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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14화 (114/164)

00114 10. 멈추지 않는 바퀴 =========================

(연참 2/2)

밀레나는 뭇사람을 기쁘게 할 줄 알았다. 방긋방긋 웃어 주면 되었다. 추저분한 말을 하더라도 맞장구쳐 주면 되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함께 벌받는 척해 주면 되었다. 누구나가 어여쁘고 상냥한 밀레나에게 빠져들었다. 요령을 익히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열네 살 무렵에는 알디온 저택의 모두가 밀레나를 사랑했다―이복 언니와 용병 사내를 빼고. 그러한 방방법은 사교계에서도 통했다. 밀레나를 시샘하는 소녀들도 있었으나, 괜찮았다. 끈질기게 웃다 보면 어느덧 추종자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익숙해지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다. 젊은 남자.

남자는 밀레나에게 까다로운 일을 바랐다. 만인의 사랑을 받으면서 저 하나만 사랑해 달라든가, 순진한 낯으로 음담을 받아 달라든가, 멋대로 선물을 안겨 준 다음 대가를 치르라든가. 밀레나가 빚이라도 진 양 굴었다.

밀레나는 철들 적부터 남자의 기쁨이 되는 법을 배웠다. 뒷날에 남편을 섬겨야 했으므로. 그러나 남자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몇 겹으로 포장하는 여자 쪽이 차라리 편했다. 남자들은 자신뿐 아니라 밀레나도 즐거운 대화를 할 줄 몰랐다. 밀레나의 기쁨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았다.

밀레나는 탓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를 섬기고 받들어야 했다. 정해진 세상의 이치였다. 누가 정했는지는 몰랐다. 철석같이 믿을 따름이었다. 가장 훌륭한 남자를 기쁘게 해,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하나뿐인 삶의 목표였다.

“울화가 많이 쌓이신 거 같습니다. 몸에는 별 이상이 없으니, 마음의 병이겠지요.”

“마음의 병이라니! 우리 밀레가 왜 그런단 말인가? 뭣 하나 부족함 없이 키웠는데.”

“맞아요. 얼마 전에도 묵직한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선물로 들어왔다고요. 경매에서 3억 골드까지 올라갔던 물건이에요. 요즘 밀레는 제국에서 가장 행복한 귀공녀일 거라고요.”

의사는 곤혹했다. 알디온 후작 부인은 딸의 병세를 걱정하기보다, 위세를 자랑하고 싶어 했다. 후작은 딸에게 사랑을 쏟아 온 스스로가 흐뭇한 모양이었다.

밀레나는 파리하게 질린 채 몸져누웠다. 가슴이 느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의사가 눈꺼풀을 까뒤집고 혓바닥을 빼 보는데도 아랑곳없었다. 부모의 호들갑도 귀찮기만 했다. 머리가 아팠다. 이러다 죽겠다, 아니,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와중에도 한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이러면 안 돼. 모레가 멘델린 부인의 티 파티잖아. 정신 차려야 해.’

엘로나가 여는 모임은 며느릿감을 찾는 자리였다.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처녀로서 참석해야만 했다. 밀레나는 이를 악물었다. 두통으로 머릿골이 터져 버리더라도, 자신은 치장하고 파티에 나갈 것이었다. 엘테르트의 곁만 얻는다면 더한 아픔도 참을 수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엘테르트 님 옆자리에 서기로 했잖아.’

엘테르트 멘델린은 특별한 남자였다. 권세와 명성이 드높기도 했지만, 밀레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했다. 연인이 있는―결혼한 남자조차 밀레나에게 교태를 기대했다. 엘테르트만이 한 점 티 없는 눈빛으로 밀레나를 보았다. 밀레나가 용쓰지 않아도 우아한 대화가 이어졌다.

놓칠 수 없었다. 어느 멍청하고 끔찍한 남자와 일생을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생각 합니까?”

이에샤가 엘테르트를 보았다. 창밖을 건너다보던 차였다. 오늘 하늘에는 구름이 적었다. 초승달보다 가는, 실금 같은 달이 떴다. 달신력(음력)으로 초하루였다. 해신의 11월은 끝나 가는데 달신은 시작이었다. 그림자에 먹힌 삭월이 애연스러웠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을 생각했다.

일하는 모습을 구경해도 되느냐고 묻자, 엘테르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곁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그러한 밤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였던 서류가 반대쪽으로 옮겨 갔다. 원래의 자리는 비었다. 이에샤가 달구경을 하는 사이 엘테르트는 일을 끝내 버렸다. 이에샤는 눈을 깜빡거렸다. 저도 모르게, 눈앞의 사람이 셈브리온이 아님에 아쉬워하고 말았다. 고치려고 해도 셈브리온을 향한 갈망 같은 애정은 떨치기 어려웠다.

엘테르트가 부드럽게 웃었다.

“다른 사람 생각을 했군요.”

“어떻게 알았어요?”

“날 보고 놀라지 않았습니까. 계속 옆에 있었는데 놀랄 까닭이 그 밖에 뭐 있을까요.”

이에샤는 머쓱해졌다. 작은 티만으로 내심을 꿰뚫는 엘테르트가 신기했다. 자신은 눈이 빠지도록 들여다보아도 사람 속을 알 수 없었다. 지금도 엘테르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몰랐다. 연인을 앞에 두고 먼눈을 팔았다는데 섭섭해하지도 않다니.

“일은 끝난 거예요?”

“대강은. 오늘 꼭 봐야만 하는 건들은 다 봤습니다.”

“당신 보면 내가 하는 건 일이 아니라 일하는 시늉 같아요.”

“그럴 리가요.”

엘테르트가 손을 뻗었다. 이에샤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윗몸을 내밀었다. 얼굴과 얼굴을 가까이 했다.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구나 필요한 만큼만 하면 되는 겁니다. 자신의 노력을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멘델린 경.”

“예.”

“너무 가까워요. 물러나 주세요.”

이에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피식 웃고 몸을 되돌렸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이에샤의 반응은 지나치게 침착했다. 부끄러움을 억누르려는 속셈이 훤했다. 이에샤는 숨을 돌렸다. 엘테르트의 낯은 위험했다. 당대 최고의 미인이라는 어머니를 빼닮아서인지, 마음먹고 눈웃음을 치면 애간장이 녹았다. 누가 여인이고 누가 사내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앨저 경이랑 늦게까지 있으니까 좋아서 그랬습니다. 오늘은 무슨 일로 퇴궐하지 않는 겁니까? 함께 사는 분이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싸웠습니까?”

‘싸우기는 했지.’

브링이 맞부딪치는 싸움을 벌였었다. 엘테르트가 보았다면 까무러쳤을지도 몰랐다. 이에샤는 실소를 머금었다. 엘테르트는 브링어가 무섭다면서, 이에샤에게 잘도 닿아 왔다. 단정한 얼굴 뒤에 ‘만지고 싶다.’ 하는 욕망이 도사린다고 생각하면 묘했다.

자신의 어디가 좋은 걸까. 아리송했다. 검 솜씨에 반했을 리는 없었다. 얼굴은 거울을 보는 편이 나을 터였다. 툭하면 화내고 짜증 부렸다. 멋대로 중요한 일을 결정지었다. 고심했지만 엘테르트가 저를 좋아할 까닭은 찾지 못했다.

“차라리 싸운 거라면 좋을 텐데.”

“예?”

“스승님의 속을 알 수가 없어요.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예요. 틀린 지도를 들고 헤매는 기분.”

엘테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이에샤의 말속을 헤아려 보았다. 아침에 루시온이 건넨 인사말―“너무 우울해하지 말라고.”―을 돌이켰다. 어려움이 있는 듯한데, 이에샤는 털어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캐묻기도 무엇했다. 이에샤가 싫어할 만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지금 가장 궁금한 건 뭡니까?”

“가장 궁금한 거?”

“그리고 당신 연인이 정답을 알 만한 것.”

그러한 의문점이라면 정해졌다. 이에샤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멘델린 경이 저를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요?”

“…….”

엘테르트가 책상에 구르는 펜을 집었다. 뱅글, 손가락으로 돌렸다. 생각에 잠긴 모양새였다. 펜이 다섯 번째로 돌아갔다. 이에샤는 지루해졌다.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됐어요. 서로 좋아하면 된 거지.” 하고 중얼거렸다.

엘테르트는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이에샤의 모든 장점과 단점이 사랑스러웠다. 이유를 뽑아내기가 어려웠다. 반한 계기도 흐릿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에샤 앨저라는 여인이 머릿속을 채웠다. 궁금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휴일에 하는 일, 알디온 저택을 나와서 불편하지는 않은지, 지금 무엇을 하는지.

하지만 이에샤를 경애하는 이유라면 댈 수 있었다.

“난 원래 강자보다 약자와 어울리기를 좋아합니다.”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투쟁하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이에샤가 백화 기사단장으로서 자리 잡아 가는 과정은 엘테르트에게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루시온이 이에샤의 재주를 아낀다면,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삶에 갈채했다.

“낮에 공주님 때문에 소란이 있었다지요.”

“아, 으음. 좀 그런 일이 있었어요.”

“걱정할 거 없습니다. 어떤 곡절인지 다 들었으니까. 공주님께 상처 될 일을 하고 말았군요.”

“그게 뭐 멘델린 경 잘못이겠나요.”

이에샤는 못마땅하게 대꾸했다. 엘테르트는 회의에서 의견을 내놓았을 따름이었다. 라제카를 괴롭힌 자들은 총무대신과 재무대신이었다. 이에샤는 콧수염을 쓸며 여기사단이 에브라힐에서 하는 일이 있기는 하냐고 지껄이던 총무대신을 기억했다. 보고서를 수십 장이나 올렸는데도.

“내 잘못. 있지요.”

“네?”

“내가 아버님의 이름을 빌려 대신들을 불러 놓고 왜 황녀의 의견을 묵살했느냐 캐묻는 꼴을 상상해 보십시오. 대부분 사사롭고 좀스럽다 하지 않겠습니까? 공식적으로 라제카 공주님께 사죄하도록 종용할 구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들어 넘겼습니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주와 대신들 사이에 벌어진 다툼에 제삼자인 엘테르트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엘테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득실을 따져서 부당한 일에 나서지 못한 것. 그게 내 잘못입니다.”

“조, 좀 불합리하지 않아요? 멘델린 경이 공주님을 무시한 적도 없는데.”

“앨저 경. 지난 겨울 대연무장에서 경이 부정을 저질렀다고 몰렸을 때, 질책하는 이뿐 아니라 나머지 구경꾼들도 원망하진 않았습니까?”

이에샤는 “아.” 하고 침음했다. 엘테르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그날 연무장에 있던 모든 수험자와 제국 기사를 저주했다. 홀로 수십 명과 맞서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에샤를 편들어 준 사람은 엘테르트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좌절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는 라제카 공주님이 안쓰럽고, 사랑스럽고. 같은 이유로 앨저 경한테 경의와 애정을 느끼는 겁니다.”

“그,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라니까요.”

“후후! 나보다 훨씬 대단합니다. 차라리 멘델린의 후계자가 아니었다면 모든 걸 버리고 소리질렀을 텐데.”

엘테르트의 어깨에는 ‘멘델린’이라는 짐이 놓였다. 멘델린 공작가는 엘테르트가 이어받아야만 했다. 형제도 고종도 없었으므로. 멘델린이 우선해야 할 것은 델피르 황가였다. 민중을 보살피는 까닭도 황실의 안녕을 위해서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누군가가 괴로워하더라도, 황실에 누가 될 성싶으면 나서지 못했다. 당장 황실에 중요한 사람은 어린 공주가 아니라 고위 관료들이었다.

“사실은 앨저 경처럼 나도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 요즘은 더더욱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맡은 일이나마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멘델린 경이 보기에 저는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인가요?”

“예.”

“그럼, 제가 보기에 당신도 잘하고 있어요. 서로 그렇게 믿어 줘요.”

이에샤가 나직하게 말했다.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가만 지켜보았다. 늦은 시각이었으나 사무실은 밝았다. 희고 붉은 등불이 방 안을 비추었다. 이에샤가 다리를 엇갈아 까딱거렸다. 또 상념에 잠긴 성싶었다. 엘테르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어쩔 수 없이 웃었다. 곁에 있기만 해도 좋았다.

연홍색 입술로 눈길이 쏠렸다. 이에샤가 제국 기사단장과 결투를 벌인 때는 8월이었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된 지도 석 달이 지났다. 엘테르트는 갑작스러운 목마름을 느꼈다.

“앨저 경.”

“네?”

“키스, 해도 될까요.”

이에샤가 멈칫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탐색하듯 엘테르트를 훑어보았다. 엘테르트는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다. 이야기를 꺼내니 입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부풀어 올랐으나, 이에샤가 물리친다면 그만둘 셈이었다. 이에샤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몸을 내밀었다. 엘테르트에게 다가붙었다. 하얀 크라바트를 움켜쥐었다.

“그런 거, 원래 물어보고 하나요?”

“물어본 게 아니라 허락을 구한 겁니다.”

“처음이라 잘 못할 텐데.”

“나도 처음입니다.”

한 다리로 몸을 버텼다. 반대쪽 무릎이 엘테르트의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양손으로 엘테르트의 뺨을 감쌌다. 비스듬하게 고개를 내렸다. 엘테르트는 가까워지는 이에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잿빛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질였다. 따끈한 숨결이 입가에 부딪쳤다. 이윽고 입술이 맞닿았다. 이에샤는 손을 스르르 미끄러뜨렸다. 팔로 엘테르트의 목을 감았다. 엘테르트가 이에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날씬하고 탄탄한 몸은 놀라우리만큼 촉감이 좋았다. 윗니로 이에샤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이에샤가 움찔하며 입을 벌렸다. 말캉거리는 혀가 틈새를 파고들었다. 서로의 타액이 뒤엉켰다.

한참 뒤, 이에샤가 등에 힘을 주었다. 물러나려는 듯했다. 엘테르트는 붙잡지 않고 이에샤를 풀어주었다. 이에샤는 비틀비틀 뒷걸음질했다. 무너지듯이 의자에 앉았다. 눈동자도 입술도 반지랍게 젖은 채였다. 밭은 숨이 흘러넘쳤다.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뚫어지라 보았다.

“앨저 경.”

“……집에, 가고 싶어요.”

“예. 내 마차로 바래다주겠습니다.”

이에샤는 고개를 주억였다. 삭월이 뜬 밤이라서 다행이었다. 휘영청한 달 아래에서는 이러한 접촉, 차마 하지 못했을 테니.

============================ 작품 후기 ============================

이번 주말에 연재 재개할 예정이었는데 5월 초까지 바빠지게 생겨서 미리 올립니다. 비정기적으로 연재하다가 조금씩 일일연재 페이스 찾고 돌아가겠습니다.

문제가 되었던 코멘트는 삭제했습니다. 캡처 남겨 놨어요.

선추코 감사합니다! 응원과 위로 건네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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