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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55화 (155/164)

00155 12. 싸울 수 있는 이 =========================

스란의 고백이 떠올랐다. 벨체터와 레오웰에서 꺼림칙한 움직임을 보여, 벨체터 용병의 제자인 이에샤가 의심을 샀다는 이야기. 자신은 떳떳했다. 하지만 황실 첩보부도 틀리지 않은 성싶었다. 레오웰 도시 연합의 으뜸인 헤놀 크로유 시장이 델페레타를 찾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밀입국이 분명했다. 헤놀은 여유롭게 이에샤를 뜯어보았다.

“뭐, 됐다. 이름 같은 건 중요치 않지. 그보다 꼬마, 넌 대체 뭐냐?”

“…….”

“우리 마법사가 이 난장판 속에서 기사단장을 구분하겠다고 브링어만 그림자를 없애 버렸거든? 봐, 나도 없지? 내가 세상 모든 브링어를 아는 건 아니다만 말이다. 너 같은 계집애가 브링어라는 소리는, 엇차!”

이에샤가 급작스럽게 검을 휘둘렀다. 브링을 쏘아 보냈다. 이만한 거리라면 피하지 못할 터였다. 아까부터 브링을 써서 아껴야 했으나, 검술만으로 헤놀과 싸울 수는 없었다. 헤놀은 창대 전체에 브링을 휘감았다. 가볍게 돌렸다. 희푸른 빛이 부채꼴로 자국을 남겼다. 이에샤의 브링을 집어삼켰다. 이에샤는 눈을 부릅떴다. 헤놀이 투덜거렸다.

“성질 한 번 급한 녀석이군. 실력 파악이 안 되나? 넌 나한테 상대가 안 돼. 차라리 아양이라도 떨어서 목숨을 구걸하는 편이 나을 거다.”

“남의 나라에 몰래 기어들어 온 불한당이 혓바닥 한 번 매끄럽구나.”

이에샤는 불퉁하게 뻗댔다. 헤놀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큰소리치기는 했으나, 이에샤의 가슴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헤놀은 셈브리온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자였다. 제국 기사단에 넘어설 브링어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에샤가 물리치지 못한다면 나머지 기사단장이 얼마나 죽어 나갈지 몰랐다. 밀레나를 찾는 일도 급했지만, 양패구상의 꼴로라도 헤놀을 막아야 했다.

두려웠다. 이에샤 앨저는 제국의 유서 깊은 집안에서 태어난, 작위와 관직을 가진 귀족이었다. 델피르 황가에 목숨을 바쳐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에샤는 죽을 셈이 없었다. 살아서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검술의 끝을 보고 싶었다. 까마득한 강자인 헤놀이 두려웠지만, 발목을 잡고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이겨서 올라서고 싶었다. ‘이런 곳에서 죽을까 보냐.’ 하는 생각이 솟았다.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글렘 모드리스와의 결투를 돌이켰다. 이에샤의 몸이 움직였다.

“이런!”

헤놀이 놀란 소리를 냈다. 이에샤가 윗몸을 숙인다 싶더니, 튕기듯이 달려들었다. ‘틀에 박힌 짓거리밖에 못 하는군.’ 하며 창대로 막아 냈을 때였다.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묵직한 공격에 몸이 밀려 났다. 헤놀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저와 견주면 가늘기 그지없는 팔에 억눌리다니. 브링어가 평범한 사람이 상상하지 못할 힘을 내기는 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거나, 바늘 떨어지는 소리를 듣거나, 주먹으로 바위를 깨부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브링어였다. 덩치 큰 헤놀이 밀릴 턱이 없었다.

이에샤는 ‘역시!’ 하고 떠올렸다. 글렘과 싸우며 느낀 바가 있었다. 글렘은 이에샤보다 약하지 않았다. 실력은 엇비슷했으리라. 이에샤는 셈브리온에게 배운 교묘한 기술로 이겼을 따름이었다. 셈브리온이 강하다고 해도, 제국 제3 기사단장인 글렘의 수준이 묘했다. 지나치게 뒤떨어졌다. 또한 이에샤가 만난 브링어―글렘, 발테른, 헤놀 등―누구도 브링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셈브리온의 새빨간 브링은 퍽 보기 힘들었건만. 브링을 투명하게 만드는 일에는 품이 들었다.

‘역시 세비가 남보다 훨씬 브링을 섬세하게 쓰는 거야.’

힐가 데힐은 여자 검사로서 모자란 완력을 채우기 위하여, 효율적인 움직임과 체력 배분에 신경을 쏟았다. 셈브리온은 힐가의 수제자였다. 그리고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모든 것을 이어받았다. 브링을 다루고 부리는 일만큼은 백전노장을 앞질렀다.

“아까부터 몇 번을 놀라는지 원. 너 정말 재밌는 꼬마구나.”

“그래? 당신은 별로 재미없는 아저씨인데.”

야멸차게 내뱉었다. 헤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미늘창은 기다란 만큼 거두어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헤놀은 아슬아슬하게 롱소드를 쳐 냈다. 반격하려고 해도, 무기의 이점을 살리려고 해도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다리에 브링을 실었다. 겅중겅중 뒷걸음질 쳤다. 이에샤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샤의 속도는 헤놀이 본 적 없이 재빨랐다.

‘놓칠 거 같아?’

“이거참!”

칼끝이 헤놀의 목젖을 노렸다. 헤놀은 창을 내저었다. 이에샤는 왼쪽에서 덮쳐 오는 창대를 피하고자, 도리어 왼쪽으로 몸을 수그렸다. 머리카락이 쭈뼛했다. 검을 땅바닥에 박아 세웠다. 검신을 버팀목으로 삼았다. 헤놀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자기보다 커다란 상대와 싸우는 데라면 익숙했다. 헤놀이 균형을 놓쳤다.

후속타는 아쉽게 창날에 막혀 버렸다.

“대단한데! 도대체 너 같은 브링어가 어디 숨어 있었지?”

“숨은 적 없어.”

“그럼 나한테 가르쳐라. 네가 누구인지.”

이에샤는 브링을 끌어모았다. 아까와는 반대로, 미늘창을 밀어내며 말했다.

“델페레타 황실 백화 기사단장 이에샤 앨저.”

“백화 기사단장? 아! 그런 기사단이 생겼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 그렇군. 이 나라는 고작 여기사단 따위에도 브링어 단장을 앉힌단 건가.”

“고작?”

마침내 이에샤의 검이 헤놀의 창을 팽개쳤다. 헤놀은 흉갑을 두르지 않고 가죽 셔츠만 입었다. 검은색 칼날이 심장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몸을 비틀었다. 매서운 검로로부터 달아났다.

“고작 여기사단에 브링어씩이나 쓸 만큼 인력이 썩어 난다고 생각하나?”

“아닌가?”

“브링어는 돼야 한 기사단의 단장이 될 수 있다고 해야겠지. 나와 내 부하들을 제국 기사단보다 아래로 치지 마라!”

창대와 칼날이 거듭해서 맞부딪쳤다. 헤놀은 이에샤와 떨어지지 못했다. 이에샤는 다가붙어서도, 헤놀의 몸에는 스치지조차 못했고. 공방이 이어졌다. 실력은 헤놀 쪽이 뛰어났다. 하지만 이에샤는 무리하게 브링을 써 나갔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이에샤가 불리할 터였다.

‘제발!’

“호흡이 거칠어졌다. 너한텐 승산이 없어.”

입술을 깨물었다. 받아칠 말도, 여유도 없었다. 반면에 헤놀은 이에샤의 힘과 속도가 익은 모양이었다. 막막했다.

‘아직 괜찮아. 안 된다고 여기고 물러서는 순간 끝장나는 거야. 계속 덤벼들다 보면 빈틈은 반드시 생겨. 세비랑 싸울 때도 그랬고…….’

이에샤는 지난해를 돌이켜 보았다. 모두가 여자 기사는 어림도 없다고 손가락질했다. 이에샤 자신조차 한 번 그만두었었다. 하지만 백화 기사단이 생기지 않았는가. 입궁한 뒤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적의 빈틈이 보이면 필사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딜란 렌디드가 수레국화궁을 폭파할 것이라고 들었을 때도, 이실리아 황후를 잃어버리고 비벨라 숲을 헤맬 때도, 사기꾼을 재판정에 세울 때도, 하나뿐인 가족이 떠나갔을 때도! 이에샤 앨저는 주저앉는 법이 없었다. 그리하다 보면 무언가가 바뀌고는 했다.

‘난 이길 거야. 공을 세우고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될 거야!’

검을 쥐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눈앞이 무채색으로 바뀌었다. 마파랑으로 얼룩덜룩해진 하늘과 어둠에 싸인 지상이, 잿빛이 되었다. 감각이 시간을 75분의 1초씩 느끼기 시작했다. 검로가 지독하게 느려 보였다. 칼끝에서 꽃이 피어나듯이, 색깔이 입혀졌다. 이에샤는 흐르는 물처럼 검을 가로 그었다. 날아오는 창을 쳐서 엇나가게 했다. 비어 버린 헤놀의 옆구리에 칼끝을 박아 넣었다.

“크악!”

헤놀이 비명을 질렀다. 이에샤는 숨을 몰아쉬었다. 삽시간에 세상에 빛깔이 돌아왔다. 무아가 가셨다. 오른쪽 옆구리를 부여잡은 헤놀이 보였다. 수련할 때가 아니라, 남과 싸우며 이만큼 넋을 놓기는 처음이었다.

‘이겼다.’

헤놀은 옆구리를 베였을 뿐이었으나, 브링 탓으로 내장까지 상했을 것이었다. 목을 치기만 하면 되었다. 이에샤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한 말을 입 밖으로 내었다.

“이겼…….”

그때였다.

무언가가 이에샤의 가슴을 꿰뚫었다. 이에샤는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상앗빛 코트에 핏물이 번졌다. 화끈화끈한 통증이 몰아닥쳤다. “커헉!” 하고 기침했다. 뒤에서 이에샤를 찌른 남자가 검을 거두어 갔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칼날이 이에샤의 속을 득득 긁으며 빠져나갔다.

“뭐하는 건가, 크로유 시장. 30분이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나.”

남자는 말씨가 점잖았다. 이에샤를 내버려 두고 헤놀에게 걸어갔다. 그림자가 따라붙지 않았다. 키는 중간쯤 되었고, 정장을 차려입었다. 깔끔하게 기른 콧수염이 멋들어졌다. 남자가 허리띠에서 자그마한 유리병을 끌렀다. 코르크 마개를 땄다. 헤놀이 병을 받아 들었다. 속의 액체를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이에샤는 그것이 포션이라고 알아차렸다.

“제길! 내 상상을 뛰어넘는 미친 망아지가 있었다고. 벨타르테오.”

“그래. 그래 보이는군.”

바다의 수호신, 해적 수천 명을 베어 죽였다는 쟐레 왕국의 천부장이 차가운 눈으로 이에샤를 힐끗했다.

============================ 작품 후기 ============================

슬슬 아빠 돌아올 때가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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