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어떤 전략이지?”
“시간적인 여유가 부족해서 일단은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보았어요.”
“세 가지씩이나?”
엘레노어가 테이블에 놓인 교재 초안을 탁탁 두드려 정리하며 말했다.
“우선은 샘플이요. 무료로 일정 기간 체험하게 해 주는 거예요.”
“음, 그건 확실히 필요하기는 하겠구나. 기간은 어느 정도?”
“일주일마다 한 번씩 배송이니, 3주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3주라……. 그 정도 투자라면 비용적으로도 나쁘지 않지.”
판촉 전략의 스테디 오브 스테디라 하면 역시 무료 체험이었다.
무료라는 말은 사람을 솔깃하게 하는 힘이 있는 단어였다. ‘첫 달 무료’라는 말에 낚여 결제로 이어진 경험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교재의 내용과 유용성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낯설더라도 일단 써 보면 분명 새로운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두 번째는 그럼?”
“얼리버드 세일이요.”
“얼리…… 뭐라고?”
“간단히 말하면, 일찍 신청할수록 저렴하게 구독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대상으로 하는 구매층은 귀족들이다. 할인이라는 건 큰 의미가 없어.”
“맞아요. 그래서 애초에 가격대를 그리 낮지 않게 설정했어요.”
“그래. 그런데 뜬금없이 웬 할인이냐?”
엘레노어가 싱긋 웃으며 설명했다.
“고민하는 기간을 확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아무리 귀족들이라고 해도 10실버로 살 수 있는 걸 조금 늦어서 14실버를 주고 사야 한다면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그것도 그렇지.”
“체험 기간 내에 교재 구독을 신청한 사람에게만 할인 혜택을 주는 거죠.”
뒤집어 말하면 체험 기간 이후에는 가격을 조금 올리겠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린 엘레노어가 작게 속삭였다.
“우리 공주님에게 이런 사업 감각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진작 스카우트해야 했는데, 눈앞에서 인재를 놓쳤어.”
클로드가 감탄했다. 그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 마지막 전략은 뭐지?”
어느새 엘레노어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변한 클로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엘레노어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전생에서 여진의 통장을 수없이 혼수상태에 이르게 한 무시무시한 전략.
“광고할 때부터 판매 부수에 제한을 뒀다는 걸 강조하는 거예요. 한정적인 수량만을 판매하는 거죠.”
선착순, 한정 수량, 리미티드, 마감 임박.
늘 그녀의 이성을 허물어뜨리며 연전연승을 거둔 강력한 무기였다.
살 생각이 그다지 없다가도 저 말만 붙으면 어쩐지 안 사면 안 될 것 같고, 안 사면 나만 손해인 것 같고……. 그렇게 약탈당한 월급이 다 얼마였던가.
엘레노어는 이번만큼은 그것을 역이용해 보자고 다짐했다.
“어느 정도 시간에 쫓기는 듯한 압박감을 주면서, 남보다 뒤처지고 싶지 않아 하는 귀족들의 심리를 부추기겠구나. 영리한 전략이야.”
클로드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기쁜 마음으로 지원하지. 당장 필요한 비용이라면 신문 광고 비용, 초반 인쇄 비용 정도가 되겠군. 그렇지?”
마음의 결정을 내린 클로드가 곧바로 계산에 들어갔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숫자 이야기에 엘레노어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렌, 네가 교재를 집필하면 브로든 상단이 그것을 유통하고 판매할 권리를 얻는 거다. 독점적으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에 대해서는 브로든이 책임질 의무가 있고.”
“네…….”
“수익 분배 비율은 엘레노어 네가 6, 브로든 측이 4, 동의하나?”
“괜……찮은 것 같은데요?”
엘레노어가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클로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이러면 안 되지만, 딸아. 처음 부르는 값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돼.”
“클로드를 믿는걸요.”
“사람을 함부로 믿어서도 안 되고. 다른 건 야무지게 잘하면서 왜 제일 중요한 정산 문제에 무른 것이냐. 속상하게.”
“아……!”
“한 번만 다시 묻겠다. 6 대 4, 동의하나?”
사실 그 정도도 나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엘레노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부족하다 이거지. 그래, 원하는 비율을 불러 보려무나.”
“7……?”
엘레노어가 소심하게 속삭이자 클로드가 눈썹을 찡그리며 눈을 부릅떴다.
이게 아닌가.
엘레노어가 아주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그럼, 8……?”
“8 대 2라. 브로든에서는 절대 그렇게 후하게 내어주는 법이 없지만, 오늘 네 제안은 나를 몇 번이고 감탄하게 했으니 그 정도는 받을 만하지. 좋아.”
클로드가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금은 얼마를 생각하고 있지?”
“생각 안 해 봤는데요.”
“그럼 지금 생각해 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0……골드?”
“500.”
엘레노어에게 맡겨 두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클로드가 냅다 내질렀다.
“500골드로 하지. 담이 작은 건 네 아빠를 빼닮았구나. 네 아빠도 돈 내기만 하면 절대 1실버 이상 거는 법이 없었지.”
“하지만 당장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이 귀엽고 순진한 공주야. 네 아이디어의 값은 네가 제대로 챙겨야 하는 거란다.”
클로드가 엘레노어의 뽀얗고 말랑한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놓았다.
“냉철한 사업 천재인 줄 알았더니, 다시 말랑 복숭아 같은 딸로 돌아왔구나.”
나야 네 그런 모습이 더 좋지만, 세상이 얼마나 험한 곳인지 아느냐? 응?
다시 원래의 팔불출로 돌아온 클로드가 기나긴 잔소리를 시작했다. 엘레노어가 한 달에 한 번은 꼭꼭 후작저를 방문하겠다고 나서야 그녀는 후작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야. 잘 되어서 후작님께도 좋은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
“오늘 일찍 마치게 해 주면 안 돼요? 숫자도 싫고 바르칸어도 싫어요.”
문제 풀이에 열을 올리는 데미안과 시에나와 달리, 지루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의 루카스가 엘레노어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엘레노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일찍 마치면 뭐 할 건데?”
“음……. 구경? 전에 오리 보여 주기로 약속했잖아요!”
루카스의 말에 시에나와 데미안이 고개를 들었다. 크고 맑은 눈동자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한동안 밤잠을 줄여 교재 연구와 수업 준비에 몰두했더니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과 밖에 나가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피곤했지만, 기대에 찬 시선을 보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단단히 약속을 해두기도 했고.
‘그냥 뒤뜰인데 별일이야 있겠어?’
엘레노어가 수락하는 대신 조건을 내걸었다.
“좋아. 세 사람 다 단어 시험에서 80점 이상 받으면 수업 일찍 끝내고 다 같이 연못 구경 가는 거로 하자.”
그러자 시에나가 번쩍 손을 들고 항의했다.
“선생님, 그건 저희한테 너무 불리한데요. 저희에게는 루크가 있잖아요.”
루카스가 발끈했다.
“내가 뭐 어때서! 나도 할 수 있거든?”
“흥, 평소의 너를 돌아봐.”
시에나의 말에 데미안이 동의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틈만 나면 티격태격하는 세 아이를 보면 엘레노어가 제안했다.
“그럼 이건 어때. 셋이 한 팀으로 협동해서 총점 240점을 만드는 거야.”
서로 눈짓을 주고받던 아이들이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는지 슬며시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아. 그러면 10분 뒤에 바로 시험 칠 거니까, 집중해서 열심히 외우는 거다? 시-작!”
역시 적절한 보상이 중요해.
엘레노어는 딴짓 한번 하지 않고 단어 외우기에 열중인 아이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바짝 집중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시간 끝!”
“안 돼! 1분만 더 주세요!”
“약속은 약속이지. 자자, 책 덮고.”
짝짝 손뼉을 쳐 주의를 환기한 엘레노어가 시험지를 한 장씩 나눠 주었다.
“5분 뒤에 채점할게.”
낚아채듯 시험지를 받아 간 아이들의 연필 소리가 다각다각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외운 것을 잊어버릴세라 급하게 써 내려가는 모습은 한국이나 이곳이나 똑같아 웃음이 났다.
“매겨 볼까?”
빨간 색연필을 든 엘레노어가 제일 먼저 시험을 끝낸 데미안의 것부터 채점하기 시작했다.
정답, 정답, 또 정답…….
모범생답게 데미안의 시험지는 동그라미로 가득 찼다.
“하나 실수했네. 95점.”
이어 시에나도 90점을 받으면서, 루크가 55점을 받으면 원하던 대로 평소보다 일찍 수업을 마치고 뒤뜰을 산책할 수 있게 되었다.
틀렸고, 틀렸고, 이건 맞았고…….
오답과 정답의 접전이었다. 아슬아슬한 전투를 지켜보는 아이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루카스, 60점!”
“와아!”
엘레노어가 점수를 큼지막하게 써넣자마자 아이들의 얼굴이 낮처럼 환해졌다. 너무 피곤했던 탓에 내심 실패하기를 바랐던 엘레노어도, 막상 너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이야. 나가자.”
날씨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수선화가 줄 맞춰 심긴 정원을 지나 잘 가꾸어진 잔디밭을 가로지르자 작은 연못이 나왔다.
“오리다!”
노랗고 보송보송한 오리 무리를 발견한 루카스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오리 안아도 돼요?”
“안 돼.”
“그냥 만지는 건요?”
“그것도 안 돼.”
야외로 나온 순간 아이들의 텐션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엘레노어가 큰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마음껏 놀되, 연못이나 오리한테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돼. 알겠지?”
“네!”
“여기 앉아 있을 테니 꼭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해.”
“알았어요.”
데미안과 루카스, 시에나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조잘거리며 연못 쪽으로 다가갔다. 아이들끼리는 확실히 빨리 친해지는지, 어느 순간 세 아이에게서는 어색함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은 말을 거의 하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셋은 밸런스가 잘 맞았다. 시에나와 루카스가 으르렁거리고, 데미안이 그 가운데서 차분하게 중심을 지키는 양상이었다.
“다들 정말 착해. 순하고, 귀엽고.”
그러니 선생 노릇도 하는 거지 아니었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엘레노어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살랑살랑 엘레노어의 머리를 흩트려 놓았다. 밖에 나와 있으니 긴장이 사르르 풀어지며 몸이 노곤해졌다. 눈이 살살 감겼다. 따끈한 햇빛, 적당한 바람,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풍덩!
물에 빠지는 소리.
……뭐?
엘레노어가 눈을 번쩍 떴다. 순식간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모골이 송연해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선생님! 데미안이 물에 빠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