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삼!촌!”
수업이 끝나자마자 후작저로 곧장 향한 시에나가 작고 앙증맞은 주먹으로 아드리안의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온 아드리안이 시에나를 번쩍 안아 들고 통통한 뺨에 쪽쪽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서 와. 수업 끝나고 바로 삼촌 보러 온 거야?”
“응.”
“집에다 말은 했고?”
“아니, 근데 금방 갈 거야.”
푹신한 제 의자에 시에나를 앉힌 아드리안이 책상에 살짝 걸터앉았다. 시에나에게 그의 의자는 지나치게 커 보였다.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우리 공주가 삼촌한테 할 말이 뭘까?”
시에나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이 그러는데, 공작님이 우리 체술 수업 선생님이래.”
“공작 각하가 직접?”
또 빌어먹을 발렌타인 공작이다.
아드리안의 다정한 얼굴이 미묘하게 깨어졌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지만, 눈빛은 한층 어둡게 가라앉았다.
시에나가 그런 아드리안을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부탁을 건넸다.
“삼촌은 피아노 잘 치니까, 예술 선생님 해 주면 안 돼?”
아드리안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엘레노어와 함께 있을 시간이 늘어날 테니 그것은 좋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부담감에 숨이 막혔다.
“미술관도 같이 놀러 가고, 음악회도 가고. 응?”
둘만 따로 앉게 해 줄게. 오붓하게.
발칙한 속내는 쏙 감춘 시에나가 몸을 기우뚱기우뚱하며 재차 졸라 댔다.
“삼촌도 도와주고 싶지만 누굴 가르치는 건…….”
“안 돼?”
이래도? 이래도 정말 안 된다고?
시에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커다랗고 맑은 눈망울이 촉촉하게 반짝였다.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아드리안이 한발 물러섰다. 사실상 시에나의 승리였다.
“……일단 엘렌과 이야기는 해 볼게.”
“좋아.”
아드리안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인 시에나가 폴짝 의자에서 뛰어 내려왔다.
“벌써 가는 거야?”
“응.”
“이렇게 네 할 말만 하고?”
아드리안이 황당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며 총총걸음을 떼는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할 일은 끝났다는 듯 미련 없는 발걸음이었다.
“헤헤, 응.”
까치발을 든 시에나가 허리를 숙인 아드리안의 뺨에 쪽, 가볍게 뽀뽀를 건넸다.
“그럼 수업 시간에 봐, 삼촌.”
미션 클리어.
***
똑똑.
이번에는 제대로 노크했다. 루카스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이즈멜의 허락을 기다렸다. 오늘은 그에게 부탁할 것이 있으니 특별히 더 얌전하고 의젓하게 굴어야 했다.
“들어와.”
“형님!”
“루크, 오늘은 제대로 노크를 했구나. 기특하게.”
며칠 만에 본 이즈멜의 얼굴은 어쩐지 조금 해쓱해 보였다. 평소처럼 이즈멜 몫의 다과를 다 털어 가려던 루카스가 그런 이즈멜을 보고는 멈칫했다.
“형님도 먹을래……?”
어쩐지 미안해진 루카스가 이즈멜에게 쿠키를 하나 내밀었다. 이즈멜이 피식 웃으며 루카스가 준 쿠키를 한 입 베어 먹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용건으로 오셨을까.”
“있잖아. 데미안네 형이…….”
제기랄. 또 카이델이다.
이즈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먹는 것에 한눈이 단단히 팔린 루카스는 그런 이즈멜의 표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우리 체술 수업 선생님이래.”
루카스의 말에 이즈멜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카이델이 직접 너희를 가르친다고?”
그 나서기 싫어하는 놈이?
불만에 찬 이즈멜의 입매가 비뚜름해졌다. 알고 보니 그의 육촌은 목석이 아니라 선수였던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 호의를 베풀어 호감을 사겠다는 심산인가 본데…….’
배알이 뒤틀렸다.
“응. 그래서 말인데 형님, 형님한테도 뭔가 잘하는 게 한 가지는 있지 않을까?”
“뭐?”
“잘 생각해 봐. 형님도 할 수 있는 게 하나는 있겠지.”
이즈멜은 엉뚱하고 불손한 루카스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졸지에 잘하는 것 하나 없는 얼간이가 된 이즈멜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잘하는 게 없다니. 나는 못하는 게 없는데.
루카스의 고민이 길어지는 것에 약간의 괘씸함을 느끼며 이즈멜이 단단히 팔짱을 꼈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루카스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춤! 춤은 어때?”
“춤? 사교 예절 과목 말하는 건가?”
“응.”
춤이라……. 내 춤 실력이 벨리움에서 둘째가라면 서럽기는 하지.
이즈멜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직접 아이들 춤이나 봐줄 생각을 하고 있다니, 누군가 듣는다면 기함할 일이다. 애초에 낼 수 있는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고.
하지만…….
“그래. 그거라면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군.”
“정말?”
엘레노어와의 접점을 만들기에 그 이상 좋은 방법이 있을까. 이즈멜은 반쯤 충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의 얼굴이 해처럼 환해졌다.
“일단 선생님과 이야기해 보마.”
“형님만 믿을게!”
그 이후로도 한참을 종알종알 떠들던 루카스가 돌아가자 집무실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즈멜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앞으로의 일들을 치밀하게 계획하기 시작했다.
황태자라는 자리는 이런 순간 그저 거추장스럽기만 한 것이었다. 엘레노어가 야망이 크고 욕심이 있는 이였다면 좋았으련만, ‘황태자비’라는 말만 들어도 질겁할 얼굴이 눈에 훤했다.
카이델과 아드리안과 달리 이즈멜은 황궁 밖을 나다니는 것도 자유롭지 못했다. 백작저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둘에 비해 그는 무척이나 불리했다.
‘그렇다면 엘레노어가 황궁을 자주 드나들 만한 상황을 만드는 수밖에.”
사교 예절 수업은 분명 괜찮은 빌미가 될 테지.
일단 부딪힐 기회를 만드는 것, 그것부터가 시작이었다. 파고들 틈이 있다면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이즈멜은 타고난 승부사 기질을 불태웠다.
“그리고 굳이 나가지 않아도 가까워질 방법은 언제나 있지.”
클래식은 늘 통하는 법이니.
이즈멜이 설핏 웃었다.
***
「훌륭한 사업가, 엘레노어 에버렛 영애.
안녕. 저녁 하늘이 유독 아름다운 날이야. 그대도 이 순간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면 좋을 텐데.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 묻자니 수도에서 그대의 소식을 모르는 이가 없어. 내게 숨겼던 이유가 그것은 아니겠지만,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더군. 무척 놀랐고 감탄했어.
뒤늦게 허둥지둥 신청했더니 이미 전부 나가고 없다지 뭐야. 권력의 힘을 조금 사사로이 이용해 볼까 하다 간신히 참았어. 기특하지 않나? 난 그대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훌륭한 학생이야.
카이델이 아이들의 실기 과목 하나를 담당했다 들었어. 데미안을 생각하는 마음이 참으로 갸륵해. 그러니 나도 그대에게 제안을 하나 하지.
아이들의 춤 수업은 내가 맡고 싶어.
그대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제법 훌륭한 춤꾼이야. 사교 예절이라면 벨리움에서 나보다 더 배운 이가 없지. 믿지 못하겠다면 다음 연회에서 내 파트너가 되어 보는 건 어때? 내 말에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는 걸 곧바로 이해하게 될 텐데.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황궁에서 수업을 하는 건 어떤지도 묻고 싶군. 이곳에는 귀한 미술품도 많이 있으니, 아이들에게 미적인 감각을 길러 주기에도 더없이 적합한 교육 환경일 거야.
편지를 쓰면서 문득 생각한 것인데, 이제 나도 그대를 엘레노어라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우리가 그 정도로는 친하다고 생각해. 이 부분에 대한 영애의 의견이 나와는 다를 수 있겠지. 그렇다면 이제라도 그런 사이가 되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
모쪼록 그대의 현명한 결정과 흔쾌한 수락, 그리고 빠른 회신을 기대할게.
영애의 답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제 답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셨을 황태자 전하께
1. 권력을 사사로이 이용하지 않으신 건 아주 잘하셨어요.
2. 전하께서 훌륭한 춤꾼이시라는 사실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아요. 그러니 굳이 시험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3.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전하의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2주에 한 번 정도면 되겠지요. 정확한 요일과 시각은 전하께서 정해 주세요. 이왕 황궁 출입을 허락받았으니, 도서관도 이용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4. 전하와 저의 친분 정도에 대해서는 약간의 견해차가 있는 것 같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전하께서는 얼마든지 저를 이름으로 부르실 수 있으세요. 다만 저번처럼 저더러 전하의 존함을 부르게 하지는 말아 주세요. 아무리 허락하셨다지만, 지나치게 불손한 느낌이거든요.
지극한 충심을 담아,
엘레노어 에버렛 드림」
***
「야무진 엘레노어에게.
1. 오늘은 비가 내리네. 나는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데, 그대는 어떨지 궁금해.
2. 제안을 받아들여 주다니 기뻐. 신중함은 현대인의 미덕이라더니, 내 춤 실력에 있어서는 그 미덕이 적용되지 않은 것 같아 유감스러워.
3. 수요일 오후가 좋겠어. 물론 그대에게 편한 시간이 따로 있다면 그에 내 일정을 맞출 의사도 충분히 있어. 도서관이라면 얼마든지 이용해도 좋아. 도서관 가는 길에 내게 들러 손이라도 흔들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
4. 엘레노어.
5. 그냥 한번 불러보고 싶었어. 이른 시일 안에 그대도 편히 내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만큼 우리가 가까워지기를 기대해. 나는 그대의 불손함을 언제나 환영해.
6. 할 말 앞에 번호를 매기는 건 참 야무지고 귀여운 생각이야. 하지만 어쩐지 조금 낭만은 없는 것 같아.
그리움을 담아,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낭만적이신 황태자 전하.
그럼 수요일 오후에 뵙겠습니다. 번호를 매기기에는 너무 짧은 편지라 그냥 써요.
예의 바른,
엘레노어 에버렛」
***
「약간 불손한 엘레노어
그대의 불손함을 환영한다는 내 말을 ‘예의 바른’, 네 글자로 깡그리 무시해 버린 불손함을 환영해.
그나저나 1번 항목에 답하지 않은 것 같아. 번호까지 달았는데 잊어버리다니, 그대답지 않아.
나는 그대에게 궁금한 게 많아.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지, 어떤 계절을 좋아하는지, 제일 좋아하는 책은 무엇인지, 쉬는 날엔 무엇을 하는지.
그대는 쓸모없고 사소한 궁금증이라 부를 테지. 그대가 옳아. 하지만 엘레노어, 알고 있어? 그대의 그 사소한 순간들을 알아가는 것이 요즘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것.
귀찮은 편지에도 성실히 답장해 주는 그대의 마음에 감사해.
만날 날을 고대하며.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편지를 참 좋아하시는 황태자 전하.
*비 오는 날, 좋아해요.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거든요. 물론 그런 날 외출은 번거로워서 싫어요.
*더운 계절보다는 추운 계절이 좋아요. 가을이나 겨울이요. 더워서 늘어지는 느낌이 별로거든요. 그래도 제일 아름다운 계절은 여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싫어하는 계절은 없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제일 좋아하는 책은 티르케의 시집이에요. 뭐든 고루 읽지만, 문학을 특히 좋아해요.
*쉬는 날엔 종일 늘어지게 잠만 자요. 물론 요즘에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있지만요. 어쩌겠어요. 제 업보지요.
*숫자보다는 별 표시가 낭만적인가요? 만족하셨으면 좋겠는데.
*제가 전하께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될 수 있다니 기뻐요. 그리고, 답장하는 일은 사실 그리 귀찮지 않아요.
편지가 낯설 뿐인,
엘레노어 에버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