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9 11. 파국 =========================
“드디어? 조마조마했어요. 소식이 없어서.”
“그 폐쇄적인 곳에서 이례적으로 빨리 답해 준 겁니다. 공문 한 장 보내고 반년까지 기다린 적도 있거든요.”
엘테르트는 한숨지었다. 몇 해 전의 일을 떠올렸다. 수확제를 집행할 사제가 누구로 결정되었는지 알려 달라고 했을 때, 해신교에서는 이틀 만에 전령을 보냈다. 달신교는 한 달이 지나고야 답장을 부쳐 왔다. 속달조차 아니었다. 항의하자―태도는 타이르듯 했지만―“사람이 넘쳐 나는 해신교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하고 싸늘한 대답만 돌아왔었다.
해신교는 달신교를 남매로 일컬었다. 반면 달신교는 해신교에 날을 세웠다. 나름의 까닭은 있었다. 해신교는 달신교를 저희의 하부 조직처럼 대했고, 달신을 해신의 종속자로 여겼다. 해달신을 동등하게 보는 달신교로서는 고까울 수밖에 없었다.
엘테르트는 ‘달신교도 만민을 평등하게 돕는다면 교세가 불어날 텐데.’ 하고 생각했었다. 하나 백화 기사단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여성만을 상대로 하는 활동은 뜻깊고, 필요한 일이었다. 남녀를 가른다면 안락한 자와 박해받는 자로 나뉘었다. 둘을 똑같이 대할 수는 없었다. 달신교는 여성에게만 봉사함으로써, 기울어진 저울의 위쪽에 미약하게나마 추를 보태는 곳이었다.
“뭐, 좋아요. 우리한테만 개방적이면 됐지. 몇 명이나 오는지도 정해졌나요?”
“하급 사제 열다섯 명과 상급 사제 다섯 명, 책임자로 달의 여섯 딸 중 한 명을 보내겠다고 합니다.”
“달의 딸? 대사제 바로 아랫사람 아니에요?”
이에샤가 놀라서 물었다. 달의 여섯 딸이라면 대사제 다음가는 이들이었다. 그만한 고위 성직자의 축복은 억만금에 비견했다. 황태자궁에 펼친 결계 ‘불온의 장막’ 또한 해신교의, 달의 딸과 비슷한 성력을 지닌 사제가 도와 만든 것이었다. 달신교는 가뜩이나 잠잠했다. 달의 여섯 딸은 일생에 한 번도 만나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예. 마침 브로칸 대사원에 머무르던 한 사람이 중부로 오는 길이라고 합니다. 무도회 날 전까지 넉넉하게 중앙 대사원에 도착할 거라더군요.”
“그거참 든든하긴 한데. 뭐라고 해야 하나, 좀, 너무 잘해 주는 느낌이네요.”
“그만큼 백화 기사단도 각오를 하란 뜻이겠죠. 적어도 고위 사제의 순례길에 앨저 경한테 호위를 요청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엘테르트의 추측은 그럴듯했다. 신벌은 만능이 아니었다. 여자 사제의 순례길은 아슬아슬하기 그지없었다. 이에샤는 달신교가 고를 수 있는 무력 가운데 최강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백화 기사단이 자리 잡기만 한다면, 제국을 몇 바퀴는 돌아도 괜찮았다. 네세라가 저 말고도 달신을 믿는 귀족 여자가 있다고 말했었다. 그들을 끌어들이는 데도 달신교와의 교분은 이로울 터였다.
“상관없어요. 당장 눈앞의 일이 중요하니까. 사제 호위든 사원에 돌담 쌓기든 시키라고 하세요.”
“앨저 경한테 그런 궂은일을 맡기는 건 내가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농담인데 뭘 정색하고 그래요?”
“나도 농담입니다만.”
이에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엘테르트의 농담에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예사롭게 툭툭 던지는 말이 폭약 같아서, 사람을 기겁하게 했다. 가슴에 해로웠다. 엘테르트는 얄미우리만치 잔잔한 낯으로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눈빛에 애정이 담뿍했다. 이에샤는 어울리지 않게 과감한 남자라고 떠올렸다가, 멘델린 부부의 금실을 기억했다. 애버토스가 엘로나에게 사랑앵무 백 마리를 선물한 일화는 유명했다.
‘선물이라.’
엘테르트는 선물이 드물었다. 작년에 받은 스카프 말고는―이에샤에게는 선물이라기보다 내기 상품이었지만―꽃 한 송이를 건네거나, 멘델린의 마차에 태워 주는 따위의 일이 다였다. 이에샤 자신도 물질적인 것을 받고 싶다고 바란 적은 없었다. 의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냥 퍼뜩 생각난 건데요, 멘델린 경은 저한테 선물을 별로 안 하시네요.”
“선물?”
“아니 뭐, 저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보통은 애인끼리 이거저거 주죠? 아! 받고 싶다고 보채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말아요. 순수하게 궁금해서…….”
“해도 됩니까?”
“네?”
눈을 끔뻑거렸다. 엘테르트의 낯빛이 진지했다. 벼르고 벼르던 일이 이루어진 양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묘한 박력마저 느껴졌다. 이에샤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얼떨떨하게 고개만 주억였다.
“그야 당연하죠. 멘델린 경 마음 아니겠어요?”
“그동안 소문 때문에 앨저 경이 언짢을까 봐 참았는데,”
“네? 잠깐만요. 소문이라뇨?”
“허락이 떨어졌으니 이제 마음껏 선물하겠습니다.”
실수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인의 사사로운 선물이 어째서 소문까지 난단 말인가? 애정과 감사를 보내면 그만인 일이었다. 남이 끼어들 구실이 없었다. 이에샤는 셈브리온과도 무언가를 주고받거나 하지 않았다. 천성이 그런 데에 담백했다. 엘테르트에게 물어본 까닭도, 이름난 로맨티시스트인 아버지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손을 내저으려고 했다. 엘테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앨저 경, 가 보겠습니다. 일도 바쁘고 주문도 넣어야 하니 서둘러야 합니다.”
“주문은 또 뭡니까? 멘델린 경!”
“날이 춥습니다. 체력에 자신 있더라도 코트를 꼭 여미고 다니십시오.”
상냥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 한 손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윗몸을 숙였다. 언제 보아도 우아한 몸짓이었다. 이에샤가 넋을 잃은 사이, 엘테르트는 성큼성큼 걸었다.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이에샤는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멍하니 문만 쳐다보았다.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내다본 대로 움직였지만, 뜻밖이기도 했다.
이에샤가 출근하자마자, 사무실로 크고 작은 꾸러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에샤는 착잡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이리될 줄은 알았다. 바람 같이 떠나간 엘테르트가 선물을 마련할 줄은. 이에샤의 상상과 규모가 다를 따름이었다. 하인 다섯 명이 번갈아들며 물건을 옮겼다. 포장지와 리본만 벗겨 팔아도 드레스 한 벌 값은 나올 듯했다. 선물이 서른 개쯤 쌓였다. 마지막으로 흡족한 얼굴의 엘테르트가 나타났다. 이에샤는 속을 다스렸다. 짜증 내면 안 된다, 저 남자는 잘못한 것이 없다…….
엘테르트의 말마따나 점심 즈음에는 온 에브라힐에 소문이 날 성싶었다. 엘테르트는 멘델린 부부에게 연인이 누구인지 들킨 뒤, 막가는 면이 생겼다. 이에샤 또한 아등바등 숨길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사방에 자랑하고 싶지도 않았다. 눈앞의 상자들이 갖은 금은보배를 품었으리라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분명 모두 앨저 경의 마음에 들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 지금 머리가 다 지끈거리거든요.”
엘테르트가 머쓱하게 웃었다.
“제 욕심으로 과하게 준비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한 번 풀어 보기라도 해 주십시오.”
자그마한 상자를 들어 보였다.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네세라가 반짝 팔을 올렸다. 발랄한 움직임이었다. 상황을 즐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크기로 보면 액세서리 세트 같은데요?”
“아닙니다.”
엘테르트가 유려한 손놀림으로 포장을 끌렀다. 이에샤도 네세라처럼 장신구라고 생각했다. 아니라니, 호기심 어린 얼굴로 상자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안쪽에는 충격을 흡수하도록 벨벳이 깔렸다. 그 가운데에 수정으로 세공한 병이 들었다. 겉면이 노르스름했다. 내용물의 빛깔이 비치는 모양이었다. 미엘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화장수인가요?”
“동백기름입니다.”
이에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스란은 “아.”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이에샤는 진저리가 배어나는 표정을 집어던졌다. 엘테르트로부터 기름병을 받아 들었다. 눈이 생일을 맞은 어린아이처럼 빛났다. 머릿기름일까? 네세라가 평범하구나, 생각했을 때였다. 엘테르트가 설명했다.
“티에도르의 대장간에서 구했습니다. 장인이 수십 년간 고집한 기름이라더군요. 저는 봐도 잘 모르겠지만.”
“티에도르면 공업 지대에서 제일 유명한 대장간이잖아요.”
“예. 그리고 이것도.”
다른 꾸러미를 집었다. 조리개로 졸라맨 비단 주머니였다. 붉은색 바탕에 금실로 독수리가 수놓였다―사심이 느껴지는 무늬였다. 주머니를 열지는 않고 이에샤의 손바닥에 쥐여 주었다.
“다음에 열어 보십시오. 미세한 돌가루가 들었으니 날리지 않게 주의하시고.”
“멘델린 경……!”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이에샤가 엘테르트의 목을 끌어안으려 들었다. 엘테르트는 손을 내저었다. 그다음 상자도 크지 않았다. 스란으로부터 동백기름과 돌가루가 검을 손질할 때 쓰인다고 가르침 받은 네세라와 미엘라는, 미묘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잘생긴 남자가 연인에게 선물을 안기는 광경인데 묘하게 아름답지 못했다.
“금강석으로 만든 연마재입니다.”
이에샤는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다이아몬드로 칼을 갈 수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멋졌다. 살면서 이러한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엘테르트의 선물에는―어느 대장간의 영업 재산을 털어 왔는지―검과 관련한 것이 많았다. 차례대로 풀리는 상자와 꾸러미들을 보며 벅차오르는 가슴을 누를 수 없었다.
엘테르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두툼한 꾸러미를 끌어당겼다. 리본을 풀었다. 이에샤는 무엇이 나올까 고대하며 들여다보았다. 네세라는 포장된 모양새와 엘테르트의 자세로 미루어, 신발이 아닐까 헤아렸다.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구두가 아니라 커다란 숫돌 같은 것일지 몰랐다.
처음으로 네세라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드러난 내용물은 신발이었다. 아름다운 구두는 아니었으나.
“옛날에 주문했던 건데 이제야 주인을 찾아가는군요.”
“부츠네요?”
“예. 평소에 신는 신이 오래된 거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송아지 가죽으로 만들어서 편할 겁니다. 신어 보십시오.”
“으음.”
이에샤는 나지막하게 침음했다. 신바람이 가라앉았다. 눈부신 선물 공세에 들떴으나, 불쑥 떨떠름해졌다. 자신은 엘테르트에게 무언가를 준 적이 없었다. 성의를 나타내고자 해도 값비싼 물건을 준비하기는 어려웠다. 우울감이 차올랐다. 제가 엘테르트의 곁에 서기에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려주지 못할 애정은 달갑지 않았다. 맺고 끊기가 분명한 감정이 아니라면 불안스러웠다.
“……정말로 고마운데요, 멘델린 경.”
“앨저 경? 표정이 왜 그렇습니까.”
“이런 좋은 것들을 저한테 주는 건 좀, 아니, 많이 낭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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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남주의 기본 소양을 140화가 되어서 클리어한 엘테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