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6 11. 파국 =========================
이에샤는 눈을 치켜떴다. 밀레나의 목소리가 쓸쓸했다. 늪을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지독하게 애달팠다. 가없는 절망감이 배어났다. 이에샤조차 흠칫하리만큼. 한순간이나마 밀레나를 딱하게 여긴 제가 낯설었다. 고개를 홱 돌렸다. 밀레나가 보지 못하는 줄 아는데도, 부끄러운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았다. 진주색 캐노피를 타고 흐르는 빛무리에 눈길을 못박았다.
“언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언니랑 잘 지내고 싶었어. 친해지지는 못해도 보통 자매만큼은. 언니는 한 번도 믿어 주지 않았지만 정말이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왜 네 맘 몰라줬는지 따지려고 불렀어?”
“그런데 어느 날부터,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밀레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터뜨리듯이 뱉었다.
“언니가 너무 재수 없는 거야.”
‘재수 없다.’ 따위의 적나라한 말을 입 밖으로 내기는 처음이었다. 떠오른 낱말을 음성으로 바꾸는 데 거리낌이 컸다. 열일곱 해 동안 자신을 다그치고 억눌러 온 터였다. 옅은 욕지기마저 났다. 죄라도 지은 양 불안스러웠다. 해방감과 죄악감이 뒤엉켜, 속을 어지럽혔다.
“9월 14일 말이야.”
“그 날은…….”
“언니 어머니 기일이잖아. 해마다 잊지 않고 챙겼는데, 작년에는 그냥 넘어갔어.”
이에샤의 양미간이 죄어들었다. 밀레나가, 에이릴리가 죽은 날을 기억했다니. 이에샤조차 이제는 에이릴리를 추모하지 않았다. 9월 14일도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보냈다.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지.’ 하고 한 번 떠올릴 따름이었다.
밀레나는 추도문을 적어, 해신교 사원에서 태우고는 했다.
“언니가 싫고 언니 어머니가 싫어졌거든.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아닌 날처럼 그렇게. 지나쳐 버렸어.”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우리 엄마는 네가 죽인 거나 다름없는데.”
“믿지 않아도 돼. 하지만 언니, 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처음 돌아온 기일. 내가 꽃을 꺾어다 줬잖아.”
이에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억났다. 밀레나가 에이릴리의 첫 기일에 하얀 꽃을 꺾어다 주었더랬다. 이에샤는 그것을 내팽개쳐 버렸다.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밀레나는 지치지도 않고 이에샤에게 꽃이니 인형이니를 가져다주었다. 이에샤는 한 번도 받아 주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우리 엄마를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감사라도 해 주길 바라?”
“아니야.”
“그럼?”
“날 좀 도와줘, 언니. 제발.”
밀레나가 양손으로 낯을 감싸 쥐었다. 벌어진 손샅에 물기가 괴었다.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손바닥 아래로 스며 나온 눈물이 이에샤에게는 보였다. 이에샤는 불 꺼진 방에서도 빛과 윤곽을 구분하는 제 시력이 원망스러워졌다.
밀레나는 숨을 고르려고 애썼다. 이에샤에게―아니, 누구에게도―진심을 까뒤집기는 처음이었다. 곧게 부딪친다면 제 말을 들어줄지 몰랐다. 착한 동생의 탈 같은 것은 집어던진다면. 입을 열었다. 딸꾹질 탓으로 말소리가 떠듬떠듬했다.
“에, 엘테르트 님을 나한테 주면 안 돼?”
“얘, 밀레나.”
“난 이제 더는 예전처럼 살 수가 없어. 멀쩡한 집안에 시집가지도 못해. 지참금을 산처럼 싸 들고 형편없는 남자의 아내가 되거나 평생 집 안에 갇혀 살아야 할 거야. 하지만 내가 맹인이라도, 엘테르트 님이 계시면, 그럼 모든 게 괜찮아져.”
“너 바보니? 그럴 리가 없잖아. 멘델린 경이 무슨 신이라도 돼?”
“엘테르트 님은 상냥하잖아. 내가 앞을 못 봐도 무시하시지 않을 테고.”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타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지금 밀레나는 똑바르게 사고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가졌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어찌 이성을 지키겠는가. 이에샤는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은 남보다 못한 이복동생에게, 연민을 느꼈다. 밀레나가 불행해지기를 바라기는 했다. 하지만 몸뚱이가 망가지라고 저주한 적은 없었다.
“멘델린 경이 무슨 주고받는 물건이니? 그 사람이 내 곁에 있는 건 그 사람 마음 때문이지, 내가 주인이라서가 아니잖아. 너한테 줄 수도 없고, 백 보쯤 양보해서 멘델린 경이 너 불쌍하니까 거두겠다고 하면? 공작 부부가 가만있겠어?”
“알아. 나 같은 눈병신은 아무도 며느리로 원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엘테르트 님이라면……!”
“정신 좀 차려. 왜 이 지경이 되고서도 결혼 생각밖에 못 하는 거야?”
답답했다. 밀레나가 결혼에 목매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혼약이란 모래성 같은 것이었다. 오스터와 에이릴리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벨제아 노부인도 그러했다. 남자의 부속물이 되어 보아야 행복하지 않았다. 자기 삶은 오롯하게 자기가 지니고, 꾸려 나가는 편이 나았다.
이에샤가 알기로 밀레나는 회화에 재능이 있었다. 이에샤가 열두 살, 밀레나가 열 살일 무렵이었다. 셀더리의 초상화를 그리러 미술가가 찾아왔었다. 미술가는 깜찍한 밀레나에게 매료되었다. 쉬는 시간마다 정물화를 가르쳐 주었다. 밀레나가 그려 낸 꽃병은 그럴싸했다. 어린아이의 첫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미술가는 “귀족 아가씨로 태어난 게 아깝군요.” 하고 혀를 찼다. 신부 수업을 그만두고 화가를 꿈꿀 수는 없었을까? 이에샤는 밀레나에게도 다른 길이 있었으리라고 여겼다.
“지금 누구 부인 되고, 어느 집 며느리 되는 게 문제야? 그건 이미 물 건너갔잖아. 그럼 이제부터는 네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해야지.”
머릿속으로 낱말을 골랐다. 험한 말이 튀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지팡이 짚고 걷는 연습부터 시작해. 맹인들은 촉각, 후각, 청각만으로 일상생활이 된다더라. 그런 거 익혀. 계속 침대에서만 살 수는 없잖아. 그리고 혹시 아니? 시력이 돌아올지.”
“…….”
“난 네가 싫어. 싫다만, 밀레나. 네가 어디로 팔려 가듯 시집가서 천덕꾸러기로 인생 종 치길 바란 적은 없단다. 결혼은 포기하더라도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지, 새로운 길을 찾아.”
밀레나는 묵묵했다. 손을 내리지 않은 채 이에샤의 말에 귀만 기울였다. 이에샤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더는 할 말이 남지 않았다. 맹인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도 몰랐고, 위로와 격려를 건네기는 싫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어 주었으면 넘치도록 베푼 셈이었다.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밀레나의 고개가 인기척을 따라 움직였다. 눈물범벅인 얼굴이 드러났다. 이에샤의 가슴에서 섬뜩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새파란 눈동자에 빛이 깃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쿠아마린, 산 사람의 눈이 아니라 예쁜 돌멩이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언니 말이 맞아.”
속삭이는 듯한 뇌까림이었다. 이에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석연하지 않았다. 밀레나의 목소리는 받아들였다기보다, 체념한 것 같았다. 하나 “맞긴 뭐가 맞아?” 하고 따지기도 우스꽝스러웠다. 헝클어진 금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
“……그래. 잘 생각했어.”
이마로 흘러내린 잔머리를 쓸어 넘겼다. 피곤했다. 입만 움직였는데, 검을 수천 번 휘두른 뒤처럼 지쳤다. 문가로 향했다.
“정말로 더는 여기 있고 싶지가 않다. 갈게.”
지긋지긋하게 내뱉었다. 몸조리 잘하라는 말을 덧붙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조금 불쌍하다고, 친절하게 대해 주고 싶을 턱이 없었다. 밀레나가 어떠한 길을 찾고 어떻게 살아가든지 알 바 아니었다. 이에샤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어두운 방에서 빠져나갔다.
오스터가 괴로운 낯으로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짙푸른 눈동자 두 쌍에서 증오가 넘실거렸다. 이에샤는 오스터를 원망했고, 오스터는 이에샤―에이릴리도―를 혹덩이로 여겼다. 이에샤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두 번 다시 당신 딸이 날 부르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아버지한테 말본새가 그게 뭐냐? 못 배워 먹은 년!”
“애비 없이 자란 년이 이렇지 뭐.”
오스터는 손만 퍼들거렸다. 이에샤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대리석 테이블을 갈라 놓은 이에샤의 브링이 떠올랐다. 욕지거리하면서도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졸렬한 꼬락서니였다. 이에샤는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오스터를 무시하고, 왔던 길을 되밟았다. 복도를 나아갈수록 햇빛이 수그러들었다. 찬기가 피어올랐다. 아까와 같이 저택에는 오가는 사용인 한 사람 없었다. 아침 청소도 거른 모양이었다. 계단 여기저기에 먼지나 얼룩이 남았다.
이에샤는 뒤숭숭한 기분으로 알디온 저택을 뒤로했다. 이번이야말로 마지막 방문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델피르력 754년 1월 5일. 밀레나 알디온이 시력을 잃고 열여섯 날째였다.
수도 경비대에 알디온 후작의 신고가 접수되었다. 이에샤를 만난 이튿날, 밀레나는 자기 방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작품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라 분량이 애매하지만 잘랐습니다. 내일부터 며칠 쉽니다.
이제부터 조아라 쪽지를 확인하지 않을 셈이니 작품에 관해 질문이나 의견이 있으시다면 코멘트 or 트위터(@kipapa22)를 통해 주세요.
+)
지난 화에서 밀레나가 적극적으로 이에샤를 괴롭힌 것처럼 전달된 부분이 있는 듯하여...
밀레나는 이에샤를 의도적으로 왕따시켰다 -> X
밀레나는 이에샤를 괴롭히려고 못된 뒷공작을 펼쳤다 -> X
밀레나는 처세술이 무진장 좋았고 이에샤는 사회성이 끔찍하게 떨어졌다 -> O
밀레나는 자기가 울거나 사과하면 사람들이 이에샤를 어떻게 대할지 알았다 -> O
밀레나는 이에샤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이에샤가 곤란해질 정도로만 상황을 조절하며, 그것이 진심으로 이에샤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다 ->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