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4 11. 파국 =========================
(연참 2/2)
“달이 기울어도 찬란한 해가 되시길!”
이에샤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네세라가 달려들었다. 이에샤의 목을 끌어안았다. 뺨에 입술을 붙였다. 가까운 사이에 나누는 새해 인사였다. 외친 것은 달신교의 신년맞이 인사말이었다. 이에샤는 얼떨떨해졌다. 이처럼 환영받기는 처음이었다. 에이릴리가 멀쩡하던 시절에는 딸의 뺨에 입 맞춰 주었을지도 모르나, 기억나지 않았다. 에이릴리는 이에샤가 세 살도 되기 전에 울병을 얻었다. 정확하게는 밀레나가 태어나고부터.
네세라의 어깨 너머로 같은 인사를 받은 듯한 미엘라와 스란이 섰다. 미엘라는 쑥스러워 보였고, 스란은 질린 낯을 했다. 이에샤는 네세라의 등을 도닥였다. 가볍게 떼어 냈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왜 여기에들 모여 있어?”
비옷을 옷걸이에 걸었다.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진눈깨비가 가루눈으로 바뀌었다. 석곡궁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날씨가 맑아졌다.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쌓인 눈이 얼 성싶었다. 얼음판은 진창길보다도 골치 아팠다. 에브라힐 곳곳에서 ‘어떻게 퇴궐해야 하나.’ 하는 탄식이 새었다.
이에샤는 동떨어진 사람처럼 느긋했다. 자기 마차도 없었고, 역마차가 달리지 않는다면 걸어서 돌아가도 되었다. 브링어인 이에샤에게 밤길은 두렵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참이었다. 미엘라가 책상으로 다가왔다. 파란색 끈으로 어귀를 동여맨,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영년 과자예요. 어젯밤에 스란 경이랑 같이 구웠어요.”
“스란 경이랑? 과자를?”
“힘이 세셔서 반죽이 빨리 되더라고요.”
반죽 말고는 한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스란은 뻔뻔스럽게 “맛있을 겁니다.” 하고 장담했다. 델페레타에는 신정에 말린 과일이나 잼이 들어간 과자를 주고받으며, 올해에도 잘 부탁하노라 인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에샤는 미엘라로부터 과자 봉투를 받아 들었다. 낯선 기분이 들었다. 이러한 일은 셈브리온과도 해 보지 않았다. 답례품을 준비했을 턱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알리사가 오늘 쿠키를 구워 오겠다고 했나? 영년 과자 말하는 거였구나.’
알리사는 여느 때에도 군음식을 잘 만들어 주었다.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겼었다. 돌이켜 보니 영년 과자를 일컬었던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머쓱해졌다. 올해는 새로운 경험투성이였다. 연인이 데리러 온 출근길이며, 부하들의 선물이며.
“고맙긴 한데 내가 준비한 게 없어. 당장 보답하기가 힘들어.”
“보답은요. 가볍게 챙기는 연례행사인걸요.”
“맞아요! 저도 과자까지는 준비 안 했어요.”
네세라가 떳떳하게 말했다. 이에샤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무언가를 받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갚아야만 하는지 고민스러웠다.
백화 기사들은 떠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샤는 눈만 멀뚱멀뚱했다. 책상에 쌓인 서류로 손을 가져갔다.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움찔, 손을 거두어들였다. 자신이 실수라도 저질렀나 싶었다. 스란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새해 기념도 좋지만, 오늘은 백화 기사단 출범 일 주년 아닙니까. 앨저 경은 아무런 감흥도 없으십니까?”
“……그다지?”
“앨저 경한테 축하 파티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지만요, 단장으로서 소감 한 말씀도 안 하고 넘어가시면 섭섭하죠.”
이에샤는 당황했다. 네세라의 말대로였다. 축하할 계획은 떠올리지도 못했고, 별다른 소감도 없었다. 일 주년이라는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요사이 밀레나 때문에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해가 바뀌는 데에 뜻을 부여하지도 못할 정도로. 쩔쩔매며 낱말을 쥐어짰다.
“고생 많았어. 지난 한 해 백화 기사단이 잘 굴러간 건 경들 덕분이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정도면 됐어?”
“상투적이네요.”
“앨저 경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시더랑 제가 간단하게 음식 몇 가지 준비하기로 했어요. 우리 휴게실에서 자축해요.”
“술도 마셔도 되나?”
“근무 중에 무슨 술이에요. 스란 경은 어제도 맥주를 그렇게 마셔 놓고!”
스란이 입맛을 다셨다. 이에샤는 내심으로 찔끔했다. 저도 자축하자는 이야기를 듣고 포도주부터 떠올렸으므로.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새해라고 들뜨는 사람들이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어울려도 좋을 성싶었다. 백화 기사들이 하자는 대로 휩쓸리다가 단장으로서 공치사만 해 주면 되었다.
“이따 점심때 휴게실에 모이기로 해요. 그 전까지 일은 되도록 끝내 놓자고요.”
“전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연무장의 눈이나 치워 놓겠습니다.”
사무실은 삽시간에 비어 버렸다. 이에샤는 눈만 끔뻑였다. 폭풍이라도 휘몰아치고 간 기분이었다. 오늘 같은 신정은 처음이었다. 셈브리온이 빠진 자리에, 차오르는 것들이 있기는 있었다. 픽 웃었다. 서류 더미의 꼭대기에서 종잇장을 끌어왔다.
이에샤의 손길이 우뚝 멎었다.
“…….”
짙푸른 눈동자가 굴렀다. 서류를 읽어 내렸다. 희누런 종이에 길지 않은 내용이 쓰였다. 한 달을 기다린 공문치고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눈길이 종이 끝자락, 작성자란에 닿았다. 붉은색 봉랍으로 도장이 찍혔다. 사자 머리가 달린 히터 실드와 비스듬하게 건너지르는 두 자루의 검. 제국 기사단의 표지였다.
체사로는 이를 압인하며 어떠한 기분이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조금 미안해졌다. 이에샤가 입궁한 뒤 체사로는 십 년쯤 늙은 듯싶었다. 이번에도 ‘다 때려치우고 싶은데 후임이 없어서 참는다.’ 하는 표정으로 도장을 찍어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제2 기사단부터 6 기사단까지, 다섯 개의 제국 기사단이 소견을 모아서 쓴 경위서에는 개소리가 구구절절했다―근위 기사는 입단 시험의 경비로 총동원되었었다.
“백화 기사단장의 명령은 비조직적이라 전달 체계가 극히 허술했으며, 그러한 원시적인 하달에 따르지 못한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라고.”
이에샤가 형식과 절차를 무시했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에샤의 명령은 고함에 지나지 않았다. 글렘의 공격을 막으며 점잖게 협조를 요청할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과실을 인정하기는커녕 이에샤의 탓으로 돌리는 짓거리는, 아등바등했다면 차라리 괜찮았을 터였다. 가져다 붙인 이유에 공들인 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철저하게 깔보인 기분이었다.
제국 기사단의 경위서―라고 부를 수 있다면―아래에는 총무부 것도 깔렸으리라. 들여다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던지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마른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등신들.”
사납게 씹어뱉었다. 서명란의 빈 자리에 ‘I.Alger’ 하고 써넣었다. 서랍에서 놋쇠 도장과 봉랍을 찾았다. 성냥도 꺼냈다. 수지를 녹여서 떨어뜨리는 손길이 신경질적이었다. 도장을 쾅, 눌러 찍었다. 꽃송이 가운데에서 솟아난 단검 무늬 표지가 오늘따라 꼴 보기 싫었다.
노기를 누르기가 힘들었다. 애꿎은 머리카락만 헤집던 차였다. ‘똑똑’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어 문이 열렸다. 이에샤는 어리둥절해서 미엘라를 쳐다보았다.
“앨저 경, 저기, 경한테 서찰이 왔어요.”
“서찰? 전령이 아니라?”
“네에.”
미엘라가 작고 납작한 바구니에서 편지봉투를 들어 보였다. 이에샤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택도 아니고 석곡궁으로, 황궁 밖에서 편지가 도착하다니. 짚이는 바가 없었다. 미엘라가 눈치를 살펴 왔다. 조마조마한 기색이 뚜렷했다. 이에샤는 발신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오스터 알디온?”
“밀레나 알디온 영애예요.”
“걘 또 왜…….”
손짓을 까딱까딱했다. 미엘라가 다가왔다. 책상으로 편지를 옮겼다. 이에샤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새하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Aldion, Milena’라는 글자가 늘어섰다. 어렴풋하게 밀레나의 필체가 떠올랐다. 곡선이 많아서 우아한 모양새였었다. 눈앞의 이름은 편집증이 엿보이리만큼 반듯반듯했다. 누가 써 주었는지 몰라도, 기분 나쁜 글씨였다.
미엘라가 머리를 꾸벅했다. 이에샤는 인사하지 않았다. 밀레나의 편지에 신경이 쏠린 탓이었다. 미엘라가 뒷걸음질로 물러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페이퍼 나이프를 꺼내기도 귀찮았다. 우악스럽게 봉투 모서리를 찢었다.
반듯한 필체로 글줄 몇 개가 이어졌다.
「이에샤 언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나를 좀 보러 와 줘. 아버지께도 허락받아 놨어.
지난번처럼 언니를 괴롭히지 말라고도 말씀드렸어.
754년의 첫날, 언니의 동생 밀레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날짜로 미루건대, 집배국을 통해서 온 편지가 아니었다. 속달로 부치더라도 같은 날 아침에 도착할 수는 없었다. 사람을 시킨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밀레나가 그토록 저를 찾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턱을 어루만졌다. 생각에 빠져들었다. 열흘 동안 알디온 저택에 가 볼까, 말까 고민했다. 저쪽에서 불렀으니 잘된 일이었다. 내키지 않는 척 찾아가면 되었다. 마음을 굳히지 못하는 까닭은 밀레나의 불행 때문이었다. 지금 밀레나는 끔찍하게 가엾은 처지였다. 이에샤는 제가 밀레나에게 폭언을 퍼붓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헤아려 보았다.
‘여기고 저기고, 사람 귀찮게.’
책상 서랍에서 종이와 편지봉투를 꺼냈다. 알았다는 답과 며칠 뒤의 날짜를 휘갈겨 썼다.
미엘라의 타박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백화 기사단 일 주년 기념 파티에는 술이 함께했다. 네세라가 오늘을 위하여 값비싼 백포도주―페리튼 자작의 컬렉션―에, 어울리는 유리잔까지 챙겨 왔으므로. 미엘라는 귀족인 네세라를 핀잔하지 못했다. 표정으로만 ‘제정신이에요?’ 하고 나타냈을 따름이었다. 네세라는 깔깔 웃었다.
“우리가 내년 초에도 지금처럼 한가할 줄 누가 알아요?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죠.”
네세라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기사단이 커지면 다른 부처처럼, 연말연시에 지옥이 펼쳐질 터였다.
“그래서 앨저 경은 오늘 멘델린 경이랑 같이 오신 거예요? 같은 마차 타고?”
“그럼 같은 마차를 타지, 따로 타?”
“멘델린 남작님은 지인짜 자상하세요. 앨저 경은 좋겠다…….”
미엘라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꿈결에라도 잠긴 모양새였다. 스란이 미엘라의 손에서 유리잔을 낚아채 갔다. “쯧!” 하고 혀끝을 찼다.
“너 벌써 취했다. 주량도 허접한 녀석이 왜 그렇게 빨리 마시냐.”
“화이트와인은 빨리 마셔야 한다고 책에서 그랬거든요!”
“원샷을 하라고 써 있었을 거 같진 않은데.”
이에샤는 스란과 미엘라가 옥신각신하는 꼴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네세라도 “아무나 이겨라!” 하며 박수했다. 이에샤와 네세라의 허락을 얻고 자리에 낀 시더 또한 즐거운 낯빛이었다.
처음에는 파티에서 무엇을 하고 노는지 몰랐다. 시작하니 먹고 마시고 떠들면 그만이었다. 쉬웠다. 재미있었다. 칙칙한 생각들 따위는 날아가 버렸다. 셈브리온을 향한 그리움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밀레나의 불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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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곳에서 끊겼네요...
작중 시간 752년 9월에서 시작한 글이 754년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슬럼프가 온 건지 내글구려병이 온 건지 진행이 어렵네요...피로감이 큽니다...힘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