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1 11. 파국 =========================
엘테르트는 티세트가 놓인 진열대로 다가갔다. 송악궁 4층에는 하인은 물론, 엘테르트의 보좌관조차 머무르지 않았다. 손수 차를 우리고는 했 했다. 찻잎이 담긴 상자를 열었다. 계량스푼으로 적당량 펐다. 찻주전자에 집어넣었다. 슈가볼을 열었다. 안에는 설탕이 아니라, 투명한 구슬이 들어찬 채였다. 구슬 한 알을 주전자 속으로 떨어뜨렸다. 물이 차올랐다. 뽀얀 김이 피어올랐다. 엘먼이 이에샤에게 대접했던 티스톤과 같은 아티팩트였다. 이에샤는 엘테르트가 모래시계를 뒤집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의논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백화 기사단은 달리 큰일이 없는 줄로 아는데요.”
“한창 바쁠 시기에 걱정을 얹어 드리는 거 같아서 면구해요. 그래도 말씀드려야 하지 싶어서요.”
“무엇입니까?”
어떻게 말머리를 꺼내야 할까. 고민에 잠겼다. 그사이 모래가 호리병 아래에 쌓였다. 엘테르트는 예스러운 민무늬 찻잔에 스트레이너를 얹었다. 찻잎 섞인 찻물이 쪼르륵 흘러나왔다. 고운 담갈색이 제 눈동자 빛깔과 같았다. 컵받침에 찻잔을 올렸다. 이에샤에게 가져다주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꾸벅하고, 말문을 열었다.
“내년 신년맞이 무도회 때문이에요.”
“무도회요?”
“페리튼 경한테 신경 쓰이는 얘기를 들었어요.”
찻물로 호로록, 혀를 축였다. 엘테르트는 차도 잘 끓였다.
“매년 무도회 사각지대에서 그,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군요. 신년맞이 무도회에 참여하고 싶어서 지방에서 올라온 영애한테 독한 술을 먹이는 남자가 있대요. 그리고 휴게실로 데려간다고.”
“예? 그게 무슨!”
엘테르트의 정강이가 상다리에 부딪혔다. 그야말로 펄쩍 뛰어올랐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네세라가 헤아린 대로, 엘테르트는 까맣게 몰랐던 모양이었다. 네세라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희귀종이시니까요.” 하고 평했다.
엘테르트는 청년층과 어울리지 않았다. 철모르던 시절부터 애버토스를 따라다녔다. 만나는 사람도 나이 지긋한 대귀족이 대부분이었다. 춤은 자주 추었으나, 몸끼리 달라붙는 왈츠를 추면서도 대화는 드물었다.
“수도의 젊은 남녀한테는 공공연한 비밀이래요.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영애는 중부에 연고가 없으니 고발하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더군요. 매년 꼭 한 번은 벌어지는 일이라는데, 경은 모르셨나 봐요.”
“…….”
“그래서 페리튼 경은 신년맞이 무도회가 끔찍하다 했습니다.”
이에샤가 설명을 마쳤다. 엘테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충격적이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신이 보지 못했다고, 거짓말이라고 부정해서는 위험했다. 엘테르트는 그 이치를 열 살도 되기 전에 깨달았다. 거들먹거리는 제국 기사나 문관을 생각하면 있음 직한 일이기도 했다. 이마를 짚었다. 황제가 베푸는 대연회에서 음행이 벌어져 왔다니. 욕지기가 솟았다.
“멘델린 경.”
“앨저 경과 스란 경 둘만으로 수레국화궁을 감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에샤의 뜻이라면 눈치챘다. 경비를 서는 기사에게는 행사 참가자의 행동을 막아설 권한이 주어졌다. 제국 기사단에서 인력을 뽑듯이, 백화 기사도 수레국화궁에 배치해 주기를 바랐으리라. 이에샤는 우중충한 낯빛을 지었다. 저도 알았다. 겪어 본 신년맞이 무도회는 으리으리했었다. 내년은 올해보다 성대하다고 했다. 두 명은커녕 스무 명으로도 버거울 터였다.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역시 어렵습니까? 어떻게 좀 안 될까요?”
“페리튼 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까?”
“머리 좋은 애인 뒀다가 어디다 쓰냐며 절 보낸 거예요.”
엘테르트는 겸연해졌다. 뺨이 달아올랐다. 이에샤와 제가 연인이라는 사실을 남에게 들으면, 묘하게 근지러웠다. “흠흠.” 하고 헛기침했다. 이에샤가―부끄러움도 무엇도 없는 낯으로―눈을 빛냈다. 엘테르트라면 묘안을 짜내리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엘테르트는 머릿속에서 ‘저렇게까지 귀여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몰아냈다. 고민을 시작했다.
떠오르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에브라힐에서 동원할 인력이 모자란다면, 바깥에서 데려오면 되었다. 알맞는 사람들을 알았다. 그러나 실행으로 옮기기에는 파격적이었다. 반발이 클 것이었다.
“검을 쓰는 여성은 모으기 어렵지만 남성을 물리칠 수 있는 여성들은 있지요.”
“예? 그게 무슨 소리에요?”
“달신교에 협력을 요청하면 어찌어찌 될지도 모릅니다. 달신의 신벌은 정말로 있으니까요.”
“아! 달신교 행사에 우리 기사단이 파견되는 모양새만 생각했는데, 뒤집어도 얘기가 되나요?”
이에샤가 낯빛을 밝혔다. 엘테르트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기뻐하는 연인에게 찬물을 끼얹기 싫었다. 귀족끼리 누리던 행사에 성직자를 부른다니. 쉽게 받아들여질 턱이 없었다.
“한 번 진행시켜 보겠습니다. 지나간 해에 벌어진 사건도 면밀히 조사하고.”
“미안해요, 지금이 제일 바쁠 땐데. 과거 일까지 조사하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이런 일을 맡으라고 내가 에브라힐에 있는 겁니다. 괘념하지 마십시오.”
이에샤는 치밀어 오른 말을 삼켰다. 엘테르트는 시간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수사에 매달릴 태세였다. 말릴 도리가 없었다. 응원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애써 주겠다고 해 주셔서 고마워요. 꼭 잘되면 좋겠네요. 원래 그런 일은 우리가 맡아야 할 텐데, 알잖아요. 사람이 없어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뒷날에 대비해 올센 경한테 수사관 교육을 시켜 볼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거 괜찮은데요?”
미엘라가 남자를 취조하고 신문하기는 어려웠다. 호위로 스란을 붙여 주면 알맞을 성싶었다. 미엘라뿐 아니라 네세라도 배우면 잘할 일이었다. 구색을 갖추어 간다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엘테르트가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로 백화 기사단이 정식 경비 인력에 들어간다면 앨저 경, 정복을 입어도 사람들이 쑥덕대지 못하겠군요.”
이에샤는 “아.”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엘테르트의 말대로였다. 1월에는 드레스를 마련할 돈이 없어서 기사단 정복 차림으로 나갔다. 따가우리만치 눈총이 쏟아졌었다. 이번에는 황실의 무관으로서 일하는 처지였다. 이상하게 보는 쪽이 잘못되었다.
“좋네요. 그럼 이제…….”
한숨을 내쉬었다. 볼일은 끝났다. 자리를 털어야 했다. 뭉그적거렸다가는 엘테르트에, 엘테르트의 보좌진까지 죽어날 터였다. 대화하느라 차는 입에 대지도 못했다. 훈훈한 정도로 식은 차를 몇 모금 들이켰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가 볼게요.”
“생각지도 못한 일을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날이 추우니 마차를 타고 얼른 들어가십시오.”
“추위 안 탄다니까요.”
소파에서 일어났다. 엘테르트는 아까처럼 이에샤를 감싸듯 섰다. 문까지 바래다주었다. 이에샤가 복도로 발을 디뎠다. 문득, 머리만 뒤돌렸다. 짙푸른 눈이 엘테르트를 아래위로 훑었다.
“앨저 경? 왜 그럽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홱 앞을 보았다. 복도 끝으로 나아갔다. 엘테르트는 고개를 기웃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책상으로 돌아갔다.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이에샤는 계단을 내려가며, 눈살을 찌푸렸다. 상념에 빠져들었다. 어째서 엘테르트는 밀레나와 만난 일을 숨겼을까? 사무실 가득 밀레나의 달콤하면서 우아한 향수 냄새가 떠돌았는데. 알 수 없었다. 엘테르트 쪽에서 털어놓기를 기다렸으나, 이야기가 끝나도록 듣지 못했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송악궁 어귀에서 마주쳤던 밀레나의 몰골이 떠올랐다. 얼굴빛이 백지장 같았다. 식은땀마저 흘렸었다. 이에샤조차 “넌 또 왜 여기 있어?” 하고 타박하지 못하고, 치료는 받았느냐고 물어보았다. 밀레나는 이에샤를 힐끗하고는 대답 없이 떠나 버렸다. 걸음새가 쓰러질 듯이 아슬아슬했다.
‘그런 상태로 멘델린 경이랑 무슨 얘기를 한 거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오스터는 딸에게 사업과 관련한 일을 시킬 남자가 아니었다. 심부름으로 온 것은 아니리라. 엘테르트는 귀족 사회의 모임에도 바쁘게 다녔다. 사교계에서 문제가 생겼는지도 몰랐다. 그 밖에 다른 까닭은 찾을 수 없었다. 이에샤는 ‘다음에 물어보면 말해 주겠지.’ 하고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에샤는 밀레나 알디온이 자기 자신을, 어디까지 억누를 수 있는지 몰랐다.
“후우! 제가 달신교 생각을 못 했다니. 자존심 상해요.”
네세라가 한쪽 뺨을 감싸 쥐며 투덜거렸다. 백화 기사들은 휴게실에 모여, 이에샤와 엘테르트가 나눈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네세라는 낙담한 듯했다. 가까이에 해결책을 두고도 떠올리지 못해서 분한 모양이었다. 미엘라가 초연한 미소를 지으며 “멘델린 경이랑 비교하면 우리 속만 상해요.” 하고 북돋웠다.
“신벌이란 걸 믿을 수는 있는 건가? 솔직히 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합니다.”
스란이 말했다. 이에샤도 같은 마음이었다. 알드릭 기즈의 재판에서 신벌을 써먹기는 했으나, 미심스러웠다. 해달신에게 헌금 한 번 해 보지 않은 두 사람은 신앙심이 바닥을 쳤다.
“신을 의심하는 사람이 늘어났다더니 여기도 있었군요. 하긴, 증거가 줄어 가고 있으니까요. 요즘은 무신론자라는 사람들까지 생겼대요.”
“그건 좀 사이비 같다.”
네세라는 신실한 신도답지 않게 비관적으로 이야기했다. 이에샤는 고개를 기울였다. 신은 있었다. 인류의 역사는 계시와 함께했다. 계시는 현실로 바뀌었고, 현실은 기록되었다. 성직자가 축복한 물건이 자연력인 마력을 성하게 해 주는 일만 보아도 분명했다. 이에샤와 스란은 신벌이 드문 까닭에, 달신교 사제가 남자들로부터 안전할지 걱정했을 따름이었다.
“달신은 소문처럼 쉽게 신벌을 내리지도 않고 심하게 처벌하지도 않지만, 멘델린 경은 다른 점에 주목하셨을 거예요. 달신께서는 음행과 간음을 증오하십니다. 그쪽에 한해서라면 정말로 흔해요. 저도 실제로 한 번 봤고.”
“봤다고?”
“예. 봉사를 따라나섰을 때, 스쳐 지나는 척하면서 사제님의 가슴에 손을 댄 개새끼, 죄송합니다. 남자가 있었어요. 곧바로 그 미친놈, 아, 죄송. 그 사람의 손이 썩어 들어갔죠.”
이에샤가 눈을 치켜떴다. 믿기 힘들었다. 흥미진진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솟아오른다니! 여성으로 그려지는 달신이 인간 남자를 징벌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백화 기사가 되고 일 년, 이에샤는 남자에게 쌓인 앙금이 많았다.
“그러니까 개짓거리, 어머, 오늘따라 실수가. 그 음행의 대상이 평범한 시골 귀족이더라도, 달신의 딸이 막아서는데 멋대로 굴었다간 위험할 가능성이 크죠.”
“재밌네. 해신이 신벌을 내렸다는 얘기는 손에 꼽는데.”
“교단을 싫어하는 머저리 놈팡이들이 달신은 옹졸하다고 비아냥대기도 하지만요. 자기 딸아들을 나 몰라라 하는 해신 쪽이 무책임하지 않나요?”
“페리튼 경, 이젠 실수한 척도 안 하는구나?”
네세라는 입가를 가렸다. 눈매를 고혹적으로 휘었다. 상소리 따위 모른다는 웃음에, 이에샤는 한숨을 지었다.
============================ 작품 후기 ============================
* 예약 등록한 글입니다.
저 세계에는 신이 실존한다는 증거가 차고 넘치기 때문에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쪽이 사이비 취급을 받습니다. 작중에서 이 설정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통 자신이 없네요...orz
조금 뒤집어 말하면 명확한 증거 없이 신화가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라, 종교의 숫자가 극히 적어요. 해달신교 빼고는 두세 개쯤... 무교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신은 있겠지만 그 신이 내 신은 아닌...
(그럴듯한 말빨로 없는 신을 꾸며내서 무안단물을 팔아먹는 놈들도 있기는 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