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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9화 (19/168)

19화

“아, 깜짝이야.”

잠에서 깨어난 엘레노어는 눈앞에 놓인 못생긴 토끼 인형을 보고 소스라쳤다. 눈도 코도 조금 삐뚤어진 인형은 이즈멜이 굳이 선물로 안겨 준 것이었다.

“못생겼어…….”

엘레노어가 토끼 인형의 귀를 쭈욱 잡아당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산세베리아 화분에서 유아용 의자, 벽걸이 달력까지. 이즈멜이 쓸어 담은 것에 어떠한 규칙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부 주겠다는 것을 겨우겨우 거절하고 딱 하나 받아온 것이 이 못생긴 토끼 인형이었다.

그날 그렇게 점쟁이에게서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던 연애 조언을 들은 이즈멜은, 헤어질 때까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동화 한 닢으로 고민을 사다니, 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바보 같은 일이냐며 엘레노어가 혀를 찼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엘레노어가 쭉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블레이크 후작저를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후작님이라면 분명 도와주겠다고 나서실 테지만, 그냥 무작정 손 벌리지는 않을 거야. 이왕이면 서로 도움이 되는 거래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신뢰감은 인상에서부터 시작되는 법. 엘레노어는 평소보다 차분하고 단정한 느낌의 감색 드레스를 걸치고 진주로 된 장신구를 착용했다. 사업설명회나 다름없는 자리라 생각하니 조금 긴장이 되었다.

마차를 타고 블레이크 후작저로 향하는 길, 엘레노어는 창을 열고 익숙한 바깥 풍경을 만끽했다. 어렸을 때는 아드리안과 어울려 노느라 하루가 멀다고 다녔던 길인데, 워낙 오랜만이라서인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한참이나 대로를 달리던 마차가 코너를 돌아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벽돌로 아름답게 쌓아 올린 저택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와, 정말 오랜만이다.”

백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는 아무런 제재 없이 후작가의 경비를 통과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천천히 마차가 멈춰 서고,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블레이크 후작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후작님, 오랜만에 봬요.”

“그냥 클로드라 부르래도. 그새 잊었나 보구나.”

“이상하게 입에 익지를 않네요.”

엘레노어와 클로드가 웃으며 가볍게 포옹했다. 엘레노어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은 클로드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타박했다. 물론 마지막에는 그조차도 스르륵 풀어져 버렸지만.

“대체 이게 얼마 만에 보는 내 딸 얼굴이냐. 응? 자주자주 오라 그리 말했는데 매정하기도 하지. 식사는 했고?”

“아뇨. 아직이요.”

“배고프겠구나. 금방 준비될 테니 바로 식사부터 하자꾸나. 왜 그새 반쪽이 된 것 같으냐. 응? 빠질 살이 어디 있다고.”

클로드는 극성스럽게 엘레노어를 챙겼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엘레노어도 익숙하게 클로드의 유난에 장단을 맞췄다. 후작은 엘레노어를 딸이라 부르며 친아들인 아드리안보다도 살뜰히 챙기곤 했다.

“그동안 잘 지냈고? 하긴, 네 소식은 모를 수가 없더구나.”

“일이 많았죠…….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그래. 특히 리안과 엮인 부분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을 바란다. 이왕이면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방향의 이야기였으면 좋겠구나.”

클로드가 장난스럽게 엘레노어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클로드! 그런 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리안 이놈은 애써 반반하게 낳아 줬더니 얼굴값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스무 해가 넘도록 네 맘 하나 얻지를 못하다니.”

클로드가 작게 툴툴거렸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금세 둘을 위한 식사가 준비되었다. 엘레노어의 취향과 입맛이 완벽히 반영된 식탁이었다.

“정말 내 딸 하지 않으련? 내가 네 아버지보다 못한 게 무어냐. 돈도 내가 더 많고 성격도 내가 더 좋고 얼굴도 내가 더 잘났어. 그렇지?”

“하하, 아버지가 들으시면 화내시겠는데요.”

“그놈이 딱 하나 나보다 잘난 게 있는데, 그게 너처럼 귀엽고 예쁜 딸이 있다는 거다. 복도 많지.”

블레이크 부자는 엘레노어를 잘 먹이는 데 누구보다 진심인 사람들이었다. 열두 살 무렵, 후작가에서 여름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니 맞는 옷이 하나도 없어 옷을 전부 새로 지어야 했다.

“다 먹은 게냐? 더 먹지 않고?”

“너무 먹어서 배가 볼록 나왔어요.”

긴 대화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후작의 집무실에 마주 앉아 차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 딸이 편지까지 보내 만남을 청한 이유가 뭔지 들어볼까?”

클로드가 인자하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엘레노어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막상 말하려니 어쩐지 쑥스럽기도 하고 약간은 긴장도 되었다. 한 번 크게 심호흡한 엘레노어가 당차게 입을 열었다.

“제가 사업을 하나 해 볼까 해요.”

“사업이라고?”

클로드가 놀란 듯 눈을 홉떴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한번 도전해 보고 싶어졌어요. 클로드가 사업에 대해서는 전문가시니까 도움을 청하고 싶었어요.”

“잘 찾아왔다. 우리 딸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줘야지. 필요한 건 뭐든 말만 하려무나.”

클로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무엇이든 해 주겠노라 약속했다.

“자금이 필요한 게냐? 아니면 인력?”

그는 엘레노어보다 더 적극적으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그런 일방적인 호의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엘레노어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일방적으로 클로드의 도움을 받기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를 사업 파트너로 생각하고 신중하게 판단해 주세요.”

엘레노어의 말에 클로드의 눈빛이 변했다. 인자한 미소는 여전했지만, 그 시선은 한층 진지하고 날카로워진 채였다.

“사업 파트너로 대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를 먼저 묻고 싶구나, 엘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 손을 깍지 껴 잡은 클로드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긴장으로 대번에 얼어붙었다.

“네 대부이자 네 아버지의 절친한 친우로서 나는 네 모든 선택을 지지한다. 널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줄 거란다. 엘렌, 너도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엘레노어의 긴장을 느꼈는지 클로드의 어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사업 파트너로 너를 상대하게 되면 상황이 좀 달라진단다. 나는 블레이크 후작이자 브로든 상단주로서 널 대해야만 해. 철저히 사업의 잠재력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익을 따져가며 네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어. 숫자 놀음이지.”

“충분히 이해했어요, 클로드.”

“어쩌면 네 마음을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엘렌. 제안을 거절할 가능성이 작지 않으니 말이야. 난 일에서는 야박한 사람이거든. 그래도 괜찮으냐?”

클로드의 얼굴에 근심이 떠올랐다. 묘한 시선으로 엘레노어를 바라보던 그가 다시 한번 힘주어 물었다.

“상처받지 않을 수 있겠어?”

“네.”

엘레노어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 말린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린 클로드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허락했다.

“그래, 그럼 한번 나를 설득해 봐라.”

***

엘레노어는 며칠 밤을 꼬박 새워 가며 준비한 사업 계획을 차분히 발표했다. 사업의 필요성과 기대효과, 시장에 대한 전망과 판매 계획까지. 짧은 시간 준비한 것치고는 무척 알찬 기획안이었다.

중간중간 날카롭게 치고 들어오는 클로드의 질문에도 엘레노어는 매끄러운 답을 건넸다.

“이건 뭐지?”

“교재의 초안이에요. 이렇게 개념이 정리되어 있고, 간단한 연습문제와 응용문제가 함께 구성되어 있어요.”

클로드는 몇 번이고 엘레노어에게 홀로 생각해 낸 것이 맞는지, 어디서 영감을 얻은 것인지를 캐물었다. 엘레노어에게 학습지는 너무나도 익숙한 개념이지만, 역시 이곳에서는 낯설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글쎄. 확실히 신선한 아이템이기는 하구나. 일리도 있고.”

클로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번 해 보라 말하면서도 내심 엘레노어의 갑작스러운 변덕이려니 생각했었다.

어른 흉내를 내며 야무지게 말하는 게 귀여워 두고 보려던 마음은, 엘레노어의 설명이 이어지며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어느 순간 그는 완벽한 사업가의 태도로 엘레노어가 가져온 아이템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클로드?”

“듣고 있으니 멈추지 말고 계속 이야기하거라. 내 나름대로 계산하는 중이니까.”

충분히 설득력 있는 제안이었고, 엘레노어의 말대로 흘러간다면 기대할 수 있는 수익도 컸다. 클로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업이 커진다면 아예 자체적으로 인쇄소를 차리고 전국에 지부를 두어 범위를 확장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기는 하지만, 아카데미 입시는 비단 제국만의 이슈도 아니니 그 이상으로 뻗어 나가는 것도 허튼 꿈은 아니리라.

“하지만 신선하다는 건 생소하다는 뜻이지. 나이 든 귀족들은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기도 하고…….”

“주 고객층이 귀족이기는 하지만, 더 자세히 말하자면 30대 귀족들이에요. 아카데미 입시를 준비할 만한 나이의 아이를 둔 부모님일 테니까요. 충분히 유행에 민감한 세대라고 생각해요.”

엘레노어가 주 고객층의 범위를 확 좁히며 반박하자 클로드는 곧바로 다른 지점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미 가정교사를 두고 있지. 그들이 지금껏 해 온 방식을 두고 새로운 교재와 교육 과정을 선택하려 할까?”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려 하시는 분들도 분명히 계시겠지요. 하지만 아마 대부분 지금의 교재들이 아이들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데는 동의하실 거예요. 책이 많고 두꺼워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성가실 때가 많고요. 분명 환영하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클로드에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준 엘레노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조금 냉정한 말이기는 하지만, 제가 생각해야 할 타깃은 가정교사들이 아니에요. 학부모들이죠. 가정교사들은 결국 학부모들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어요. 일단은 고용주니까요.”

“확실히 그렇군. 그 말이 맞아.”

클로드가 엘레노어의 주장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클로드가 순간 감상에 젖었다.

말랑말랑한 복숭아 같던 꼬마가 언제 이렇게 큰 걸까. 기특하기도 하고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다.

엘레노어의 사업에 투자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클로드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물론 최근 네 명성이 자자하다는 건 안다. 에버렛 백작가에 네 도움을 청하는 편지가 산처럼 쌓였다는 것도 들었지. 하지만 깐깐한 학부모들이 네 이름만으로 선뜻 지갑을 열까?”

“타당한 질문이세요. 저도 그 부분을 제일 고민했거든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클로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마땅한 전략은 있고?”

엘레노어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번져 갔다. 완벽하게 자신감과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럼요. 물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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