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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23화 (23/168)

23화

엘레노어가 고열로 쓰러졌다는 걸 들은 후작은, 일을 거들 비서를 한 명 붙여 주겠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교재의 초안을 만드는 일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정신없이 바빴기에 엘레노어는 기쁜 마음으로 후작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안녕, 엘렌.”

그리고 후작이 붙여준 비서는, 아드리안이었다.

후작가의 후계자를 일개 백작 영애의 비서로 보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후작은 뜻을 번복하지 않았고, 아드리안의 뜻은 제 아버지보다도 더욱 완고했다.

‘힘들어서 뻗을 만큼 부려 먹으면 어련히 알아서 포기하겠지.’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을 정말 제 수족처럼 부렸다.

엘레노어가 쿠키를 와작와작 씹으며 내용을 불러주면, 아드리안은 반듯하게 앉아 그것을 빠르게 받아썼다. 불평 한번 없이 온순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글씨는 또 얼마나 반듯한지, 엘레노어가 만든 샘플보다 몇 배는 깔끔해 보였다.

‘음성인식……. 편하다.’

아드리안의 짜증을 이끌어 내보려 엘레노어는 별별 자세를 다 취해 보았다. 푹신한 쿠션에 삐딱하게 몸을 기대기도 하고, 아예 소파에 발라당 드러눕기도 하며 오만방자한 아가씨 흉내를 냈다.

하지만 엘레노어가 노력할수록 아드리안의 표정은 밝아지기만 했다. 제가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라는 얼굴이었다. 심지어는 곯아떨어진 엘레노어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그녀가 자는 동안 자질구레한 문서를 전부 깔끔하게 정리해 놓기도 했다.

‘타고난 비서 체질이군.’

결국,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을 내쫓는 일을 포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드리안은 겨우 일주일 동안 엘레노어를 그가 주는 편안함에 철저히 길들였기 때문이다.

‘여우인지 강아지인지 모르겠네.’

엘레노어는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는 아드리안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창으로 바깥을 힐끔 내다본 아드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일하러.”

***

“학습지 샘플 받으러 왔는데요.”

“아, 따라와요.”

인쇄소에 들어선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이 직원의 뒤를 따랐다. 퀴퀴한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건물 안에 가득했다.

“일단 첫 1주일 치 분량입니다. 300부 찍어냈고, 파본 대비해서 서른 장 더 뽑아두었어요. 파본이 있을 리 없겠지만.”

“인쇄 상태가 훌륭하네요. 찢어지거나 구겨진 것도 없고, 잉크 번짐도 거의 없고요.”

“말도 마십시오. 옆에 계신 남자분이 틈만 나면 달려와 어찌나 볶아대던지, 다들 혼쭐이 났어요. 이렇게 깐깐한 손님은 정말이지 처음입니다.”

엘레노어가 곁에 선 아드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이 머쓱한지 뒷덜미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런 기특한 짓을.

“어머, 아드리안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실례를 저지른 게 아닌지 걱정이 되네요.”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에게 비싼 밥이든 인센티브든 단단히 챙겨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 바로 들고 가실 겁니까?”

“아니요. 오늘은 파본이 있는지만 점검하고, 가져가는 건 나중에 브로든 상단분들이 오실 거예요.”

“도울 손이 필요하시면…….”

아드리안이 직원의 말을 잘라내며 대답했다.

“감사하지만 됐습니다. 많지 않은 양이니 저희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저는 일이 바빠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직원이 방을 떠나고 둘만 남자 엘레노어가 물었다.

“왜 거절했어? 같이 하면 더 빨리 끝낼 수 있었잖아.”

“그래서 거절했어.”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보며 씩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너랑 오래 있고 싶어서.”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요즘 아드리안에게 이상한 취미가 생긴 것 같다. 어디서 뭘 보고 오는 건지, 아주 요망해졌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행동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했다면 며칠 잠을 설쳤을 것이다. 어쩐지 조금 괘씸해진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파릇파릇한 녀석이 심장을 아주 그냥 들었다 놨다 하며 놀려 먹는다 이거지…….’

아드리안은 책을 50부씩 묶어둔 매듭을 솜씨 좋게 풀어 나갔다. 물끄러미 그런 그를 보던 엘레노어가 심술궂게 웃으며 물었다.

“나랑 오래 있고 싶어?”

“응.”

아드리안이 곧바로 대답했다. 엘레노어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더 오래 같이 있을 방법, 가르쳐 줄까?”

“뭔데?”

아드리안이 허리를 펴고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진심으로 궁금해 보이는 눈이었다.

“이거 너 혼자 다 하면 돼.”

창틀에 걸터앉은 엘레노어가 곱게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그래.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다 해야겠네.”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린 아드리안이 일하기 편한 자세를 잡아 앉으며 대답했다. 그는 성실한 일꾼처럼 책을 펼쳐 들고 낱장 하나하나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정말 저 혼자 일을 다 처리할 심산인지, 퍽 진지한 얼굴이었다.

당황한 엘레노어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리안, 장난으로 한 말이야. 알지?”

“모르겠는데.”

“장난이었어. 같이 해.”

“됐어. 종이에 손 다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엘레노어를 아드리안이 제지했다.

“그럼 난 뭐해?”

“거기 앉아서 명령해 줘. 까칠한 공주님처럼.”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보며 피식 웃었다. 공주 취급은 블레이크 부자가 똑같은데, 그 결은 미묘하게 달랐다. 후작이 그녀를 어화둥둥 떠받든다면, 아드리안은 제 몸을 낮춰 그녀를 우러러보았다.

아드리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엘레노어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내가 공주면 너는 뭔데? 왕자? 기사?”

“뭐든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

지금은 시종에 가깝지 않나 싶긴 한데…….

아드리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시종과 공주가 이어지기란 쉽지 않을 테니 아무래도 곤란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드리안의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엘레노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신분이나 직업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더군다나 내가 공주면 돈도 있겠다, 명예도 있겠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아드리안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그가 약간 긴장된 얼굴로 엘레노어를 보며 물었다.

신분도, 직업도 상관이 없다니. 그럼 역시 성격인가.

“그럼 뭐가 중요한데?”

“얼굴.”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남자는 얼굴이지.”

허를 찔린 아드리안이 멍하니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얼굴……. 얼굴이라 이거지.’

아드리안은 평생 제 외모에 나름의 자부심을 품고 살아왔다. 그는 정상적인 심미안의 소유자였으므로 제 얼굴이 꽤 그럴싸하다는 것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사실 그의 심미안에 커다란 결점이 있었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보다 먼저 외모에 대한 칭찬을 건넸으니까.

문제는 공작과 황태자 역시 외모로는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들이었다. 그중 누가 엘레노어의 취향에 부합하는지는 알 수 없고 말이다.

아드리안이 약간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눈에 내 얼굴은 어떤데? 봐줄 만해?”

뭐야, 답정너인가?

엘레노어가 잠시 황당한 얼굴을 했다. 아드리안은 진지한 얼굴로 엘레노어의 대답을 촉구했다. 그가 평생 들은 외모에 대한 찬사를 종이에 기록한다면 백과사전 전집 정도는 될 것 같은데, 굳이 또 듣고 싶은 걸까.

고개를 갸웃한 엘레노어가 애매한 어투로 대답했다.

“뭐…… 그럭저럭 봐줄 만한 정도이기는 하지.”

엘레노어의 목소리에는 누구라도 알아챌 만큼의 장난기가 묻어 있었지만, 충격에 감싸여 홀로 깊은 고민에 빠진 아드리안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너에게만 맡겨 두면 종일 걸리겠다. 같이 해.”

“어? 어, 그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서 끝내고 저녁 먹으러 가자. 오늘은 내가 살게.”

“그렇구나…….”

“다음 주부터 신문 광고야. 아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거야. 엄청 부려 먹을 거니까 미리 든든하게 먹어 둬.”

이번엔 대답도 없었다.

미묘한 아드리안의 반응에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뒤늦은 사춘기라도 온 걸까. 엘레노어는 요즘 부쩍 아드리안의 감정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

‘날씨라도 타나 보지, 뭐.’

엘레노어는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고 열심히 인쇄물을 검수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드리안의 속은 시시각각 타들어 가고 있었다.

***

“저, 데미…….”

수업이 끝난 뒤, 마차를 기다리던 시에나와 루카스가 데미안에게 쭈뼛쭈뼛 다가섰다. 시에나가 루카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미안. 조심했어야 했는데…….”

“앞으로 위험한 장난은 치지 않을게.”

시에나도 루카스를 따라 사과를 건넸다. 두 아이는 그날 이후로 한참을 의기소침해 있었다.

“……괜찮아.”

데미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두 친구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애초에 셋이 놀다 벌어진 일이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었고, 조심하지 않은 제게도 잘못이 있었다.

시에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프지는 않았어?”

데미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갈 때 옷이 젖어서 추웠겠다.”

“그날은 여기서 잤어. 선생님이랑 형이랑.”

데미안이 차분한 목소리로 폭탄을 사뿐히 투척했다.

쿠구궁.

시에나와 루카스의 자그마한 얼굴에 쩌저적, 금이 갔다.

“뭐, 뭐라고?”

“선생님이 자고 가라고 하셨어.”

비상이다. 그야말로 이건 비상사태다.

시에나와 루카스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잘못한 게 있으니 데미안에게 전처럼 마구 따지고 들 수도 없었다.

“그래서, 여기서 자고 갔다고? 정말? 너희 형까지?”

루카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데미안에게 재차 물었다. 시에나의 입은 충격으로 빼꼼히 열려 있었다.

“응.”

데미안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거짓 하나 없는 천진한 얼굴이었다.

다정하게 이불을 끌어 덮어 주던 형의 얼굴을 떠올리자, 데미안의 입술 사이로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낯설고 따뜻했던 기억에 데미안의 뺨이 분홍빛으로 엷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루카스와 시에나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최근 아드리안과 엘레노어가 사업 때문에 자주 붙어 있게 되면서 내심 안심했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다니. 시에나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렇……구나. 아프지 않다니 다행이다.”

“맞아. 다음 시간에 보자…….”

애써 어른스럽게 대답했지만, 두 아이의 자그마한 심장은 쿵쿵쿵쿵 평소보다 배로 빨리 박동하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데미안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두 아이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둘 사이에 묘한 동질감이 형성되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움직여야 할 때야.”

“맞아.”

시에나의 말에 루카스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돌아가면 곧바로 삼촌한테 이 위험한 상황을 알려야겠어.”

“나도 돌아가자마자 형님한테 가 봐야겠어.”

“바보 멍청이가 아니라면 뭔가 방법을 생각하겠지.”

시에나는 착잡함을 감추지 못하며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루카스도 미간에 주름을 잡고 한껏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도 이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자. 저번에 의논했던 것처럼, 정보를 모으는 거야.”

“정보라.”

루카스의 눈이 반짝였다. 정보를 모은다니, 무척 근사한 일 같았다.

“한 사람이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 건 너무 수상하니까, 우리 둘이서 묻고 대답을 공유하자.”

“좋아.”

시에나의 말에 루카스가 흔쾌히 동의했다. 역시 쓸데없는 잔머리를 굴리는 건 에나를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하며, 루카스는 그녀와 제가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공작님…….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경쟁자였어.”

“데미안도. 발렌타인 형제들은 보통이 아니야.”

“방심하면 안 돼.”

두 아이가 결연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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