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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25화 (125/164)

00125 10. 멈추지 않는 바퀴 =========================

장내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미엘라의 이야기인즉, 딜란 렌디드가 1월에 놓아 둔 촉매의 수명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마파랑을 불러일으키는 마법이 터지기 시작했다고. 그럴듯했다. 시기도 맞아떨어졌다. 사실이라면 조치를 서둘러야 했다. 에브라힐 남쪽을 뒤져야 하지 싶었다. 촉매를 없애고, 만일에 대비해서 다른 곳도 살펴보아야 했다. 루시온이 날카로운 눈길로 미엘라를 훑었다. 미엘라는 흠칫했다. 고개를 수그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신년맞이 무도회에서 열 달이 지났다. 그렇게 오래된 일을 어찌 기억하지?”

“그, 그건 전하, 저는, 그저 기억이 난다고밖에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스치듯이 들은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할 수 있다고?”

루시온은 흥미를 누르지 못했다. 미엘라의 재능에 입맛이 당기는 모양이었다. 미엘라는 나무라는 것으로 들었는지, 울상을 지었다. 이에샤는 미엘라를 힐끔했다. 얼굴빛이 새파랬다. 루시온은 황태자였다. 평민 출신인 미엘라에게는 까마득한 윗전. 무심코 던지는 말도 날벼락처럼 느껴질 터였다. 이에샤의 오른손이 추어올랐다.

“전하! 올센 경 이야기의 신뢰성은 상관으로서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그녀는 한 번 읽은 책 내용을 빠짐없이 외울 만큼 빼어난 기억력을 지녔습니다. 책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검증하셔도 좋습니다.”

“흠! 됐어. 앨저 경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믿겠다.”

매듭 한 번 산뜻했다. 이에샤는 황당해졌다. 이렇게 받아들일 일을 왜 따지고 들었는가? 미엘라만 주눅 들어 버렸다. 루시온은 이에샤를 믿기에 캐묻기를 그만두었지만, 사정 모르는 이에샤로서는 루시온이 얄미웠다. 미엘라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미엘라가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앨저 경.” 하고 인사했다.

“어쨌건 걸어 볼 만한 추측이야. 엘먼 공, 이제 어째야겠소?”

“에브라힐 남쪽 중심부부터 탐색망을 펼쳐 인공 마력의 자취를 찾아보겠습니다. 저 어린 백화 기사의 말이 맞다면 1월하고 같은 방법이 통할 겝니다.”

“좋아! 예산은 들겠지만 시도할 가치는 있지. 공이 지휘해서 처리하시오.”

“예, 전하.”

루시온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표정이 가벼워졌다. 이에샤는 루시온의 마음이 편해진 듯해서 잘되었다고 생각하다가, 엘테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엘테르트는 일순간 놀랐다. 이내 눈매를 휘었다. 입술을 달싹거렸다.

‘훌륭합니다.’

제가 아니라 미엘라를 향한 칭찬이었지만, 이에샤는 뿌듯해졌다. 이 자리에는 권위 있는 남자가 많았다. 어리고 하잘것없는 처지의 미엘라가 실마리를 내놓았다니. 여자를 업신여기는 치들에게 한 방 먹인 기분이었다. 이에샤는 빙그레하며 ‘고마워요.’ 하고 답을 보냈다.

루시온이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뜻하지 않게 돌파구가 보이는군. 올센 경의 얘기가 들어맞는다면 폐하께서 올센 경, 나아가 백화 기사단에 상을 내리실 거다.”

“화, 화, 황송합니다! 일천한 생각을 말씀드린 것뿐인데…….”

“여기 있는 모두가 손가락만 빨고 있었어. 자부심을 가지도록.”

장난스럽게 치하한 뒤, 회의의 끝을 알렸다. 처음에는 제국 기사단과 총무부를 몰아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에샤가 바라지 않았다. 별수가 없었다. 마력 오염 사태에 관해서 단서를 잡았으니, 보람은 충분했다.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에게 전송받으며―엘테르트를 끼고―회의실을 나섰다. 예정에 없던 회의 탓으로 일이 밀렸을 터였다.

이에샤는 미엘라를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보았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생각을 했어?”

“헤헤, 우연이에요. 얼마 전에 판례집을 빌려 읽어서 다행이었죠.”

“그렇게 사건을 연관 지어 생각하고 의심하는 게 어디 보통 일이야? 대단해, 올센 경.”

“정말로 별거 아니에요.”

크흠! 헛기침 소리가 났다. 이에샤와 미엘라가 고개를 돌렸다. 총무대신 크로프트를 쳐다보았다. 크로프트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두 백화 기사를 흘겼다. 까만 콧수염을 어루만졌다.

“계집들이 이리 설쳐 대니, 망조가 들었어. 망조가.”

“뭐라고요?”

“우쭐대지 마라. 시간만 있었으면 다른 사람도 충분히 해냈을 생각이니. 그리고 앨저 경, 내 부하들에게 경위서를 요구해? 그러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하나? 자네와 내 사이의 격차도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군.”

미엘라는 크로프트와 이에샤와의 눈치를 살폈다. 겁먹은 티가 뚜렷했다. 이에샤는 저 얼간이를 몇 대 후려갈기고 싶다는 충동을 억눌렀다.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슬프게도, 이만한 모욕에는 익숙했다. 침착을 지킬 수 있었다.

“그렇게 지위로 줄 세우기 좋아하는 크로프트 공이니 잘 아시겠지요? 제게 5급 미만 관리의 감봉권이 있다는 거.”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총무부에서 올센 경한테 부당한 대우를 하다가 제게 들킨 것만 여섯 번입니다. 백화 기사단이 연락망에서 누락된 일은 셀 수도 없고요. 이제라도 모든 일을 원칙대로 처리한다면 다음달, 크로프트 공을 제외한 총무부 전원이 봉급을 걸러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크로프트의 인상이 팍삭 썩었다. 제 부하가 한 명도 빠짐없이 백화 기사단에 무례를 저지른 줄은, 크로프트도 잘 알았다. 총무부는 일반적인 사무를 맡는 곳이었다. 6급보다 높은 관리가 없었다. 한 부처가 여자 기사단장에게 당하여 깡그리 감봉당한다면 온 에브라힐의 웃음거리가 되리라. 이에샤는 ‘망신살 뻗치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해라.’ 하고 욱지른 것이었다.

이에샤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그럼, 저와 제 부관은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이만. 크로프트 공께서는 천천히 나오시지요.”

할 짓 없는 놈. 에둘러 까 주고, 미엘라의 팔짱을 끼었다. 미엘라가 “앨저 경?” 하며 놀랐다. 이에샤는 기분이 좋았다. 미엘라를 이끌었다. 발걸음도 가볍게 중회의실의 문을 지나쳤다. 미엘라도 어쩔 수 없이 웃으며 이에샤와 보조를 맞추었다.

* * *

푸른 사자 성의 하녀는 다소곳했다. 재잘거리기 좋아하는 알디온 하녀들과는 딴판이었다. 알디온에서도 셀더리의 앞에서는 숨을 죽였지만, 밀레나만 있을 때는 분위기가 풀어졌다. 밀레나는 푸른 사자 성에 올 때마다 고용인의 몸가짐을 보며, 태생적인 격차를 느꼈다. 황제의 동반자와 황녀가 다스리는 성. 화려하면서도 질척한 느낌이 감도는 알디온 저택과는 달랐다. 누구의 말마따나 제 집안에는 천박한 땟국이 끼었는지도 몰랐다.

응접실에 들어섰다. 하녀가 “마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하고 물러갔다. 보통은 주인이 기다리다가 손을 맞아야 했으나, 밀레나가 불쑥 찾아온 터였다. 엘로나가 만나 주는 일만도 다행이었다. 엘로나가 연 모임에는 여러 번 나갔지만 독대하기는 처음이었다. 밀레나는 긴장하지 않았다. 엘로나 멘델린은 철 지난 꽃이었다.

옛날이었다면 푸른 사자 성의 문을 두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리라. 엘로나의 농익은 미모에 기죽고, 황제의 누나라는 출신에 짓눌렸을 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엘로나보다 아름답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기름칠을 잘한 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 슬리퍼에 싸인 발이 양탄자를 디뎠다. 엘로나는 허리를 조이거나, 스커트를 부풀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늘어지는 비취색 드레스를 입었다. 깊게 팬 가슴도 관능적이라기보다 편안해 보였다.

“레이디 엘로나.”

어디에서나 레이디로 불리는 여자는 많지 않았다. 엘로나 알타로샤 황녀는 손짓 한 번에 제국을 취하게 했던 여인이었다. 멘델린 공작 부인이 된 지금도 사람들은 그녀의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사랑을 담아 레이디라고 일컬었다. 요즈음은 ‘레이디 밀레나’라는 호칭도 늘어나는 중이었다.

“어서 와요, 알디온 영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말도 없이 찾아와서 폐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영애는 함부로 어른을 놀릴 말괄량이가 아니지요. 내 오수를 깨운 이유가 있으리라 믿어요.”

엘로나가 안락의자에 앉았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기품이 깃들었다. 밀레나는 엘로나 또한 저처럼 필사적으로 ‘고상하게 구는 방법’을 연습했을까 궁금해졌다.

“곧 차를 내올 텐데 어떡할까요? 그때까지 수다를 떨까요, 아니면 용건부터 들어 볼까요?”

“……그럼 용건부터.”

“영애답지 않게 서두르는군요.”

엘로나가 후후 웃었다.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낮잠에서 깨어 버려, 나른한 모양이었다. 상앗빛 털을 지닌 날렵한 보르조이가 쉬는 것만 같았다. 밀레나는 침으로 입안을 축였다. 오늘은 아양을 떨러 오지 않았다. 협상하러 온 것이었다. 실수해서는 안 되었다.

“먼저 얼마 전 티 파티에 참석하지 못한 점을 사죄드려요.”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어요. 에브라힐에서도 쓰러졌다면서요? 건강이 우선이니 괘념하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실은 그, 에브라힐에 간 날. 기이한 광경을 보았답니다.”

엘로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밀레나는 실크 장갑을 낀 손으로 깍지를 끼었다. 단숨에 말했다.

“엘테르트 님이 제 이복언니와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요.”

깜빡. 홍차 색 눈동자가 눈꺼풀에 덮였다가 드러났다. 엘로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헤아리듯이 밀레나를 훑어보았을 따름이었다.

“알디온 영애. 영애가 에르디와 함께 나갔던 신년맞이 무도회 날을 기억하나요?”

“그날과는 반대로 엘테르트 님이 언니의 손을 잡아 이끌었습니다.”

“……그렇군요. 에르디가.”

느릿하게 “에르디가 그랬단 말이죠.” 하고 되뇌었다.

이에샤 앨저를 떠올렸다. 딱 한 번 만나 본 여인이었다. 수레국화궁 대연회장에 거리낌 없이 바지를 입고 나타난, 제국 최초의 여자 기사. 애버토스는 기개 있고 영리한 아가씨라며 좋아했었다. 엘로나도 싫지 않았다. 엘테르트의 험담―천둥벌거숭이 같은 여자―을 듣고 어떤 왈패인가 했는데, 반듯하게 예의를 차릴 줄 알았더랬다.

하지만 엘테르트와 이에샤가 깊은 사이로 묶일 수는 없었다. 멘델린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기에는 기울어도 한참을 기우는 여자가 아닌가.

“그 사실을 알려 주러 찾아온 건가요?”

“아뇨, 지금까지는 용건을 꺼내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를 전달 드렸을 뿐입니다. 저는 레이디 엘로나께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부탁?”

엘로나가 낱말을 되받았다. 밀레나는 주황색과 붉은색 연지로 섞어 칠한 입술을 오므렸다. 숨을 골랐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레이디 엘로나.”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밀레나는 마음속으로 실소했다. 긴장하지 않았다고 여겼건만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부터 꺼낼 이야기는 한평생 숨긴, 자기 자신도 뚜렷하게 생각하기를 피해 온 진심이었다. 막혔던 숨을 탁 뱉어 냈다.

“저는, 남자가 싫습니다.”

============================ 작품 후기 ============================

* 휴재 공지 *

건강이 너무 많이 상해서 며칠 쉽니다.

8일에 검진받고 결과가 나와야 몸이 왜 이러는지 알 거 같지만...(^^;)

일단은 일주일 정도만 쉬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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