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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20화 (120/164)

00120 10. 멈추지 않는 바퀴 =========================

당혹스러웠다. 이에샤가 셈브리온보다 브링을 다루는 데 서투르다고 해도, 걷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재수 없다면 뼈가 부러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죽다니 뜻밖이었다.

사내는 처음부터 기괴했다. 이에샤의 주먹질이 결정타가 되었더라도, 그전에 아슬아슬한 상태였을 터였다. 문제는 사람들이 믿어 주느냐였다. 살인범으로 몰릴지도 몰랐다. 사내가 입은 옷은 고급스러웠다. 일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지체 높은 분이라면 일이 귀찮아졌다.

“어, 어떡해요? 앨저 경. 황궁 안에서 벌어지는 흉악 범죄에는 가중 처벌이 부과돼요. 전 앨저 경의 하급자라서 증언도 힘을 잃을 텐데…….”

“올센 경은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요즘 무슨 책을 읽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나도 알아. 골이 때려서 농담 좀 해 본 거야.”

미엘라는 ‘리타 밸리의 별’ 사건으로 법률서에 관심을 가졌다. 도서관에서 법학개론서나 판례집을 빌려다가 읽기도 했다. 이에샤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이에샤에게는 적이 많았다. 부하인 미엘라가 증인으로 서 보아야, 협박이나 강요를 당한 게 아니냐며 뭉개질 수도 있었다.

엘테르트가 떠올랐다. 엘테르트라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멘델린 소공작이 이에샤의 결백을 내세워 준다면. 이에샤는 고개를 털었다. 남자의 이름에 기대기 싫다 해 놓고, 써먹을 궁리에 빠진 자신이 한심했다. 자기 힘으로 끝까지 살길을 찾아보아도 될 터였다. 아직은 아니었다.

엄지손을 깨물었다. 잘근잘근 씹어 댔다. 고민을 거듭했다. 짜증이 났다. 왜 저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그때, 망초궁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이에샤는 주춤했다. ‘도망칠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 달아났다가, 죄를 인정하는 모양새로 비칠지도 몰랐다. 갈팡질팡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나타난 이는 겨울용 망토를 두른 활발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청년은 쓰러진 사내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성큼성큼 걸었다. 이에샤에게 다가갔다. 허리를 구부렸다. 공손한 인사였다.

“안녕하십니까. 백화 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누구죠?”

“마르셀 오티스라고 합니다. 작위는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오티스 백작이십니다. 마법부 8급 관리로 황실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기사단장은 5급 무관이었다. 8급 문관의 존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샤는 저보다 하잘것없는 남자들에게도 업심당해 왔다. 마르셀의 깍듯함이 낯설게 느껴졌다. 마르셀이 빙그레하며 덧붙였다.

“마법장을 지내고 계시는 현자 엘먼 공의 애제자이기도 하죠.”

이에샤와 미엘라는 얼떨떨해졌다. 자기 입으로 ‘애제자’라고 일컫다니. 겉보기보다 뻔뻔한 성미인 듯싶었다. 마르셀은 자부심에 찬 낯으로 가슴을 폈다. 이에샤는 어설프게 “아, 응.” 하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마르셀이 망초궁을 찾은 이유가 궁금했다. 이에샤의 직감이, 죽은 사내와 관련이 있으리라고 외쳤다.

마르셀은 땅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시신을 들여다보았다.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난감한 목소리가 새었다. 이에샤는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갑자기 내 부하를 공격해서 반격하긴 했지만, 죽을 정도로 때리진 않았어.”

“압니다. 이자는 마력에 오염됐으니 어차피 살기는 글렀었을 겁니다. 리오르의 막내아들이 이런 꼴을 당하다니, 소란이 일겠군요.”

“리오르? 닐보칸의 리오르?”

“예. 나라 제일의 강옥 광산을 소유한 그 리오르.”

아찔했다. 닐보칸의 오래된 명문가이자, 대부호인 리오르 후작가의 도련님이라니. 상상을 뛰어넘는 거물이었다. 그런 자가 왜 미엘라를 해치려 들었는지 몰랐다. 해신과 달신이 원망스러웠다. 머리를 쥐어짜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마르셀은 이에샤의 속도 모르고 해맑게 웃었다.

“걱정 놓으십시오. 저희 스승님이 리오르 후작처럼 금은보화는 없어도, 아티팩트 공장이십니다. 세상사 실용성이 깡패 아니겠습니까?”

“뭔 개소리야? 지금 누구 염장 질러?”

“이런, 말씨가 거칠어지셨군요. 자포자기하지 마십시오. 이번 일로 앨저 경이 곤욕을 치르시지는 않을 겁니다.”

이에샤는 눈을 끔뻑였다. 미엘라를 힐끗했다. 너는 무슨 뜻인지 알겠니? 눈짓을 보내자 미엘라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마르셀이 턱을 어루만졌다. 경계심 가득한 푸른 눈동자를 보아, 차근차근 설명해 주어야 할 성싶었다.

“제국 기사단에는 이미 전달된 일입니다만, 요즘 황궁에서 사람이 마력에 오염당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앨저 경께 얻어터진 이―리오르 영식이 네 번째죠. 마력 오염은 단순한 중독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성을 잃고 살아 있는 것을 해치려 무작정 달려들다가 이렇게, 깩.”

손날로 목을 그어 보였다. 이에샤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성을 잃어? 살려 달라는 말을 했던 거 같은데.”

“열병 환자의 헛소리랑 비슷합니다.”

‘……명료하네.’

마르셀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리오르 영식을 향한 애도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샤도 마찬가지였으나―처음부터 죽을 사람이었다고 하니 더욱―마르셀의 태도는 사무적으로 명랑했다. 이에샤는 라제카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마법사란 지력(知力)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자들이었다. 상식이 모자라고, 관념이 비틀린 경우가 많다고 했다. 마르셀을 보니 무슨 뜻인지 알 성싶었다.

“오티스 경,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참고인으로서 뭔가 해야 하나?”

“간단하게 진술만 해 주시면 되지 싶습니다. 어차피 영식이 왜 이렇게 됐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니까요.”

“뭐? 어째선데?”

마르셀이 입을 떼려는 참이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샤는 그것이 검이 흔들리며 내는 금속성임을 알아차렸다. 제국 기사단의 휘장을 단 기사 세 명이 달려왔다.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이자 무슨 일인가, 호기심을 품고 쫓아오는 구경꾼도 있었다.

“아무래도 스승님이 기사단에 연락을 취하신 모양이군요. 하하! 애제자를 긍휼이 여기시는 마음, 참으로 존경스럽지 않습니까?”

“경을 못 믿어서 사람을 보낸 게 아니고?”

“그럴 리가요.”

마르셀의 웃음에는 한 점 티끌도 없었다. 이에샤는 현자 엘먼이 불쌍해졌다. 사건만 터졌다 하면 루시온에게 들볶이고 엘테르트에게 시달리던데, 제자―정말로 애제자인지는 모를 일이었다―까지 이 모양이라니.

제국 기사들이 멈추어 섰다. 눈길이 이에샤에게 쏠렸다. 한결같이 인상이 찌푸려졌다. 평기사에게 백화 기사단장은 엄연한 윗사람이었다. 벌레 씹은 표정으로 머리를 숙여 보였다. 이에샤도 까딱 고갯짓했다. 2 기사단원이 나머지 4 기사단원에게 손짓했다. 리오르 영식의 시신을 가리켰다.

“붓꽃궁(마법부가 쓰는 별궁)으로 옮기게. 마법장께서 시신을 훼손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네.”

“알겠네.”

“먼저 가겠네. 자네는 백화 기사단장, 님께 사정을 듣고 오게.”

이에샤는 때도 잊고, 웃고 말았다. 옛날이었다면 ‘여기사단장한테’ 정도로 말했으리라. 브링어라고 밝히자 제국 평기사들의 태도가 딴판이 되었다. 가소롭고 짜증스러웠다. 4 기사단원 둘이 들것을 펼쳤다. 시신을 올렸다. 종종걸음으로 떠나갔다. 2 기사단원이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눈빛에서 불만을 숨기지 못했다. 이에샤는 턱을 치켜들었다.

“앨저 경께서는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우연히. 총무부에 연말 총 보고서를 올리러……, 아.”

떨어진 보고서들을 갈무리하기도 전이었다. 미엘라도 주저앉은 채였다. 내 정신이야. 투덜거리며 미엘라를 일으켜 주었다. 미엘라 또한 얼이 빠졌던 게 쑥스러운지, 뺨을 붉히며 코트를 털었다. “말씀 나누세요.” 하고는 흩어진 종잇장을 줍기 시작했다.

미안하군. 이에샤는 대답이 늦어진 것을 사과했다. 리오르 영식이 쓰러졌던 자리를 곁눈질했다.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연말 보고서를 올리러 망초궁에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달려온 남자가 내 부하, 올센 경을 공격하려 들었다. 대화가 통할 상대로 보이지 않기에 기절할 정도로만 급소를 쳤는데 그대로 사망하더군. 당황하던 차에 여기 오티스 경이 찾아와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줬고.”

“그렇습니까. 저희는 마법장의 전령을 받고 왔습니다. 파견한 관리가 기사단에 연락하는 걸 까먹었을 게 뻔하다고 하더이다.”

“…….”

이에샤의 눈길이 마르셀에게 지그시 꽂혔다. 마르셀이 어깨를 으쓱했다.

“스승님도 참. 연세가 들면서 걱정이 느셨습니다.”

“말을 말자.”

“저에 대해 오해를 하시는 듯하군요, 앨저 경. 아무튼 좋습니다. 앨저 경도 붓꽃궁으로 가십시다. 백화 기사단에 번거롭게 공문을 보내는 것보다 기사단장께 바로 말씀드리는 편이 낫겠죠.”

이에샤는 한숨을 지었다. 기분이 상했다. 제국 기사단에 알려진 일을 백화 기사단은 몰랐다니. 소식이 밀린 탓일지도 몰랐지만, 여자 기사단이라고 전달 대상에서 빠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가능성 있었다. 총무부에서 황실의 모든 부처로 돌렸다는 연락이 백화 기사단에만 오지 않고는 했으므로. 관리 중 누군가가 장난질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하나 모두가 감싸 주기라도 하는 양 범인을 잡아낼 수가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보고서를 모아서 끌어안고, 눈치만 살피는 미엘라에게 향했다.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다녀올게. 보려던 일 마저 보고, 본부에 돌아가 있어.”

“조, 조심하세요. 앨저 경.”

“죄인으로 끌려가는 것도 아닌데 뭐.”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미엘라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거두지 못했다.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12월에 나비가 보이는 곳은 붓꽃궁뿐이리라. 석곡궁 정원에도 사철 작약화가 피었지만, 붓꽃궁은 훨씬 신비로웠다. 황실 마법사의 일터에는 하얗고 반투명한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날갯짓할 때마다 인분 대신 자디잔 빛살이 산란하는. 성수를 촉매 삼아서 만들어 낸 인공 마력 덩어리였다. 마법부에서는 대규모 마법을 짤 때마다 나비를 잡아들였다. 모자란 마력을 채우기 위한 예비품이라 할 수 있었다.

나비를 잡아야 하는 날에는 마법사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뛰어다닌다고 했다. 설명을 듣고 이에샤는 ‘왜 굳이 나비 모양으로 만들어 놓는 건데.’ 하고 생각했다. 마르셀이 이에샤의 속을 읽은 듯 웃었다.

“예쁘잖습니까.”

“아, 그래.”

이에샤는 건성으로 맞장구쳤다. 마법부 놈들이 무슨 비효율적인 짓을 벌이든 알 바 아니었다.

정원을 가로질렀을 때였다. 붓꽃궁 현관문이 열렸다. 수염을 기르고, 정장 차림에 지팡이를 든 노신사가 뛰쳐나왔다. 대리석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오, 스승님이 마중을 나와 주시는군요. 스승님! 제자가 돌아왔습니다! 맡겨 주신 일을 잘 처리하고 말입니다!”

“너 이 빌어처먹을 자식아!”

============================ 작품 후기 ============================

여태까지 나온 마법사들(딜란, 아고르)이 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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