이 났다.
하녀는 발만 굴렀다. 설렁줄을 세차게 잡아당겼다. 아가씨가 이상했다. 캑캑대는 모습이 소름 끼쳤다. 십 분쯤 지났다. 복도를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집사가 하녀 둘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 밀레나 아가씨?!”
“어떡해요, 총집사님. 아가씨가 편찮으신가 봐요. 어쩐지 안 주무시던 낮잠을 주무시더라니!”
“우선 가서 주인님이랑 마님을 모셔 와라. 한 명은 의사를 부르고!”
밀레나는 베갯잇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몸부림치는 모양새마저 시들어 떨어진 꽃송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