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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21화 (121/164)

00121 10. 멈추지 않는 바퀴 =========================

마르셀은 엘먼이 휘두른 지팡이를 익숙하게 피했다. 엘먼의 입가가 떨렸다. 수염도 파르르했다. 이에샤는 걱정에 빠졌다. 칠십 대의 반을 넘긴 엘먼 공이,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만 같았으므로. 마르셀은 뭐가 재미있는지 실실 웃기만 했다. 엘먼은 ‘마르셀 두들겨 패기’를 그만두었다. 눈만 희번덕거렸다.

“내 시체 생기면 곧바로 약품 처리부터 하랬지! 네놈 손에 쥐여 보낸 약이 얼마짜린 줄 알아? 시간 지나면 못 쓴다고 했어, 안 했어 이 미친놈의 새끼야! 엉? 너도 오염시켜주랴, 엉?!”

“진정하시죠, 스승님. 리오르 영식이 예상보다 일찍 죽어서 그랬습니다. 약 칠 새도 없었어요. 제가 도착했을 때 이미 죽은 지 10분은 지난 뒤였다고요.”

“오염된 지 한 시간도 안 된 놈이 왜 갑자기 뒈져! 너 이 새끼 구라만 늘어서는!”

이에샤는 멍해졌다. 프리드 엘먼은 이에샤도 만난 적 있는 사람이었다. 신년맞이 무도회 때 발맞추어 렌디드 자작의 음모를 막아 냈었다. 오며 가며 마주치기도 여러 번이었다. 이에샤가 아는 엘먼은 점잖은 노옹이었다. 이에샤를 보고 “계집애가 왜 험한 일을 하려고 하누.” 하며 혀를 차기는 했으나, 찍어 누르려 들지는 않았다. 이에샤보다 어린 손녀가 있다고 들었다.

엘먼의 보라색 눈동자가 휘리릭 굴렀다. 이에샤 쪽을 향했다. 이에샤는 움찔했다. 마르셀이 기회라는 듯이 이에샤의 어깨를 잡았다.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이에샤는 반사적으로 발바닥에 힘을 주었다. 마르셀의 연약한 팔심으로는 이에샤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앨저 경, 실례지만 몸무게가 어찌 되십니까?”

“경이 약해서 꿈쩍 않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하긴 책상 앞에 앉아서 곱게 자란 저랑 브링으로 막 대연무장도 부수는 경하고는 다르죠.”

“안 부쉈어.”

마르셀은 태평스럽기 그지없었다. 콧김을 내뿜는 스승이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스승님! 여기 앨저 경이 오염된 리오르 영식을 훅, 보내 버린 장본인이십니다. 주먹으로 한 대 쳤더니 영식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약품 처리할 골든 타임을 놓친 뒤어억!”

엘먼은 포기했던 것이 아니었다. 마르셀의 빈틈을 노렸다. 지팡이가 호선을 그렸다. 딱! 마르셀은 정수리를 얻어맞았다. 어깨와 허리도 굽은 엘먼의 몸 어디에서 그만한 힘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르셀이 울상을 지었다.

이에샤는 졸아들었다. 엘먼과 마르셀의 대화를 듣자 하니, 마력에 오염당한 사람의 시체에 조치를 해야만 했던 것 같았다. 탐지 마법이라도 펼쳐 놓았는지, 마르셀은 리오르 영식의 이변을 알고 망초궁으로 온 성싶었다. 이에샤가 리오르 영식의 죽음을 앞당기는 바람에 엘먼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듯했다.

“아, 엘먼 공. 안녕하십니까. 제가 사정을 잘 몰라서 그만 실수를 저질렀나 보네요.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사정을 몰라?”

“마력 오염에 관한 일을 전혀 모르시더라고요. 살인을 저지른 줄 알고 안절부절못하시길래 제가 설명해 드렸습니다! 모든 대신과 단장급에게 공문을 보냈을 텐데 백화 기사단이 누락됐던 모양이죠?”

마르셀이 머리꼭지를 부여잡은 채로 떠들었다. 엘먼이 흘겨보자 찌그러졌지만. 엘먼은 혀끝을 찼다. 알 만했다. 총무부의 못된 녀석들이 백화 기사단에만 정보를 주지 않았으리라.

“됐다. 앨저 경이 실수했다면 내 어쩔 수 없지. 계집애를 사내놈처럼 야단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하하…….”

이에샤는 어설프게 웃었다. 엘먼과 이야기할 때는 이런 점이 불편했다. 이에샤를 어린 여자라는 까닭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깔아뭉개지도 않았다. 엘먼에게는 이에샤가 한 사람의 기사단장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황궁을 헤집고 다니는 귀여운 망아지일 따름이었다. 이에샤는 엘먼에게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화내기에는 엘먼이 상냥했다. 받아들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엘먼이 지팡이로 붓꽃궁 건물을 가리켰다. 들어가세. 엘먼과 마르셀, 이에샤는 계단을 올랐다. 제2 기사단의 기사는 엘먼에게 예를 갖춘 다음 부용궁으로 돌아갔다.

마력의 나비는 실내에도 떠다녔다. 정제된 마력―인공 마력―은 위험성이 크게 줄어들었다. 중독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이에샤는 반투명한 나비를 구경하며 걸었다. 엘먼은 현관을 지나치고 오래지 않아, 떡갈나무로 짠 문 앞에서 멈추었다. 뜻밖이었다. 부처의 우두머리쯤 되면 높은 층을 쓰게 마련이었다. 엘먼의 나이를 헤아리면 1층에 방을 둘 수밖에 없었는지도 몰랐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기에는 무릎이 시릴 테니까.

엘먼의 사무실에도 나비 서너 마리가 있었다. 야트막한 탁자를 둘러싸고 스툴 네 개가 놓였다. 초라한 응접상이었다. 엘먼이 손짓했다. 마르셀이 냉큼 앉으려 했다. 지팡이가 휙 움직였다.

“너는 서 있어, 인마!”

“너무하십니다, 스승님. 총무부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다리 아픈데요!”

“이놈이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어!”

마르셀은 개기지 못했다. 입술을 삐죽이며 섰다. 이에샤는 어색한 기분으로 스툴에 앉았다. 엘먼은 자기 책상에 자리 잡았다. 서랍을 뒤적거렸다. 조약돌 같은 물건을 꺼냈다. 이에샤에게 집어 던졌다. 이에샤는 어렵지 않게 잡아챘다.

밝은 갈색 돌멩이였다. 불빛에 비추면 붉은색으로도 보였다. 반질반질한 겉면에 희게 반사광이 맺혔다. 이에샤는 마치 엘테르트의 눈동자 같다고 생각했다.

“거기 빈 컵에 넣고 두어 번 흔들어 보게. 차가 될 게야.”

“아, 정말요?”

탁자에 놓인 찻잔 한 개를 집었다. 돌을 빠뜨렸다. 찻잔 손잡이를 쥐고, 손목을 돌렸다. 흔들림이 생기자 안쪽에서 돌이 녹아내렸다. 찻물이 차올랐다. 이에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았다. 킁, 향을 맡았다. 훌륭하지도 형편없지도 않은 홍차 향이 풍겨 나왔다. 신기했다.

“여자애들은 그런 걸 좋아하지? 별 대단할 것도 없는데 내 손녀는 자지러지더군.”

“이런 건 남자애라도 좋아할 거 같은데요.”

“그런가? 사내놈들은 뭐, 순 때려 부수고 펑펑 터지는 거나 좋아하지 않나?”

“그, 글쎄요.”

대답을 얼버무렸다. 엘먼은 까마득하게 높으신 분이었다. 아티팩트를 신기해 하기에 성별은 무관할 것 같았지만, 반박하기도 무엇했다. 이에샤가 남자아이를 만나 본 적이 드무니 모르는 일이기도 했다. 하나 란델이라면 좋아할 듯싶었다.

“탈리오노 저하라면 좋아하실지도 몰라요.”

“저하는 워낙에 얌전하고 특이하신 분이잖나. 연애 소설이니 공주 소설이니를 읽는다고 나리궁 시종장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내 장담하는데, 열 살짜리 이벨리오노 전하께 그 티스톤 보여 드리면 차 끓이는 수고도 귀찮아서 마법을 쓰냐며 또박또박 훈계하실 걸세. 사내애들은 그렇지.”

‘그거야말로 특이한 반응 같은데.’

이에샤는 찻잔으로 입가를 가렸다. 겸연한 표정을 숨겼다. 엘먼이 자기 찻잔에도 티스톤을 넣고 흔들었다. 마르셀은 ‘왜 나만 안 줘.’ 하는 눈치였으나,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본론으로 들어갈까. 갑자기 마력에 오염된 사람을 봐서 놀랐겠군. 나도 놀랐다네. 1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이니까.”

“…….”

“그런데 일주일 새에 에브라힐에서만 네 번째야.”

“궁에서만요?”

“그래. 이건 심상치가 않아. 심상치가 않단 말이지.”

엘먼이 투덜투덜 혼잣말했다. 이에샤도 심각해졌다. ‘마력 오염’이라는 낱말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자연 마력의 변이란 자연 규칙의 파괴로 이어졌다. 델페레타는 22년째 마파랑을 겪지 않았다. 열 해에서 스무 해를 건너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치게 오랫동안 평화로웠다.

“혹시 마파랑의 조짐 같은 건가요?”

“경이 내년에 몇 살이 되지?”

“정확히 스무 살이 됩니다.”

“그것참 똘똘하단 말이야. 마파랑을 본 적도 없을 텐데 어찌 그리 바로 연상해 내나? 황태자 전하께서도 앨저 경의 눈치를 칭찬하셨지. 여자 눈치가 빠르면 좋은 일이라네. 나중에 남편한테도 살뜰하겠어.”

이에샤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결혼할 뜻이 없기도 했으나, 제가 멘델린 공작 부인이 된다면 상대방을 챙기는 쪽은 엘테르트이리라.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세심함을 쫓아갈 수 없었다. 며칠 전에도 “손발이 따뜻하면 월경통이 줄어든다더군요.” 하며 안감에 털이 달린 장갑과 부츠를 선물받았었다.

“마파랑이 벌어지기 몇 달 전에는 사람이 마력에 오염되는 일도 생겨. 주로 미움이나 시기, 질투, 혐오, 분노 같은 어두운 감정으로 급격하게 흥분했을 때 그런다네. 불안정한 마력의 영향으로 장기와 혈관이 수축하며 심신이 망가져 버리는데……. 문제는 아무리 마파랑의 전조라도 네 번은 심하다는 거야, 네 번은.”

“리오르 영식이 흥분한 이유를 알아내면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요?”

“그건 뻔하지. 기사단 입단 시험이 있는 날이지 않나. 그래서 아침부터 탐지망을 펼치고 대비하고 있었던 게야.”

그제야 깨달았다. 리오르 영식은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치르기에 알맞은 나이―십 대 중후반―로 보였다. 시간을 따지자면 1차 시험에서 떨어졌을 터였다. 좌절한 채로 돌아다니다 변을 당한 성싶었다. 엘먼이 차를 호로록 들이마셨다. 말을 이어 나갔다.

“더 이상한 건 수도에서 마력 오염으로 추정되는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걸세. 마구잡이로 사람을 습격할 테니 보고가 안 들어올 수 없는데.”

“그럼 에브라힐 안에서만 일들이 벌어졌단 뜻인가요?”

“처음은 내기 대련에서 진 기사였고, 두 번째는 상관한테 심하게 깨진 관리, 세 번째는 밤중에 동료와 언성을 높이고 싸우던 하인이었네.”

“어째 피해자가 다 남자인걸요! 마력이 남자를 미워하나 봅니다.”

마르셀이―눈치 없이―끼어들었다. 엘먼은 망설이지 않고 펜을 촉 쪽으로 마르셀의 이마에 겨냥했다. 다트처럼 집어 던졌다. 학자 노인네의 저격이 맞을 턱이야 없었다. 펜은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르셀은 억울한 낯빛을 지었다.

“왜 저만 가지고 그러십니까? 스승님.”

“그럼 얌전한 앨저 경한테 이러리?”

“그러셔야죠. 생판 남보다는 제자 쪽을 예뻐하셔야 마땅합니다!”

“어린 새끼가 벌써 지랄병에 걸려서는.”

엘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르셀은 ‘애제자’는 아니었지만, 수제자이기는 했다. 젊고 똑똑하고 능력 있었다. 1년 365일 봄날인 것 같은 정신머리만 아니었어도 아끼고 귀여워했을 터인데.

“거 여자들은 차분하고 화도 잘 참는데 사내새끼들은 너처럼 촐싹대니까 마력에 막 오염되고 그러나 보지!”

“스승님도 사내대장부시잖습니까!”

“늙으면 화가 줄어드는 법이다!”

엘먼이 설득력 없는 기세로 외쳤다. 이에샤는 ‘내가 왜 여기 있지.’ 하고 떠올리며 차만 들이켰다. 마법의 차라고 보통보다 맛있지는 않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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