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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44화 (144/164)

00144 11. 파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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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맞이 무도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들끓던 황궁도 행사가 닥치면 도리어 가라앉았다. 대부분의 준비는 마쳤다. 사고가 벌어지지 않도록 구석구석 살피기만 하면 되었다. 수레국화궁의 경비로 뽑힌 사람들은 그저께부터 에브라힐에서 숙식했다. 새벽같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석곡궁에는 빈방이 많았다. 백화 기사단은 제국 기사단처럼 숙소를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백화 기사는 1층을 썼다. 달신교 사제 스물한 명에게는 2층을 내주었다.

이에샤는 달신교를 맞아들이며,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되었다.

“앨저 경! 저기, 저 기억하시나요? 전에 경께 큰 도움을 받았는데.”

“슈리 사제?”

율법―사제 서품을 받고 십 년간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에 따라서 망토 후드를 눌러쓴 채였지만. 이에샤는 슈리의 생김새를 몰랐다. 하지만 목소리를 듣자마자 떠올려 냈다. 슈리가 양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반가운 티가 뚜렷했다.

이에샤는 망설였다. 이전에는 슈리가 얼어붙지 않도록 말을 높여 주었다. 하대를 하자니 어색했다. 결국은 “기억하죠. 오랜만이에요.” 하고 대답했다. 슈리에게만 존댓말을 쓰기도 무엇했다. 나머지 사제들도 존대해야 할 성싶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성직자란 평민이어도 존중받는 경우가 흔했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당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대사제를 보조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자원했답니다. 기즈의 재판을 끝까지 도와주셨다고 들었어요. 그날 증언만 하고 돌아가서 쭉 못 나왔거든요. 꼭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아리타한테 넘치도록 감사받았어요. 마음 쓰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제가 하급 사제 중 나이가 많은 편이잖아요? 대사제님이 다른 자매들을 챙기라고 보내신 이유도 있어요.”

듣고 보니 알맞은 인선이었다. 상급 사제는 다섯 사람뿐이었다. 하급 사제 사이에서도 머리를 맡을 이가 필요했으리라. 슈리는 수행 중에 병든 어머니를 돌보느라, 서품을 늦게 받았다. 하급 사제 틈에서 언니 노릇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급 사제들은 얼굴을 가린 채였다. 인사하며 들은 목소리들을 돌이켜 보았다. 몇몇은 십 대인 듯싶었다.

네세라는 상급 사제들과 아는 사이 같았다. 중년 여인들 사이에서 도란도란했다. 바람결에 달신교의 구제 활동이나, 페리튼 자작가에서 내는 헌금 이야기가 실렸다. ‘여성 의료원’이라는 낱말도 들려왔다.

시더가 사제들을 석곡궁 2층으로 이끌었다. 이틀 동안 백화 기사단과 달신교 사이에는 만남이 드물었다. 엄격한 생활을 하는지, 하급 사제는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다. 에르실반이나 상급 사제 두어 명만이 이에샤의 사무실을 찾고는 했다. 이에샤보다는 미엘라가 축이 되어 무도회에서 해야 할 일을 의논했다.

이에샤는 인공호의 언저리를 거닐었다. 폭풍 전의 고요를 누렸다. 마음 한구석이 뒤숭숭했다. 에르실반의 불안이 옮은 탓일까? 대재앙의 계시가 귓전을 맴돌았다. 궁내부에 이야기하고 엘테르트에게도 전했건만, 무도회를 멈출 수는 없었다. 경비 인력이 늘어났을 뿐이었다. 본궁과 모든 별궁의 안전도 점검했다.

계시의 내용은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풀이하여 내다볼 따름이었다. 약속의 날이란 내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핏줄도 형제를 가리키지 않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발’ 또한 뜻이 불분명했다. 대재앙이 언제, 어디에서, 어떠한 모양새로 일어나는지는 미지수였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은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었다.

“앨저 경.”

“……아. 왔어요?”

엄지손을 깨무는 참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에샤를 불렀다. 이에샤는 흠칫했다. 입가에서 손을 내렸다. 엘테르트를 돌아보았다. 엘테르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에샤의 낯에서 넌더리가 배어났다. 감추려는 모양이었지만, 고민거리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걱정스럽게 팔을 뻗었다. 흘러내린 잔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브링어 특유의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를 뛰어넘을 만큼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몸에 닿기가 좋았다.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제 기분이 나빠 보이나요?”

“표정이…….”

손끝을 미끄러뜨렸다. 이에샤의 귓바퀴를 문지르고, 뺨을 지났다. 턱선을 어루만졌다. 어깨를 숙였다. 눈높이를 맞추었다. 서로의 숨결이 얽혔다. 이에샤는 엘테르트를 물끄러미 보았다. 끈적한 염심이 느껴졌다. 가소롭게도.

“불편해 보여서.”

“멘델린 경.”

“예.”

“은근슬쩍 수작 부리지 말아요.”

엘테르트는 픽 웃고 말았다. 분위기를 달콤하게 몰아가면 이에샤는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야멸차게 뿌리쳐 냈다. 처음에는 애가 달았으나, 익숙해졌다. 이에샤는 내키지 않으면 입맞춤은커녕 손잡기조차 싫어했다. 엘테르트도 튕기면 담백하게 물러나게 되었다. 이에샤의 경계심과 변덕마저 귀여웠다. 어찌되었든 엘테르트로서는 이에샤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너무하는군요. 열하루 만에 만났는데.”

“그걸 다 세고 살아요? 그리 길지도 않네요.”

“지난번에도 계시 얘기만 늘어놓고 바쁘다며 휙 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아, 혹시 그거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까?”

이에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맞다는 뜻이었다. 엘테르트는 난처하게 웃었다. 대재앙의 계시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는 이에샤보다, 엘테르트가 잘 알았다―해달신교의 계시록을 모조리 외운 터였다. 그러나 ‘대재앙’이란 안다고 걷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재해나 전쟁을 무슨 수로 막겠는가.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만 했다. 이오르 황제도 손 놓지는 않았다. 제국 기사단과 황실 마법사를 총동원해서 대비책을 세워 놓았다.

“달의 딸께서 풀이한 뜻이 앨저 경과 관련됐으니 신경 쓰이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앨저 경, 불안해 하면 경만 손해입니다.”

“사람 마음이 생각처럼 되나요? 저도 신경 쓰고 싶어서 쓰는 거 아니에요.”

“수십 년 만에 내려온 신의 계시 아닙니까. 내일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어마어마한 일이 닥칩니다. 잊어버리고 사는 편이 낫습니다.”

“전 그냥…….”

이에샤가 입술을 깨물었다. 속내를 털어놓기가 껄끄러웠다. 제가 앓는 까닭이 밀레나 때문이라고, 엘테르트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에르실반이 받은 계시는 이상했다. 밀레나가 제물로 쓰인다니. 평범한, 아니, 아프기까지 한 계집애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재앙을 불러온단 말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호한 채였다.

에르실반은 밀레나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제물이란 시발점을 말하는 거 같습니다. 삿된 무리가 경의 이복동생을 데려갔고, 그들이 불온한 일을 꾸민다든가. 혹은 동생께서 수도로 돌아오시는 길에 사고에 휘말린다는 뜻일지도요. 지나간 계시록을 살펴봐도 평범한 귀족 영애가 대재앙이랑 직접 관련이 있다고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에샤는 ‘아니야.’ 하고 떠올렸다. 직감적인―또는 본능적인―부정이었다. 무언가를 놓친 것만 같았다. 찜찜한 뒷배경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밀레나가 사라지기 전날, 대화를 더 나누었어야 했다. 마력에 중독된 이유만이라도 물어보았어야 했다. 후회가 들었다.

“엘먼 공이 그러셨잖아요. 1, 2년 내로 황궁에서 마파랑이 일어날 거라고.”

“당분간은 괜찮다는 말도 하셨습니다. 내일은 아닐 겁니다.”

“밀레나 말이에요.”

엘테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엘테르트는 밀레나의 이름만 꺼내도 움찔했다. 이에샤는 미안한 얼굴을 했다. 밀레나가 끈덕지게 쫓아다녀, 시달렸다고 들었다. 연인으로서 엘테르트의 고충을 몰라주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애 마력에 중독됐었어요. 알잖아요.”

“마력 중독이랑 오염은 전혀 다른 현상입니다. 알디온 영애와 인공 마파랑 사이에는 연관성이 없어요. 앨저 경, 영애가 눈에 밟히겠지만 지나치게 생각하면 앨저 경한테도 해롭습니다.”

“알아요, 알아요. ……계속 같은 말만 해서 미안해요. 내일이 무도회라 제가 긴장했나 봐요.”

“만약 계시의 내용대로 영애가 돌아온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지요. 실종된 뒤로 알디온 후작가 분위기가 초상집 같던데.”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요.”

퉁명하게 쏘아붙였다. 참말이었다. 밀레나에게 큰일이 생기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밀레나 때문에 큰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알디온 부부는 더욱이 알 바 아니었다. 벼락이나 맞았으면 싶은 인간들이었으니까.

엘테르트가 빙그레했다. 한 손바닥을 이에샤의 이마에 얹었다. 앞머리를 정수리 쪽으로 넘겼다. 드러난 가운데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에샤는 말캉하고 간지러운 느낌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우리 사이는 이미 황궁 밖까지 파다합니다.”

“그러니까, 멘델린 경 애인으로 소문나는 게 싫다고 말했을 텐데요.”

“그 싫다는 마음보다 더 날 좋아하지 않습니까.”

받아치지 못했다. 맞는 말이었으므로. 엘테르트와 염문이 도는데도 가만있는 까닭은, “당신보다 중요한 것이 많다.” 하며 놓아 버리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떨치도록 죽을 만큼 애쓰는 편이 나았다. 질린 낯빛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사랑 따위에 빠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엘테르트는 녹아내릴 것 같은 눈길로 이에샤를 보았다. 분하다는 표정이 떠오른 채였다. 사람이 주는 먹이에 입을 대고, 후회하는 들짐승이 이러할까. 자신을 좋아하면서도 고집부리는 면이 사랑스러웠다.

“사실은 내일, 수레국화궁 중앙에서 앨저 경과 춤춰 보고 싶었지만.”

이에샤의 미간이 죄어들었다. 손잡고 빙글빙글 도는 저희를 그려 보는 모양이었다. 꺼림칙하다는 티가 역력했다.

“당신은 드레스보다 기사단 정복을 입은 편이 행복해 보입니다.”

“…….”

“무슨 일이든지 앨저 경이 하고 싶은 것을 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이에샤는 혀끝을 찼다. 무엇이든 아는 것처럼 말하는 엘테르트가 얄미웠다. 오래간만의 데이트였다. 뽀뽀라도 해 줄까 생각했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경이나 잘하세요. 술 마시면서 밤 새우지 말고.”

“난 알코올이 들어가면 업무 능률이 오릅니다.”

“진짜 안 그러게 생겨서 술 좋아해.”

투덜투덜 비꼬았다. 언젠가는 이슬만 마시고 살게 생긴 낯바닥이라 헐뜯었었다. 정작 엘테르트 멘델린은 애주가였다. 주말이면 침대와 호프만 오간다는 스란보다 더했다. 휴게실에 최고급 증류주를 열 몇 병이나 두고, 일이 안 풀릴 때마다 마신다고 들었을 때는 기가 질렸다.

“내일만 지나면 시간이 날 겁니다. 황태자 전하가 영년 토너먼트 일에서는 제외해 주시거든요.”

“저도 나가고 싶어요, 토너먼트.”

“……백화 기사가 끼더라도 앨저 경은 안 됩니다. 브링어랑은 시합이 안 되니까, 기사단장 출전은 금지돼 있습니다.”

“쳇!”

신년맞이 무도회가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이 산더미 같았다. 이에샤와 엘테르트는 두런두런하며 걸었다. 살얼음이 낀 호수에 하늘이 비쳤다. 평화로웠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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