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0 11. 파국 =========================
타르트 한 조각을 밀어 주었다. 시더가 눈을 끔뻑였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얼떨떨했다. 이에샤가 가리킨 자리는 황태자나 소공작이 찾아와 앉는 의자였다. 내준 음식은―제 작품이었지만―최고급 식재료로 만든 귀족의 것이었다. 시더는 침착하게 섰다. 이에샤의 눈치를 살폈다.
“앨저 경. 제가 뭔가 실수한 일이라도,”
“트집 잡아서 매질하는 악취미 없어.”
이에샤는 뚱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셀더리가 언짢을 때 하는 짓이었다. 아랫것 중 신참을 구슬려서 자리에 앉혀 놓고, 버릇없다며 회초리를 드는 폭거. 시더는 미심을 거두지 못했다. 이에샤는 부아를 느꼈다. 귀족으로서의 체면을 집어던지며 권했건만 받아들이지 않다니.
고개를 털었다. 이에샤의 호의에 시더가 응할 필요는 없었다. 시더는 보통 하녀였다. 약하고, 하잘것없는. 억지로 주저앉힌다면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샤는 담론적으로 생각하지는 못했으나, 백화 기사로 일하며 쌓은 경험이 외쳤다. 생떼를 부려서는 안 되었다. 싫다는 여자를 물고 늘어지는 남자처럼.
한숨을 내쉰 참이었다. 시더가 조심스럽게 응접 소파에 앉았다.
“역시 비싼 의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엄청 푹신푹신해요!”
“괘, 괜찮아? 껄끄러우면 억지로 앉을 거 없어.”
“앨저 경이 절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란 것쯤은 처음부터 알았어요. 너무 뜻밖이라서 잠깐 망설인 거예요. 죄송합니다.”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에샤는 문득 떠올렸다. 몇몇 사람―엘테르트, 루시온, 체사로, 라제카―과 함께 시더는 백화 기사단장으로서 입궁한 날부터 알고 지낸 인연이었다. 열한 달하고도 스무 날을 같이했다. 석곡궁에 인적이라고는 없던 시절, 시더만이 이에샤의 사무실을 치우고 옷을 빨고 간식과 차를 만들어 주었다.
포크는 하나뿐이었다. 시더는 타르트 시트를 잡고 들어 올렸다. 제가 만든 레몬 타르트를 베어 먹었다.
“곧.”
“예?”
“나랑 너랑 만난 지 1년이야. 시간 참 빠르구나 싶어서.”
“아! 그러네요. 백화 기사단은 새해 첫날에 출범했으니까. 올해는 운수대통이었어요. 1년 내내 완전 편하게 일했네.”
“편하게?”
이에샤가 되받아 물었다. 멈추었던 포크질을 시작했다. 시더는 입가에 묻은 머랭을 엄지손으로 훔쳤다. 입을 오물거리다가 꿀꺽, 목울대를 울렸다.
“텃세 부리는 선배 없죠, 가르쳐야 할 후배 없죠, 복장 검사하는 하녀장님도 없잖아요. 모셔야 하는 앨저 경은 첫날부터 친절하셨고요.”
“뭐? 내가? 너 혹시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거 아니니?”
시더는 피식했다. 종이 윗전을 처음 만나면 대체로 두 가지 처우를 받을 수 있었다. 길을 들이겠답시고 트집을 잡아 대거나, 천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무시하거나. “일 잘하렴.” 하고 말해 주는 주인은 엄청나게 좋은 사람에 들었다.
에브라힐에 여자 기사가 생긴 새해 첫날. 이에샤는 제 이름부터 가르쳐 주었다. 잘 부탁한다고 인사했다. 첫인상은 매섭고 무뚝뚝했으나, 시더는 이에샤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친절하셨어요.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친절하세요.”
“완전히 잘못 봤단다. 나 그렇게 정 많은 사람 아니라고 했잖니.”
“그을쎄요. 앨저 경은 제가 모신 나리 중 제일 다정하신데요? 그리고 멋있어요. 그저 그런 남자들보다 앨저 경 쪽이 훨씬 신사적이에요.”
“……관두자.”
이에샤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귓바퀴가 발그레했다. 시더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하는 사이 타르트 한 조각을 먹어 치웠다―시더가 한 조각 먹는 동안 이에샤는 세 조각을 해치우고 마지막 타르트에 포크를 찔렀다. 하얀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휴게실 청소가 아직이에요. 가 볼게요. 간식 감사합니다, 앨저 경!”
“네가 만든 건데 너한테 인사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해.”
“그러게요. 제가 말해 놓고도 좀 웃기네요.”
이에샤도 시더가 무어라 감사해야 알맞을지는 떠올릴 수 없었다. 시더가 머리를 꾸벅했다. 왜건 손잡이를 잡았다. 바퀴를 추슬러서 방향을 틀었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에샤는 한동안 묘한 눈길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시더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옛날보다 친절해졌다고. 내가.”
입맛이 썼다. 이에샤를 칭찬해 줄 사람은 곁에 없었다.
엘테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무실 문을 연 참이었다. 응접 소파에 앉았던 밀레나가 우아하게 일어나 섰다. 꽉 조인 허리와 알맞게 부풀린 치마가 한 송이 꽃 같았다. 흰색과 푸른색 수정을 별처럼 꿴 치마폭이 신비로웠다. 보디스 아래에 비단 끈을 감아, 나비매듭을 지었다. 창으로 들이친 햇살과 명주실의 광택이 뒤엉켰다. 수선화가 미인으로 화한 양 아름다운 자태였다. 엘테르트조차 일순간 감탄했다.
“안녕하십니까, 영애. 인사하자마자 외람됩니다만, 자꾸 사무실에 찾아오면 곤란하다고 말한 줄로 아는데요.”
“안녕하세요. 멋대로 들어온 점 죄송합니다, 엘테르트 님. 므엘 공께서 여기로 안내해 주셔서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밀레나는 물 흐르듯이 대답을 얼버무렸다. 엘테르트는 ‘미치겠군.’ 하고 생각했다. 싫증이 났다. 밀레나 알디온은 기막힌 눈치로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어 주는 아가씨였다. 엘테르트의 말이 축객임을 모를 리 없었다. 밀레나가 송악궁에 얼굴도장을 찍기 시작한 지 열흘. 엘테르트는 드물게 사람에게 노여움을 느꼈다.
남자의 손으로 여자를 몰아내기는 힘들었다. 손님―일단은―을 무시해도 도리가 아니었다. 밀레나가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밀레나의 건너편에 앉았다. 밀레나도 도로 몸을 내렸다. 엘테르트는 “무슨 차를 좋아합니까?” 같은 상투적인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너그러워 빠진 엘테르트의 참을성도 한계에 다다랐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퍽 이상했다. 밀레나는 생글생글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엘테르트 또한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실지로 밀레나는 엘테르트에게 할 이야기가 없었다. 제 언니에게 마음을 준 남자가 아닌가. 사랑을 얻으려고 화젯거리를 쥐어짜 보아야 헛물이었다. 자신은 엘테르트에게 뚜렷한 인상을 새기기만 하면 되었다. 비위를 건드리고 몰아붙여, 이성을 둔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엘테르트가 감추려 애쓰지도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느 때의 엘테르트라면 상상조차 못 할 행동이었다.
“알디온 영애.”
“말씀하셔요.”
“돌아가 주십시오.”
적나라한 말이 튀어나왔다. 밀레나의 눈매가 반달꼴로 휘었다. 아리따운 웃음이었으나, 엘테르트는 신물만 느꼈다. 밀레나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을 양옆으로 펼쳤다. 까딱 무릎을 구부렸다. 인사말은 더하지 않는 약식 절이었다. 몸가짐새에 빈틈이 없었다. 언니인 이에샤는 떨어지는 느낌으로 몸을 낮추거나, 고개의 각도가 미세하게 높기도 했다. 이에샤뿐이 아니었다. 뭇사람이 그러했다. 밀레나처럼 완벽한 예법을 펼치는 이는 드물었다.
“뵈었으니 돌아가겠습니다.”
“…….”
“평안한 하루 되시길.”
밀레나는 사뿐사뿐 걸었다. 엘테르트의 사무실을 나갔다. 날마다 똑같았다. 불쑥 찾아오거나 엘테르트가 자리를 비웠으면 들어앉아 기다리다가, “돌아가십시오.” 하고 말하면 돌아갔다. 버티려고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얼떨떨했고,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지긋지긋해졌다. 송악궁 관리자에게 밀레나를 들여보내지 말라고 일러도 소용없었다. 어떻게 구슬린 것인지, 다른 관료들이 도와주었으므로.
엘테르트는 밀레나의 마음을 알았다. 오래전부터 느꼈다. 밀레나 알디온이 저를 어떠한 눈길로 보는지. 무엇을 바라는지도. 엘테르트에게는 익숙한 열망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철부지 영애처럼 구는 까닭은 알 수 없었다.
밀레나를 유별하게 대한 적은 없었다. 신년맞이 무도회에서 파트너가 되어 주기는 했지만, 숙녀의 평판과 명예를 배려했을 따름이었다. 그 일로 사람들은 둘을 묶어 이러쿵저러쿵해 댔다. 밀레나가 사교계를 거머쥐자 멘델린과 알디온이 혼담을 주고받는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에샤가 엘테르트의 총희라는 이야기마저 더해지니, 엘테르트가 알디온의 두 딸을 가졌다는―입에 올리기조차 모멸스러운―염화(艶話)가 완성되었다. 그러던 차에 밀레나 본인이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엘테르트는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사무실에서 이에샤와 밀레나가 마주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오해를 살지 몰랐다. 골치가 아팠다. 엘테르트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숨을 내뽑았다.
‘곤란하군. 어머님 일도 그렇고.’
밀레나가 엘로나에게 이에샤와의 사이를 흘린 자이리라. 엘테르트는 꿰뚫어 보았다. 그날 푸른 사자 성에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엘로나가 입단속을 시킨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에샤가 쓰러진 밀레나를 볶아쳤던 날, 손잡는 모습을 들켰다. 요즈음의 이상 행동까지 더하면 훼방꾼의 정체는 빤했다.
엘테르트는 밀레나를 탓하지 않았다. 부질없었으므로. 왜 폭로했냐고 화내 보아야 “전 레이디 엘로나께 제가 본 아드님의 근황을 전해 드렸을 뿐이에요. 그 일로 무슨 탈이라도 생기셨나요?” 하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밀레나의 고자질은 도의적으로 문제될 점이 없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듯싶었다. 엘테르트는 한참―5분 남짓―을 우두커니 앉아 보냈다. 더는 휘둘릴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흠칫 놀랐다. 밀레나가 돌아왔는가 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다른 관료나 손님일 터였다. ‘밀레나 알디온 노이로제’라도 생긴 기분이었다.
들어오시오! 목청을 돋워 말했다. 문짝이 안쪽으로 밀렸다. 회색 머리카락이 햇살에 부딪혀, 한순간 하얗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멘델린 경.”
“……앨저 경?”
인상을 팍삭 구긴 이에샤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엘테르트는 당황했다. 튕기듯이 일어섰다. 문 앞으로 달려갔다. 이에샤의 허리에 한쪽 팔을 둘렀다. 응접상으로 이끌었다. 이에샤는 익숙하게 에스코트를 받아들였다. 언제인가부터 당연해진 광경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군요.”
“입구에서 짜증 나는 사람이랑 마주쳐서요.”
밀레나가 틀림없었다. 엘테르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밀레나가 자신을 보고 가는 줄은 들키지 않은 성싶었다.
이에샤가 무심히, 밀레나가 차지했던 자리에 앉으려 했다. 엘테르트는 움찔했다. 이에샤의 손목을 붙잡았다. 팔짓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자리는 옆에서 곧바로 볕이 들이치잖습니까. 오래 앉으면 뜨겁습니다.”
“저기, 고맙지만 제가 경보다 몇 배는 튼튼해요.”
“내가 마음에 밟혀서 그럽니다. 이쪽에 앉아 주십시오.”
거짓말은 아니었다. 기분의 문제가 맞았다. 앙숙이 닿았던 곳을 만지고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엘테르트는 이에샤가―모르는 채라고 해도―밀레나와 얽히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신이 이에샤라면 싫을 테니까. 이에샤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낯으로 엘테르트가 권해 준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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