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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22화 (22/168)

22화

혹시 제 무심한 말이 되레 상처를 준 것일까.

카이델은 문득 엘레노어가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때로는 표현하지 않으면 무엇도 전해지지 않아요. 전해지지 않으면 무엇도 바뀌지 않고요.’

카이델의 가슴이 크게 술렁였다. 엘레노어가 방금 제가 하는 말을 들었더라면 분명 끌끌 혀를 찼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말을 조금 뒤집으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죠. 제대로 표현되어 올곧게 전해진 진심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고요.’

엘레노어라면 뭐라고 말했을까.

카이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마 그녀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다. 카이델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리고 데미안, 너는 얼마든지 나를 불편하고 번거롭게 해도 된다. 그게 내 역할이야. 너는 내 어린 동생이고, 나는 네 보호자니까. 너는 내게 어떤 것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너는 내게 민폐일 수 없으니.”

어색하고 간지러웠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도 같았다. 보지 않아도 데미안이 놀란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을 것이 훤했다. 하지만 그렇게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재밌게 놀더라도 안전에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 오늘은 정말 위험했어.”

“……네.”

“그래, 자라.”

습관적으로 무뚝뚝한 인사를 건넨 카이델이 흠칫하며 덧붙였다.

“좋은 꿈 꾸고.”

카이델의 말과는 정반대로, 데미안은 분홍빛으로 뺨을 물들인 채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대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구름 위에 누워 있는 것도 같았다.

정말이지 이상한 밤이었다.

***

“으으…….”

너무 추워. 머리도 너무 아파.

늦은 새벽 눈을 뜬 엘레노어가 덜덜 떨며 몸을 웅크렸다.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불을 덮어쓰자 이번에는 얼굴에 열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낮에 차가운 물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로 한참을 정신없이 덜덜 떨었던 것이 문제였다. 온몸이 불덩이였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도저히 안 되겠어.’

엘레노어는 설렁줄을 당기기 위해 팔을 뻗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제발 닿아라.’

덜컥, 덜컥.

몇 번의 시도 끝에 엘레노어는 하녀를 부르는 데 성공했다. 엘레노어의 이마를 짚어본 하녀가 기함하며 방의 불을 밝혔다.

“어머, 열이 너무 높은데…….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의원을 부를게요.”

하녀가 다시 한번 설렁줄을 당겨 다른 사용인들을 호출했다.

“나 너무 추워. 이불 좀 더 줘.”

“추우시죠. 하지만 열부터 내리는 게 먼저예요. 몸을 닦아 드릴게요. 식은땀이 많이 나네요.”

새벽 내내 하녀 몇 사람이 붙어 곁을 지켰고, 혼절한 엘레노어의 기억에는 없지만 의원도 다녀갔다. 억지로 삼킨 쓴 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몸 상태가 한결 나았다. 여전히 미열이 있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요즘 많이 무리하셨는데, 그렇게 덜덜 떨기까지 하셨으니 병이 오지 않을 수가 있나요. 오늘은 침대에서 꼼짝도 하시면 안 돼요. 푹 주무세요. 아셨죠?”

“알았어.”

“좀 더 주무세요. 드시기 편하게 수프를 끓여 올게요.”

“응.”

그래, 요즘 좀 무리하긴 했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인 엘레노어가 눈을 감았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일 생각 같은 건 비우고 푹 쉬는 게 현명할 듯했다.

그때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엘레노어가 힘없이 대꾸했다. 하지만 잠시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큼큼, 목을 가다듬은 엘레노어가 최대한 크고 선명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들어와도 괜찮아.”

그제야 끼이익, 느릿하게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한 발짝을 조심스럽게 내디딘 이는, 카이델이었다. 문간에 선 그는 방을 둘러보는 것도 실례라는 듯, 발끝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작님?”

“내가 들어가는 건 실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은가?”

엘레노어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약간 당황한 그녀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그제야 문을 닫은 카이델이 천천히 엘레노어를 향해 걸어왔다. 떠나려 했는지 완벽하게 채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출발하려고 하셨군요. 배웅하지 못해 죄송하게 되었어요.”

“물어보니 심하게 앓았다고 하더군. 아마 어제…….”

“이제는 괜찮아요. 요즘 무리해서 몸이 약해져 있었나 봐요. 데미안은 괜찮나요?”

“괜찮아.”

카이델이 제 입술을 짓씹었다. 꼭 엘레노어가 아픈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엘레노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그대도 물에 빠졌었는데, 그걸 완전히 잊고 있었던 내가 빌어먹게 한심해서.”

옷이라도 벗어 건넬걸. 곧바로 따뜻한 담요를 가져와 몸을 감싸줄걸. 적어도 괜찮으냐고, 다친 곳은 없냐고 물어라도 볼걸.

카이델의 얼굴이 후회로 일그러졌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당연한 일이었어요. 데미안이 물에 빠졌고 다들 놀란 상황이었잖아요.”

“하지만…….”

“공작님, 저는 정말 서운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죄송한 마음뿐인걸요.”

고개를 내젓던 엘레노어가 밀려오는 두통에 움찔했다. 뒷골이 지잉 울리는 느낌이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활짝 웃자, 카이델의 표정의 오히려 더 어두워졌다.

“괜찮다는 내 말에도 그대가 계속해서 사과한다면, 나도 미안할 필요 없다는 그대에게 계속해서 사과할 수밖에.”

카이델이 단호하게 말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니 내내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뿐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해 주셔서 감사해요.”

“나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온 거야.”

“네? 저한테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가 제게 고마울 게 무언가.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내 동생을 구해줘서 고마워. 어제 그 말을 하지 못했던 게 마음에 계속 걸리더군.”

“그건…….”

감사받을 만한 일이 전혀 아니었어요.

반박하려는 엘레노어의 말문을 카이델이 틀어막았다.

“고마운 건 그냥 고마운 거야.”

그런가? 아닌 것 같은데, 듣다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엘레노어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꼿꼿한 자세로 풍채 좋게 서 있는 보고 있으니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저, 그러면 공작님.”

카이델이 왜 그러냐는 듯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막상 부르기는 했는데 입을 열자니 머뭇거리게 되었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카이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아이들이 계속 실내에서 공부만 하다 보니 따분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마구 뛰어놀아야 할 나이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확실히 야외 활동을 하게 되면 저 혼자 아이들을 통솔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데미안이 물에 빠졌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엘레노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돼.”

불끈 의지를 다진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똑바로 마주 보며 물었다.

“아카데미 실기 과목 중에 체술이 있는 것 아시죠?”

“알아.”

“혹시 공작님께서 아이들의 선생님이 되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예상하지 못한 말에 카이델의 표정이 기이하게 비틀렸다. 선생님이 되어 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카이델이 단칼에 엘레노어의 말을 거절하려 입술을 뗐다.

“2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안 될까요?”

그것을 눈치챈 엘레노어가 다급히 카이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카이델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의 시선이 제 소매를 꼭 붙잡은 새하얀 손으로부터 초롱초롱 빛나는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로 천천히 움직였다.

“어려울까요? 2주에 한 번인데? 진짜 진짜 잠깐인데?”

엘레노어가 소매를 쥔 손을 흔들흔들하며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홍시처럼 물러진 카이델의 심장이 철퍽,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안 되는데. 정말 바쁜데. 아이들을 대하는 건 끔찍이도 자신 없는데.

엘레노어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도저히 안 된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카이델의 심장이 쿵쿵 힘차게 박동했다.

“네? 공작님…….”

공작님.

엘레노어가 그를 부르는 말을 들은 순간 카이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스쳤다.

내내 거슬렸던 것. 그리고 내심 부러웠던 것.

카이델의 두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럼 이렇게 하지.”

“네?”

“내가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면, 공평하게 그대도 내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걸로.”

무슨 거창하게 소원씩이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엘레노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도 있겠다, 돈도 있겠다. 전부 다 가진 그가 설마 쥐뿔도 없는 저를 탈탈 털어가기야 하겠는가.

“좋아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요.”

“2주에 한 번, 두 시간으로 하지. 당연히 그대도 참관할 테고.”

“감사해요, 공작님!”

카이델의 입에서 승낙의 말이 떨어졌다. 내심 그가 거절하리라 생각했던 엘레노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야외에서 실컷 땀도 빼고, 실기 과목도 준비하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그럼 공작님은 제가 뭘 해드리길 원하세요?”

약속은 약속.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보며 물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요구할 생각이었기에 소원까지 운운했는지, 참을 수 없이 궁금했다.

쑥스러운 듯 잠시 머뭇거리던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와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기를 원해.”

“네?”

블레이크 소후작처럼. 따라붙는 속마음을 꿀꺽 삼켜낸 카이델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카이델이라고 불러. 나는 그대를 엘레노어라 부를 테니.”

***

아니, 이름 그게 대체 뭐라고 그 아까운 소원을 써? 따지고 보면 자기는 공작이고 나는 백작 영애인데, 맞먹으면 자기만 손해지.

며칠이 지났지만, 엘레노어는 아직도 뜬금없는 소원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마차 안에 나란히 앉아 있던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옆얼굴을 슬쩍 살피며 물었다.

“그냥. 역시 사람은 생긴 것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구나……. 그런 생각.”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롭고 냉철할 것 같은 사람이 실은 제 실속 하나 챙기지 못하는 맹탕이라니. 황태자가 씀씀이 큰 호구라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다들 얼굴값을 못해.

“그나마 리안, 네가 좀 나은가?”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 길고 풍성한 속눈썹, 곧게 뻗은 콧대와 예쁜 입술을 빠르게 훑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았지만 정말 잘난 얼굴이었다.

아드리안이 픽 웃었다.

“뭐가?”

“아냐. 너도 후작님 말 하나 거절하지 못하고 여기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비슷해…….”

“거절하지 못한 게 아니라 거절하지 않은 거야.”

아드리안이 다리를 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 아버지 말을 거절하는 게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 그래도 이 경우엔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 맞아.”

“내 비서 일을?”

엘레노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응. 제법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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