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143화 (143/164)

00143 11. 파국 =========================

“대재앙이라니.”

이에샤가 말머리를 되받았다. 에르실반은 초조한 듯, 주름진 손을 맞잡았다. 양 손가락을 꽉꽉 얽었다. 아랫입술을 오므려서 축였다.

“해석할 여지가 너무 많습니다. 물난리, 지진, 산사태, 화산 폭발, 마파랑. 적어도 해일은 아니겠지요. 전쟁을 가리킨 적도 있었죠. 제가 예측하는 최악의 상황은 암발라의 화산이 폭발하는 거고, 가볍게 넘어간다면 별궁이 무너진다든가.”

“가볍다고?”

“대재앙의 계시는 언제나 수백 수천의 희생자를 내고 지나갔습니다.”

이에샤는 찻잔을 들었다. 속이 빈 뒤였다. 머쓱하게 내려놓았다. 갈 곳 잃은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에르실반의 방문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황실은 신의 계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나라의 앞일을 헤아리는 데도 도움받았다. 고위 성직자에게 내려온 계시를 들어 넘길 수는 없었다. 이에샤는 지금의 이야기를 총무부나 궁내부에 알려야 했다. 절차를 깨는 짓이기는 해도, 엘테르트에게 전하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황궁에서 이에샤의 목소리는 어린애 떼보다 시시한 취급을 받았으니.

“다른 곳이 아니라 날 찾아온 이유는? 계시 내용에 내가 포함돼서인가?”

“그도 그렇고, 저희는 해신교랑 다릅니다. 황실과 상시 연결되는 연락책이 없어요. 백화 기사단이 유일한 연결 고리죠.”

“그렇군. 알겠소. 귀하의 얘기는 내 책임지고 윗선에 올리도록 하지.”

에르실반이 입술을 옴죽거렸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에르실반을 쳐다보았다. 용건이 남았는가 싶었다. 에르실반은 메마른 낯으로, 눈빛으로만 걱정과 두려움을 드러내며 말했다.

“경, 그냥 무도회를 취소하는 수는 없습니까?”

“……작년 신년맞이 무도회가 엉망으로 중단됐소. 올해는 꼭 성공적으로 치러야 해. 나 역시 이런 계시를 듣고도 속행하는 건 바보같지만, 글쎄, 왈가왈부할 만한 권한이 없어서.”

“저야 살 만큼 산 몸이니 언제 황혼의 세계로 가든지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가 돌볼 아이들이 눈에 밟히는군요.”

백화 기사단과 발맞출 상·하급 사제를 일컫는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뜻밖으로 생각했다. 매몰차게만 보이던 에르실반이 ‘아이들’ 하고 발음할 때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달신교는 교세가 약하고 폐쇄적인 만큼, 끈끈하게 뭉쳤다. 세상사에는 눈길을 주지 말되 자매가 어려움에 처하면 가만있지 않도록 가르침 받았다. 에르실반도 어린 자매들에게 정이 깊은 듯했다.

이에샤는 부러움을 느꼈다. 제 목숨도 둘째 칠 만큼 아끼는 가족이 많다니, 좋은 일이었다. 이에샤에게도 그러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떠나가 버렸지만. 양손을 가슴에 얹었다. 윗몸을 굽혔다. 사제에게 차리는 예였다. 이에샤의 자세는 꼿꼿하고 똑발랐다. 몸가짐새가 멋들어졌다.

“에브라힐 궁전에 발 들인 여자는 지체를 막론하고 백화 기사단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지. 달신의 딸들도 마찬가지요. 내 명예와 브링어로서의 힘을 걸고, 모두 지켜 주겠소.”

“그런 식으로,”

에르실반은 망설였다. 좋은 소리도 아닌데, 뱉어도 될까 싶었다. 상대는 귀족이었다. 에르실반은 젊은―또는 어린―귀족이 껄끄러웠다. 사회와 구조를 꿰뚫은 귀족은 달의 여섯 딸을 존중했으나, 청년들은 겉으로 보이는 신분에 얽매였다. 심기를 거스른다면 건방지다며 날뛸지도 몰랐다.

이에샤의 인상은 괜찮은 편이었다. 이십 대 귀족치고는 태도가 수더분했다. 달신교 신도와 비슷했다. 달신을 믿는 귀족들은 여성의 한계에 부딪치고, 여성을 남성과 같은 높이로 올려놓고 싶어 했다. 귀족 남자보다 평민 여자와 함께하기를 바랄 정도였다. 이에샤도 너그러울지 몰랐다. 에르실반은 끊었던 말을 이었다.

“구두로 하는 약속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믿음을 사기 어렵지요. 백화 기사단이 부디 모든 여자를 똑같이 지켜 주기만 바랍니다. 달신의 눈은 밝은 낮에도 감기지 않으니까.”

“내가 약속을 저버린다면 신벌이 떨어져도 좋소. 그럴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에르실반의 바람대로 이에샤는 노여워하지 않았다. 쾌활하게 웃어 보였을 따름이었다. 에르실반은 양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성직자의 답례를 취했다. 이에샤는 점잖게 찻잔을 들었다가, 겸연히 내려놓았다. 다음부터는 시더에게 티세트를 갖추어 두라고 말해야겠다 다짐하며.

스란은 석곡궁의 2층으로 올라갔다. 백화 기사단에는 1층만으로도 족했다. 여느 때에는 비워 두는 곳이었다. 스란이 드나드는 줄은 누구도 몰랐다. 객실 가운데 잠기지 않은 방이 있었다. 안에는 건물 뒤쪽으로 발코니가 났다. 독특한 점은, 크고 두꺼운 느티나무에 가로막혔다는 것이었다. 경치를 내다볼 수가 없었다. 나뭇가지가 발코니의 반을 넘게 파고들었다. 호방했던 태황태후가 “이 또한 운치 있지 않느냐?” 하며 자르지 않은 결과였다. 스란은 거기에 등을 기대고 섰다. 질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께서 옛 일터랑 자꾸 엮이면 좋지 않다고 이르셨습니다.”

“잘났다. 기사가 다 됐구나. 딸자식 길러 봐야 모르는 놈이 채 간다더니.”

“아저씨 같은 소리 좀 하지 마십쇼, 단장. 주책맞습니다.”

“아저씨 맞으면서 아닌 척하는 게 더 주책이다, 이놈아.”

나뭇잎 속에 숨은 암무단장이 킬킬거렸다. 틀린 농담도 아니었다. 용병 길드의 뒤뜰에서 목검을 휘두르는 소녀를 보고, 황궁으로 데려온 사람이 저였다. 하나 말과는 다르게 스란을 백화 기사단으로 보낸 일이 아깝지는 않았다. 스란은 자존심이 셌다. 남자 암무단원들은 성깔 있는 홍일점을 찍어 누르려 들었고. 암무단장은 스란을 아끼면서도 챙겨 줄 수 없었다. 나머지 부하를 달래야만 했다. 스란이 여자로만 이루어진 부처로 옮겼으니―준귀족 신분까지 얻었다―한시름 놓은 셈이었다.

스란은 한숨을 쉬었다. 암무단장은 철모른다 싶으리만큼 명랑하고 건들건들한 사내였다. 저치가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다니.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었다. 이오르는 스란 또한 좋아했다. 하지만 스란 자체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라제카 공주에게 품은 죄책감을, 여자이면서 능력을 떨치는 스란에게 잘해 주며 달랬을 뿐이었다. 암무단장을 향한 총애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또 쓸데없이 혼자 자존심에 생채기 내고 있구먼.”

“아닙니다.”

“내가 너를 몇 년을 봤는데 이 녀석아. 됐고, 잘 들어라. 오랜만에 임무다.”

스란의 눈썹이 치솟았다. 단장이 불러내기에 어림은 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스란은 암무의 식구가 아니었다. 백화 기사였다. 스란을 다루고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백화 기사단장―이에샤 앨저뿐이었다.

“전 암무에서 손 씻었습니다.”

“야, 우리가 무슨 뒷골목 조직폭력배냐? 손을 씻게? 아직도 날 단장이라고 부르면서 새침은.”

“칫!”

“나도 구질구질하게 떠난 애 붙잡으려는 거 아니다. 이번엔 폐하께서 너한테 명하신 일이야.”

흠칫 놀랐다. 칙령을 내리러 온 이에게 툭툭댈 수는 없었다. 불경이었으므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귀를 기울였다. 암무단장의 목소리에서도 장난기가 가셨다.

“벨체터와 레오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벨체터?”

“레오웰의 일란드 시, 페그놀 시, 발디지 시에서 벨체터 동북부로 사람과 물자가 은밀히 흘러들어 가는 걸 잡아냈다. 밀정 말로는 레오웰 연합 시장들이랑 벨체터 귀족 사이의 연결은 없다더군. 왕실은 망하기 직전이고.”

“그럼, 용병입니까?”

“말귀 한 번 밝다니까. 예쁜 것.”

평화로운 델페레타에는 용병업이 자리 잡지 못했다. 용병에 관한 정보도 드물었다. 용병 길드에서 일했던 스란을 골라 뽑았다면, 벨체터의 지하 조직도 그쪽일 터였다. 스란의 이맛살이 죄어들었다. 용병이란 본국과 외국을 가리지 않고 돈으로 움직이는 족속이었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외국과 손잡는 일은 상상이 안 되었다.

하나 벨체터라면 다를지도 몰랐다. 외적과 싸운 것이 아니라 내부끼리 갈라진 만큼, 조국에 애틋한 자가 많았다. 스란이 만나 본 벨체터인 모두가 그러했다―몇 명 되지도 않았지만. 벨체터 용병이라면 똘똘 뭉쳐서 무언가를 꾸민다 해도 이해할 만했다. 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뭘 해야 합니까? 그쪽 혼혈이고 눈도 까마니 잠입이라도?”

“아니. 넌 백화 기사로서 일해야지.”

“임무라면서요, 단장이.”

“폐하께서 네게 명하신 일은 간단하다. 너희 기사단장을 지켜.”

알아듣기 힘든 명령이었다. 왜 이에샤가 화두에 오른단 말인가? 이에샤는 오래된 귀족 집안인 앨저와 알디온의 딸이었다. 계보로만 따지면 제국에서도 명족에 들 터였다. 벨체터나 레오웰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스란은 이에샤가 저에게 벨체터에서 왔느냐, 물었던 일을 떠올렸다. 석연치 않기는 여전했다.

무엇보다도…….

“대체 브링어를 무슨 수로, 뭐로부터 지키란 겁니까?”

“꼭 몸을 지켜 주라는 뜻이 아니야. 백화 기사단장 곁에 머무르면서 그 어린 여자가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 줘. 아니, 허튼 마음 먹지 못하게 감시하라고 해야 하나.”

“허튼 마음이라뇨.”

“그 여자, 스승이 벨체터의 대용병이다.”

스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벨체터의 대용병. 붉은 악몽, 용병왕이라고도 불리는 사내. 소문은 익히 들었다. 용병 길드 놈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댔었다. 붉은 악몽이야말로 브링어 중에서도 최강이라고. 이에샤가 외국인 용병을 스승으로 섬긴 줄은 알았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 튀어나왔다.

“미심쩍은 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수상한 자랑 만나지는 않는지 잘 살펴봐. 그리고 행여나 감정에 휩쓸려 제국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네가 지켜라.”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아직 녀석들의 실체도 목적도 파악하지 못했으니 조심하자는 것뿐이야. 알잖냐, 폐하께서 백화 기사단을 얼마나 중요히 여기시는지.”

스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암무단장으로부터 미안해 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십 대의 스란을 키우다시피 한 사람이었다. 스란이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훤하게 꿰었다.

“단장도 알잖습니까? 저는 그 나라가 싫습니다.”

“나인들 칙령을 어쩔 수가 있겠냐. 그리고 나 너네 단장 아니다.”

“진짜 짜증 나요, 당신.”

암무단장은 진심으로 침울해졌다. 스란이 자신의 키를 앞질렀던 날만큼.

============================ 작품 후기 ============================

예약 등록한 글입니다.

크리필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