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3화 (3/168)

3화

“발렌타인 공작가에서 아가씨 앞으로 보내온 선물들입니다.”

엘레노어는 끝도 없이 들어오는 선물 행렬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은 사과하겠다. 오늘의 결례에 대해서는 차후에 적절히 보상하도록 하지.’

문득 공작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예고 없는 방문에 대한 보상이라면, 이건 ‘적절’의 범위를 한참 뛰어넘은 것이었다. 그녀를 회유하려는 의도였다면 더더욱 부적절…….

하지만 솔직히 무척 효과적이었다. 순간 몇 달 정도는 더 고생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엘레노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선물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크고 은은한 진주는 처음 봐요, 아가씨!”

“이 드레스는 또 어떻고요. 6개월 전에 예약해도 사기 힘들다는 로덴 부티크 거예요!”

들어온 선물들을 정리하던 하녀들이 감탄을 내질렀다. 하나같이 돈을 주고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는 최고급품이었다.

“그런데 이런 걸 정말 받아도 될까? 나는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아, 공작님께서 절대 돌려받지 않으시겠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처분은 아가씨께 전적으로 맡기시겠다는 전언입니다.”

잽싸게 끼어든 알베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가 또 다른 선물 꾸러미를 내밀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 꽃과 쿠키 상자는 블레이크 후작가에서 보내온 겁니다.”

엘레노어가 얼떨결에 꽃다발과 쿠키 상자를 받아 들었다. 보기보다 제법 묵직했다.

‘대체 이 남자들이 아침부터 왜 이래?’

속으로 중얼거린 엘레노어가 꽃다발에 꽂힌 작은 쪽지를 펼쳐 들었다.

「엘렌에게.

잘 알았어. 아쉽지만 네 뜻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지.

다음 주에 황궁 무도회가 열린다니 곧 볼 수 있겠다. 그때 보자.

아, 선물은 지나가다 네 생각이 나서 샀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우정과 사랑을 담아서,

아드리안 블레이크」

편지를 다 읽은 엘레노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드리안은 별말 없이 엘레노어의 거절을 받아들였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드리안이 몇 번 더 부탁했다면 그에게 유독 약한 엘레노어로서는 그냥 져 줄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무도회라……. 벌써 지루한 사교 시즌이 돌아왔구나.”

공작에게 선물 받은 물건들이 잔뜩 있으니 따로 준비할 것도 없을 듯했다. 에스코트야 늘 그렇듯 드와이트가 해줄 테고.

“스물넷이 되도록 오빠 손 잡고 무도회라니.”

아니,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시무룩해진 엘레노어가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조금 곱슬거리는 금발과 창백할 만큼 흰 피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까지. 절세미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예쁜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드리안도 나도 지금껏 그 흔한 애인 한 명이 없었구나……. 친구라도 이런 것까지 닮을 필요가 있나?”

물론 걔는 ‘안’ 만나는 거고, 나는 ‘못’ 만나고 있는 거지만.

아드리안은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식이었다. 잘생긴 외모, 부유한 집안, 다정하고 친절한 성격까지 그야말로 흠잡을 곳이 없는 신랑감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넘쳐났다. 엘레노어의 기가 꺾일 만큼 화려한 미인들도 그에게 넌지시 추파를 던지곤 했다.

그녀들에게도 관심이 없는 걸 보면, 아드리안의 눈은 하늘 꼭대기에 달린 모양이라고 엘레노어는 생각했다.

“걔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만나려고 그러는지……. 이러다 정말 둘만 남게 생겼어.”

엘레노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드리안도 저도, 참 걱정이었다.

***

무도회 날은 빠르게 다가왔다.

엘레노어는 공작이 선물한 크림색 공단 드레스와 구두, 보석으로 눈부시게 치장했다. 엘레노어를 아주 잘 아는 누군가가 고른 것처럼, 그가 선물한 것들은 전부 엘레노어에게 완벽하게 어울렸다.

“가자, 엘렌.”

드와이트가 제법 의젓하게 팔을 내밀어 엘레노어를 에스코트했다.

드와이트도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힘을 준 차림이었다. 곱상한 얼굴이 평소보다 배로 반짝거렸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요즘 드와이트는 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사 중 하나였다.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드와이트와 엘레노어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무래도 쑥스러운지 드와이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엘렌, 한 곡 출까?”

“됐네요. 아까부터 너를 힐끔힐끔 보는 눈이 많던데, 좋은 시간 보내. 나는 비싼 술이나 잔뜩 즐길 테니까.”

엘레노어가 드와이트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엘레노어는 샴페인 한 잔을 홀짝거리며 드와이트가 아리따운 영애에게 춤을 신청하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쌍둥이 오빠지만 드와이트는 꼭 그녀가 직접 키워 낸 아들처럼 느껴졌다.

“엘렌.”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습관처럼 주변을 살핀 아드리안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안녕, 리안.”

“드와이트는?”

엘레노어가 아무 말 없이 뻣뻣하게 춤을 리드하는 드와이트를 향해 턱짓했다. 웃음을 터뜨린 아드리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럼 네 첫 춤은 내가 함께하고 싶은데.”

푸른빛의 야회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드리안은 동화 속 왕자님처럼 근사해 보였다. 그가 엘레노어를 향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좋아.”

엘레노어는 기꺼이 그의 역할 놀이에 동참해 주기로 했다. 아드리안의 손 위로 엘레노어의 손이 살포시 겹쳐졌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홀의 중앙으로 걸어가 가볍게 서로의 어깨를 감쌌다.

“아, 선물은 고마웠어. 꽃 정말 예쁘더라.”

“다행이다.”

“시에나는 잘 지내고 있어?”

“응. 며칠 떼를 쓰기는 했는데, 한 번 크게 혼나고는 포기한 눈치야.”

“……괜히 되게 미안해지네.”

두 사람은 편안하게 음악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었다. 언제 서먹했었냐는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오늘따라 너 느낌이 조금 다른 것 같아.”

엘레노어를 빤히 내려다보던 아드리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반짝이는 가루를 얹은 눈두덩에, 붉게 칠한 뺨에, 희게 드러난 어깨에 차례로 내려앉는 시선에 엘레노어의 귓바퀴가 살짝 붉어졌다.

“선물 받은 것들이라 그런가 봐. 평소에 입던 거랑은 조금 달라서 어색하지?”

“예뻐.”

아드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낮게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를 스치자 순간 묘한 감각이 온몸으로 찌르르 퍼져 나갔다. 그에게서는 아침의 숲처럼 상쾌한 향기가 났다.

“정말 예뻐, 엘렌.”

아드리안의 두 눈이 사르륵 달콤하게 휘어졌다. 망설임 없는 찬사에 조금 민망해진 엘레노어가 그의 시선을 피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고마워.”

엘레노어가 그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대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머리 위에서 아드리안의 바람 빠진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 곡 더 출래?”

“아니, 이 정도면 됐어.”

노래가 서서히 끝나고,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에게서 조금 떨어져 섰다. 가볍게 서로를 향해 예의를 갖춘 뒤, 두 사람은 나란히 홀의 중심에서 벗어났다.

“또 샴페인이야?”

엘레노어가 지나가던 시종의 트레이에서 재빨리 샴페인 잔을 집어 들자 아드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엘레노어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겨우 두 잔째인걸.”

“작년 파티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어야 해? 너 진탕 취해서…….”

“기억나! 그러니까 그만!”

아드리안이 끄집어낸 흑역사에 엘레노어가 다급하게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거짓말. 안 날 텐데.”

아드리안의 한쪽 입매가 비뚜름하게 솟았다.

사실이었다. 엘레노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다음 날의 끔찍했던 숙취뿐이었다.

“그래서 안 돼.”

아드리안이 그답지 않게 단호한 말투로 엘레노어에게서 샴페인 잔을 빼앗아 갔다.

“주스로 가져다줄게. 기다려.”

엘레노어는 멀어지는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랜만에 좀 알딸딸한 기분을 즐겨 볼까 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할 줄이야.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거리던 엘레노어는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빠르게 뒤돌아섰다. 제게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람을 확인한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발렌타인 공작이었다.

“공작님?”

“에버렛 영애.”

카이델이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엘레노어의 목걸이와 드레스로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 모여드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엘레노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쭈뼛대던 때였다. 엘레노어의 눈앞에 커다란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영애와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주변에서 ‘헉’ 하고 숨을 급히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어쩌면 엘레노어 그녀가 낸 소리인지도 몰랐다.

‘그’ 발렌타인 공작이 춤을 신청했다!

여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탓에 온갖 추문을 몰고 다니던 공작이었다. 그의 정부라도 되고 싶다는 여인들이 줄을 설 정도였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파티장에서 누군가에게 먼저 춤을 청한 적이 없었다.

남색가다, 신전에 순결 맹세를 했다, 잠자리를 함께한 여인은 바로 죽여 정보가 새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엘레노어도 익히 들어온 소문이었다. 그런 카이델이 누군가에게 춤을 신청하다니! 팝콘에 콜라를 찾고 싶은 상황이 아닌가.

그 대상이 엘레노어, 본인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무, 물론…….”

엘레노어가 얼떨결에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짧은 순간 공작의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머릿속이 핑핑 도는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새로운 노래가 연주되기 시작하고 공작의 손이 가볍게 등을 감쌌다.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카이델이 툭 물었다.

그의 발을 밟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엘레노어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네, 무척 아름다웠어요. 오늘 입은 드레스도 공작님이 선물해 주셨던 것이에요.”

“알아.”

카이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스쳤지만, 발아래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엘레노어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잘 어울려.”

“가, 감사합니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움직이는 엘레노어와 달리 카이델은 유려하게 춤을 이끌어 갔다. 의외의 면이었다.

진땀을 흘리며 분투했지만, 엘레노어는 카이델의 발을 수도 없이 밟아 대는 중이었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엘레노어가 힐끗 겁에 질린 눈으로 공작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카이델은 표정 하나, 숨결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발 좀 밟았다고 보복이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조금씩 그와 호흡이 맞아가자 잔뜩 얼어 있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얼음을 깎아 놓은 것 같은 남자인데,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손은 조금 뜨거울 정도였다.

“편한 날짜를 보내 달라고 청했는데.”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가 어깨를 움찔했다.

“곧 보내려고 했어요. 진짜예요. 연회가 끝나는 대로 보낼게요.”

“굳이 번거롭게 편지로 전할 것 있나. 내가 바로 앞에 있는데.”

춤곡이 마무리되려는지 연주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엘레노어의 등을 감쌌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카이델의 굵고 낮은 목소리가 연회장 안에 선명하게 울렸다.

“에버렛 영애, 그대는 언제 내게 시간을 내어 줄 텐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