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9 12. 싸울 수 있는 이 =========================
평소 이동 마차는 대기소에 대 놓으나, 비상시였다. 마부가 홑몸으로 달아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침이 그러했다. 다만 오늘은 사람들이 수레국화궁과 버들궁에 쏠렸다. 일하던 마차가 적을 터였다.
스란은 네세라를 곁눈질했다. 낯빛이 병자 같았다. 마력 탓은 아니었다. 체력이 동난 모양이었다. 악으로 버티는 중이 틀림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돌아가라고 하고 싶었다. 하나 겨우살이궁에 다다랐을 때, 혼자만으로는 대화가 어긋날 수도 있었다. 시중꾼들이 준귀족을 황후 곁에 두지 않으려 들지도 몰랐다. 이동 마차가 나타나기만을 빌었다. 말을 타면 걷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조금 쉬었다 갈까? 물어본 참이었다.
“꺅!”
“페리튼 경!”
네세라의 발치에서 불길이 솟았다. 스란은 급하게 네세라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뒤로 자빠졌다. 사람 한 명을 안은 채로 엉덩방아를 찧으니 숨이 막혔다. 불에 데는 일은 막았지만, 네세라는 발목을 붙들었다. 복사뼈 언저리가 부어올랐다. “아야야.” 하는 소리가 새었다.
“미안.”
“아니에요. 덕분에 살았어요. 읏! 단단히 접질린 거 같네.”
“골치 아프게 됐군.”
“나야말로 미안해요.”
스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발목 한쪽만 삔 것이 다행이었다. 인대야 아물겠으나, 화상은 달랐다. 그만한 불땀에 맞았다면 피부가 녹아내렸을 터였다.
어찌해야 할까. 고민스러웠다. 네세라를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겨우살이궁까지 함께하기도 어려웠다. 대피 시설에 데려다주고, 다시 겨우살이궁으로 향하려면 시간이 걸렸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말끝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쓰러진 네세라를 제 몸으로 덮었다. 등에 화끈한 느낌이 닿았다. 깊지는 않았으나, 날붙이가 스치고 지나갔다. 뒤를 돌아보았다. 단검을 쥔 여자가 달려들었다. 스란은 여자의 한쪽만 드러난 눈동자를 멍하니 보았다. 검었다. 반사적으로 단검을 마주 들었다. 칼날끼리 부딪치며 파열음이 울렸다.
머리카락을 바싹 깎고, 오른쪽 눈에 안대를 찬 여자가 입매를 찢어 웃었다. 스란은 네세라를 덮친 불길이 마파랑 현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약해 보이는 쪽부터 처리하려고 했는데.”
“벨체터에서 온 자냐?”
“그러는 넌…….”
랭기디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스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벨체터 사람만 검은 눈을 타고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스란은 묘하게 친숙했다.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자민족이라는 사실을.
“조국에서 싸우기를 거부하고 도망친 난민인가?”
“소설을 쓰는군! 난 제국에서 태어났다.”
“하긴, 나이가 안 맞기는 하네.”
랭기디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눈앞의 여자는 이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벨체터 내란이 시작될 무렵에는 대여섯 살쯤 되었으리라. 그 전에 델페레타로 흘러든 난민의 자식일 터였다. 벨체터는 옛날부터 흉흉했으니까. ‘잘됐군.’ 하고 생각했다. 제국인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죽일 수 있었다.
스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등의 상처는 별것 아니었지만, 네세라를 지키며 싸우기는 힘들었다. 우왕좌왕하다가 당할지도 몰랐다. 랭기디아도 똑같이 내다보았다.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어이, 옷을 보아하니 귀족이지? 아니다. 난민 2세일 테니 끽해야 준귀족이겠군. 벨체터 촌년치고는 제국에서 출세했구나.”
“내가 서부 촌년은 맞지만 너희 나라랑은 상관없어!”
“자기 뿌리마저 부정하는 걸 보니 정말 죽여 버려도 되겠네.”
랭기디아는 한 손에만 단검을 들었다. 빈손으로 품속을 뒤졌다. 스란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네세라를 끌고 비켜섰다. 자그마한 화살이 땅에 꽂혔다. 랭기디아는 단검으로 가까이를, 다트로 먼 거리를 노리며 능란하게 싸우는 전사였다.
“도대체 목적이 뭐냐!”
스란이 롱소드를 휘두르며 외쳤다. 랭기디아가 쳐 내려 했으나, 덩치와 검의 크기가 달랐다. 스란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쯧! 혀를 찼다. 겅중겅중 물러났다. 스란이 따라붙었다. 전 암무단원은 들짐승처럼 날렵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았다.
“목적? 그거야 당연하잖아!”
“뭐가 당연하면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서 이 개판을 쳐 놔?”
“아무리 무너지지 않는 하늘탑이라도 주춧돌 깨질 즈음은 됐지! 사방이 싸움판인데 혼자만 몸 사리고 사니까 이런 일을 당하는 거다!”
“웃기지 마!”
긴 다리로 랭기디아의 발을 걸었다. 랭기디아는 침착하게 중심을 잡았다. 몸을 낮춘 스란의 등을 팔꿈치로 찍었다. 아까 벤 곳을 노렸다. 스란은 “큭!” 하고 신음했지만, 빠르게 맞받았다. 양팔로 랭기디아의 옆구리를 끌어안았다. 바닥을 굴렀다. 랭기디아가 스란의 배를 걷어찼다. 스란도 지지 않고 랭기디아의 목을 졸랐다. 랭기디아는 목울대가 눌리면서도 단검을 스란의 허벅지에 찔러 넣었다. 스란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생각보다, 잘 하는데!”
“제길!”
“그렇게 넋 놓고 있어도 될까?”
랭기디아가 품에서 다트를 꺼냈다. 스란은 헉하고 놀랐다. 싸움에 정신이 팔려, 네세라를 잊었다. 랭기디아가 히죽 웃었다. 네세라가 주저앉은 곳으로 다트를 날렸다. 스란은 허겁지겁 네세라 쪽을 향했다.
“페리튼 경!”
“……뭐야, 어떻게?”
랭기디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쏘아 보낸 다트가 구깃구깃 뭉친 옷에 박혔으므로. 겨울답게 옷감이 두꺼웠다. 네세라가 어느새 블라우스를 벗은 채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랭기디아의 공격을 막아 냈다. 캐미솔을 드러내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 화살 쏘는 걸 보고 중간에 날 노릴 줄 알았지. 약해 보인다고 얌전히 죽어 줄 줄 알았다면 착각했어.”
“이 제국의 개년, 아악!”
랭기디아의 옆구리에 단검이 박혔다. 허리가 휘청였다. 스란이 피가 배어나는 허벅지를 힐끗하며 씹어뱉었다.
“방금의 답례다.”
“이 어린 것들이!”
“나이 처먹은 게 자랑도 아니고!”
단검 손잡이를 빙글 돌렸따. 칼날이 랭기디아의 몸을 쑤셔 댔다. 랭기디아는 이를 악물었다. 스란을 뿌리치려고 했다. 잘되지 않았다.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계집 둘뿐이기에 낙승을 점쳤건만, 당해 버릴 줄은 몰랐다. 가물가물한 머리로 떠올렸다.
‘여자라고 무시당할 때마다 그 지랄을 떨어 놓고…….’
자신도 여자를 얕보았다는 것이 우스웠다. 제국에는 싸울 줄 아는 여자가 없으리라고 여겼다. 후회가 차올랐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부상자가 있는 쪽이 밀렸으리라. 스란이 롱소드를 치켜들었다. 랭기디아의 목을 꿰뚫을 셈이었다.
올라간 손은 떨어져 내리지 못했다.
“앵지를 죽이지 마.”
‘삐이이’하고 귀울림이 났다. 귓전이 떨릴 지경이었다. 스란의 검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두 귀를 움켜잡았다. 랭기디아로부터 물러섰다. 랭기디아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희망을 찾은 모습이었다.
“동지의 피가 흐른다면 내 말을 들어야만 해.”
앳된 목소리가 종알거렸다. 스란은 깜빡거리는 의식을 붙잡고자 용썼다. 머리가 깨질 듯하고 귀울림이 들리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나타난 사람을 돌아보았다. 열서너 살은 되었을까? 작고 깡마른 소년이 타박타박 걸어왔다. 랭기디아가 반갑게 외쳤다.
“오시르!”
“지금 치료해 줄게, 앵지.”
“됐고, 저 두 년부터 어떻게 좀 해 봐.”
물리치면서도 랭기디아는 포션을 받아 들었다. 뚜껑을 따기가 어려웠다. 아귀힘이 모이지 않았다. 오시르가 엄지손과 검지를 비벼 튕겼다. 병 주둥이에서 코르크 마개가 뽑혀 나갔다. 스란은 랭기디아의 상처가 아무는 꼴을 절망적으로 지켜보았다. 오시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두 년?”
“그래. 저쪽에…….”
랭기디아는 네세라를 가리켰다. 아니, 가리키려 했다. 헛일이었다. 고갯짓한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을 홉떴다. 발목을 삐었을 터였다. 어떻게 달아났는지 몰랐다. 멀리 가지는 못했겠지만, 에브라힐의 구조에 깜깜한 처지에는 쫓기 불편했다. 랭기디아는 가슬가슬한 옆머리를 긁었다. 별다른 힘도 없어 보이던 아가씨였다. 스란만 없애도 괜찮을 성싶었다.
“도망쳤군. 뭐, 좋아. 남은 하나라도 죽이자.”
“하지만 동지인데?”
“동지 아니야. 제국이 자기 나라라고 믿는 모양이니, 제국에 몸 바치게 해 줘야지.”
“앵지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오시르가 팔을 내뻗었다. 집게손가락에 붉은색 반지가 자리했다. 루비일까? 묘한 느낌을 자아내는 재질이었다. 고리 전체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스란을 괴롭히는 귀울림이 커졌다. 스란은 혀까지 깨물며 참았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데!’
네세라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쳤을 리 없었다. 사람을 부르러 갔을 터였다. 퉁퉁 부은 발을 끌고 달리는 중이리라. 네세라 페리튼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스란은 네세라를 믿었다. 어떻게든지, 망할 여자와 이상한 꼬마로부터 시간을 끌면 되었다. 기사단장이 한 명이라도 오면 살 수 있었다.
기사단장. 이에샤가 떠올랐다. 오래된 기억이 뒤따랐다. 석곡궁의 멋들어진 연무장이 되살아났다. 여름이었다. 무더운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새파랬었다. 머릿속의 이에샤가 땀을 훔치며 조잘거렸다.
「브링어가 된 순간부터 내 몸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었어. 아니, 아니다. 내 몸을 완벽하게 다루고 싶어서 온 힘을 끌어모아 손을 뻗는 순간, 브링을 쓸 수 있었어.」
여상한 말투였으나, 숱한 이가 좌절한 일을 입에 담았다. 스란은 ‘타고난 재능으로 속 편한 소리를.’ 하고 받아들였었다. 자신은 맛볼 일 없을 감각이라고 여겼다. 몸을 완벽하게 다룰 필요가 있겠는가? 팔다리를 살살 움직일 뿐으로도 인간은 살았다. 그 쓸데없는 짓을 바라느냐, 바라지 못하느냐가 재능의 차이인 줄 알았다.
두통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제정신을 지키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스란은 간절하게 바랐다. 몸뚱이가 말 좀 들었으면. 문득, 온몸의 근육과 관절과 신경을 지배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끓어올랐다.
============================ 작품 후기 ============================
po스란wer
+) 오후 8시, 내용을 조금 가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