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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19화 (119/164)

00119 10. 멈추지 않는 바퀴 =========================

셈브리온은 흠칫했다. 제국 기사단장이라니. 뜻밖의 낱말이 튀어나왔다. 아고르가―벨체터 종전 세력 ‘빌버’가 델페레타에 무슨 일을 벌이려는 줄은 알았다. 하지만 제국 기사단과 충돌했으리라고는 상상 못 했다. 이에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한지도 몰랐다. 제국 기사단과 백화 기사단은 달랐다. 침착하게 물어보았다.

“근거는?”

“내가 복수하려고 킬타로스의 물건을 매체 삼아서 살인자를 추적하도록 했어. 녀석을 처치할 마법을 설치했는데 그게 엉뚱한 놈한테 가 버렸거든. 이브론, 기억나? 옛날에 너한테는 치료 마법이고 방한 마법이고 효과가 뚝 떨어졌던 거.”

“상대가 브링어라서 네 마법의 약발이 안 들었다?”

킬타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셈브리온은 브링을 얻은 뒤, 아고르의 마법이 듣지 않게 되었다. 아고르는 사람의 힘인 브링과 자연의 힘인 마력이 충돌하는 것 같다고 했었다. 상관은 없었다. 마법의 도움이 없어도 브링어는 다칠 일이 적었다. 추위를 견디기도 쉬웠다.

킬타로스를 죽인 자가 브링어라면, 대상은 좁혀졌다. 델페레타 수도에 머무르는 브링어는 일곱 명뿐이었다. 제국 기사단장들과 이에샤. 킬타로스가 찾아왔을 무렵 이에샤는 브링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황궁에서 여인네의 일을 돌보는 처지에 밀입국한 용병과 부딪칠 까닭도 없었다.

“대체 어쩌다가 제국 기사를 건드린 건데? 접전이라도 벌였나? 그런 소식은 전혀 못 들었는데.”

“황후를 납치하려고 했어.”

“……뭐?”

아고르가 설명을 시작했다. 본래는 드물게 에브라힐 궁전에서 나온 이실리아 황후를 빼돌려, 잔악하게 가지고 놀다 죽일 셈이었다. 델페레타에 공분을 심어 주어야 했다. 황후의 시녀만 아니었어도 성공했으리라. 황후는 성수의 기운에 이끌려 샘으로 가 버렸다. 황후의 위치를 알아내서 뒤쫓은 킬타로스가 죽임당한 것이었다.

셈브리온은 멍해졌다. 컵을 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아고르는 눈치채지 못했다.

“과연 델페레타더라고. 기사단장급이 황후랑 같이 움직인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도중에 호위진을 바꾼 건지 다른 수를 쓴 건지. 아무튼 상대가 브링어였다면 킬타로스라도 속수무책, 이브론?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셈브리온은 아고르가 건넨 물을 마시고 말았다. 입안이 말랐다. 4월, 이에샤는 황실의 훈장을 받았다. 황후를 지킨 공로 덕분이었다. 그러나 자세한 사정을 물어도 “황후 마마가 몸이 안 좋으신데 내가 잘 보좌해 드렸지 뭐.” 하고 얼버무리기만 했다. 황후 납치 같은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유야 뻔했다. 자기 손으로 셈브리온의 친구를 죽였으니까.

한숨을 억눌렀다. 바보같은 녀석. 입맛이 썼다. 이에샤가 사실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고민했을 줄 생각하자 미안해졌다. 제자가 옛 동료를 죽인 일이 뒤숭숭하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이에샤에 대한 걱정이 컸다. 킬타로스는 어차피 외줄 타기 같은 삶을 살던 놈이었다. 제국의 황후를 해코지하려 했다. 무사한 편이 이상했다. 슬퍼하기에 셈브리온과 킬타로스와 아고르는 너무 닳아빠졌다.

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까 복수하려 했다 그랬지? 킬타로스를 죽인 사람한테?”

“음. 물리적으로 해를 끼치긴 어려우니 서서히 말려 죽이려고 했는데, 촉매를 상관없는 놈이 주워서 망했어. 그래도 상대를 알았으니 뭐. 킬타로스의 복수는 제국 기사단장을 깡그리 없애면 같이 이루어지겠지.”

아고르는 브링어 여섯을 해치우겠노라, 쉽게도 말했다. 셈브리온은 평상심을 꾸몄다. 밝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처음엔 어떤 식으로 복수할 셈이었는데?”

아고르는 고개를 기울였다. 셈브리온은 킬타로스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한동안 말이 없다가―“그러냐.” 하고 아고르를 문전박대했다. 관심을 보이다니 새삼스러웠다. 하나 수상한 점이 짚이지는 않았다. 호기심이리라. 아고르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멈추지 않는 바퀴.”

“그게 뭔데, 인마. 알아듣게 설명해.”

“이름 그대로야. 촉매를 흡수한 사람의 심신을 주물러, 멈추지 않는 수레바퀴처럼 파멸로 달려가게 하는 마법. 자제력을 잃게 해서 범죄를 저지르도록 유도하거나 매일같은 악몽으로 미치게 하거나. 150년 전에 사장된 마법인데 내가 되살려 냈지.”

아고르에게는 뿌듯한 티가 뚜렷했다. 셈브리온은 입을 악물었다. 이에샤가 망가지는 꼴을 그려 보았다. 가슴이 선득했다. 마법이 빗나가서 다행이었다. 누가 이에샤 대신 촉매를 주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에샤만 괜찮으면 되었다.

양철 컵에 든 물을 남김없이 들이켰다. 벨체터는 추웠다. 더운물도 식은 지 오래였다. 아고르는 셈브리온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싶었다. 셈브리온은 부담을 느꼈다. 한숨이 흘러넘쳤다.

“말했지. 난 네놈들을 도우러 온 게 아니라고.”

“괜찮아, 괜찮아. 제국은 곧 쑥대밭이 될 텐데 네가 버티다 휘말릴까 겁났거든. 나중에 다시 떠나든 여기에 눌러앉든 이브론, 제국으로만 가지 마.”

눈살이 찌푸려졌다. 옛날 샤비어 왕국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억했다. 자연 마력이 변이를 일으켜, 국민의 오분지 일이 목숨을 잃었던 재앙. 셈브리온은 그를 진압할 병력으로 고용되어 갔었다. 훗날 샤비어 마파랑 사태가 평균보다 소규모였다는 소리를 듣고 어찌나 어이가 없었는지.

아고르는 셈브리온에게 인위로 마파랑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셈브리온은 이에샤를 떠났다. 이에샤가 평안하려면, 델페레타가 평화로워야 했다. 빌버가 델페레타를 주무르도록 놓아두지는 않을 셈이었다.

* * *

델피르력 753년 12월 1일.

이에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의 마지막 달로 접어들었다. 겨울 색이 뚜렷했다. 공기가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고 서늘해졌다. 세상 풍경이 희끄무레하게 느껴졌다. 살갗이 가칠가칠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낮인데도 햇빛이 따갑지 않았다. 여름에는 눈이 멀어 버릴 듯이 이글거리던 해도 수줍게 볕을 흩뿌릴 따름이었다.

겨울철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작년 오늘에는 이에샤도 대연무장에 있었다. 제국 기사가 될 꿈에 부풀어서. ‘백화 기사단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황궁에 드나들게 될 줄은 상상치 못했다. 그날의 굴욕감은 돌이킬 때마다 가슴을 뻐근하게 했다. 하지만 1년이나 지났다. 접어서 마음 한구석에 처박아 버려도 될 성싶었다. 픽, 웃음이 나왔다.

“하늘에 뭐라도 있나요? 즐거워 보이시네요.”

“아니, 그냥.”

미엘라가 종알거렸다. 이에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총무부로 향하는 중이었다. 한 해의 총 보고서를 올려야 했다. 미엘라만 보내도 되었지만, 그래서는 일 처리가 오래 걸렸다. 총무부 관리들이 어리고 깡마른 소녀를 무시해 댔으므로. 이에샤가 감시 겸 호위로 따라가는 것이었다.

“작년 이날이 나한테는 좀 기념비적인 날이라서.”

“아! 앨저 경은 처음에 제국 기사단 시험을 보셨다고 했죠? 조금 웃기긴 하네요.”

“응? 올센 경은 뭐가 웃겨?”

미엘라가 서류철을 끌어안은 채로 쿡쿡거렸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험자 중에 브링어가 있었는데 떨어뜨린 거잖아요. 공정한 심사니 기사단장의 안목이니, 다 허울뿐이었단 거 아니겠어요? 눈앞의 보물도 몰라봤으면서.”

“올센 경, 어쩐지 페리튼 경을 닮아 가는 거 같아.”

“그럴지도요. 페리튼 경 하시는 말씀 듣다 보면 재밌어요. 제가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일들이 곰곰 따져 보니 너무 이상했던 거 있죠.”

공감이 갔다. 네세라는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고는 했다. 여백작이나 여자작이라는 호칭이 얼마나 괴상한지. 이에샤가 여성이 할 수 없다고 알려진 일 중 몇 개를 해냈는지. 여성 예술가의 작품에 깊이가 없다고들 하지만, 인류의 보배로 칭송받는 건축물 성녀 나뎃타의 요람을 지을 때 지휘한 사람이 달신교 사제였다든가. ‘성녀’라는 낱말에 깔린 비열하고 타산적인 남자의 욕망이라든가.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싶다가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이에샤 또한 네세라의 역설이 재미있었다.

“페리튼 경 덕에 기사단이 뼈대를 갖춘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저랑 스란 경도 3월에 입단했네요. 시간 참 빠르다아.”

“그러게. 어라, 생각해 보면 우리 경력이 두 달밖에 차이가 안 나네?”

“맞아요. 햇수로만 따지면 백화 기사들은 전부 신출내기예요.”

둘은 재잘재잘하며 걸었다. 셈브리온이 떠나고, 이에샤는 부하들과 가까워졌다. ‘밀레나 방문 사건’도 한몫했다. 백화 기사들이 이에샤를 대하는 태도가 허물없어졌다. 속을 내보인 덕이 컸다. 핏줄을 미워하는 데에 거부감은 남은 눈치였지만, 이에샤 앞에서는 티를 감추었다. 이에샤도 남의 생각에까지 가타부타할 만큼 꽉 막히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저라고 다르지 않았다. 영춘 사냥 대회 때, 친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이실리아가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상식도 체험에 따라 길러지는 것이었다. 혈육의 정을 모르고 자란 이에샤에게 친족이 무의미하듯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반대이리라. 이에샤는 무작정 날뛰기보다 생각하기에 익숙해져 갔다.

총무부 건물―망초궁이 나타났다. 망초궁 너머에는 대연무장이 섰다. 소철궁이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대연무장이 거대하여 멀리서도 보였다. 지금쯤 기사단 입단 시험이 한창일 터였다.

망초궁 정원으로 접어들려던 차였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보다 몸이 움직였다. 이에샤는 미엘라를 밀쳤다. 미엘라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서류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이에샤는 미엘라를 덮치려 한 사내를 걷어찼다. 검을 뽑지는 않았다. 사내는 맨손이었다.

“대체 뭐…….”

“사, 살, 살려, 살, 려줘.”

사내의 두 눈과 콧구멍과 귓구멍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이에샤는 아연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다. 어떻게 저토록 수상한 자가 황궁을 돌아다닌단 말인가. 사내가 자빠진 미엘라에게 달려들었다. 이에샤는 거듭 사내를 후려갈겼다.

“올센 경, 아는 사람이야?”

“모, 몰라요! 전혀 모르는, 꺅!”

“그런데 왜 자꾸 널 노리고, 안 되겠다. 기절시켜야겠어.”

몸을 숙였다.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잔등에 흐릿하게 브링을 실었다. 꺽꺽대며 미엘라를 해치려 드는 사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명치 언저리를 때렸다. 팔을 거두어들였다. 사내가 비틀비틀 앞으로 허물어졌다.

이에샤는 숨을 몰아쉬었다. 지치지는 않았으나, 놀랐다. 사내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들여다보려 했다―보아도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닥에 처박힌 면상을 들추었다. 이목구비가 피범벅 된 채였다. 이에샤는 흠칫하며 사내로부터 뒷걸음질 쳤다. 미엘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죽은 거, 같아.”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 향후 작품 전개에 간섭하는 쪽지는 모두 무시하겠습니다. 특히 밀레나를 비참하게 몰락시켜 달라는 닦달이 많은데, '몸이나 팔게 만들어라' 따위의 내용을 보고 연재를 접을 생각까지 했습니다. 굉장히 불쾌합니다. 이러한 쪽지들은 전부 캡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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