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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28화 (28/168)

28화

이즈멜에게서 온 편지를 서랍 안에 정리해 넣으며 엘레노어가 피식 웃었다. 어느새 서랍 안에 편지가 꽤 쌓였다.

어쩌다 생긴 편지 친구가 황태자라니.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상대지만, 대화는 편안하고 즐거웠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책상 위에 그의 편지가 놓여 있을 때면 기분이 좋았다.

“별난 분이야, 정말.”

그런 면이 제법 마음에 들지만.

가벼운 세안을 마친 엘레노어가 콧노래를 부르며 방을 나섰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기분 좋은 일들로만 가득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뻐근한 어깨와 뻑뻑한 눈조차도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잘 잤어?”

1층으로 내려가자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아드리안이 인사를 건넸다.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아드리안은 집주인인 엘레노어보다 더 집주인 같은 모습으로 진하게 우린 차를 홀짝였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조금 부은 눈두덩을 비비며 엘레노어가 습관적으로 물었다. 이제는 이 물음도 하나의 일과가 된 듯했다.

“그야…….”

그러니 돌아올 대답은 이제 더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상상만으로 낯간지러워진 엘레노어가 재빨리 고개를 내저으며 아드리안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그만! 이제는 더 말 안 해도 알겠어.”

아드리안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엘레노어에게서 한 발짝 물러선 아드리안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1분이라도 더 일찍 보고 싶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답한 엘레노어가 부끄러움에 몸서리쳤다. 아드리안은 그런 엘레노어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난 오늘 일이 많아서 일찍 온 건데. 너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화끈. 엘레노어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야!”

결국 민망함을 참다못한 엘레노어가 빽 소리치자 아드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렸을 땐 도저히 속을 알지 못하겠더니 이제는 엘레노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여전히 팔십 먹은 노인처럼 굴 때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이제야 엘레노어와 눈높이를 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한 번만 너를 이겨 먹는 것이 소원이었던 때도 있었는데.’

놀림당한 게 못내 분한지 씩씩거리는 엘레노어를 내려다보던 아드리안의 입매가 길게 휘었다.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고 만 것이었지만, 엘레노어의 눈에는 그저 얄밉게만 보였다.

“와, 지금 네 얼굴 진짜 빨개. 터지겠다.”

“너, 너…… 해고야!”

엘레노어가 버럭했다. 아드리안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뻔뻔하게 받아쳤다.

“이거 부당 해고야, 사장님.”

“네 존재가 더 부당해.”

“존재가 부당하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짓던 아드리안이 좀 전까지 보고 있던 종이를 들어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걸 보면 날 해고할 마음 같은 건 사라질걸.”

엘레노어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 없어.”

“확신해?”

아드리안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 여유로운 말투와 자태에 얇디얇은 엘레노어의 귀는 바쁘게 팔랑거리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는 최대한 솔깃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담담한 척 물었다.

“그래서 그게 뭔데?”

별것 아니기만 해 봐라.

“얼리버드 세일 기간 동안의 매출이랑 유료 구독 전환율.”

별것이었군.

눈이 동그랗게 커진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손에서 서류를 홱 채갔다. 아드리안이 씩 웃었다.

“아직도 나 해고하고 싶어, 사장님?”

엘레노어는 실눈을 뜨고 종이에 반듯하게 정리된 숫자들을 꼼꼼하게 훑어 내려갔다. 크고 작은 숫자의 나열이 길게 이어지는 것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겨우 손바닥 두 개만 한 종이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엘레노어가 작게 중얼거렸다.

“……한 번은 용서해 줄게.”

사실 백 번, 아니, 천 번이라도 더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학습지에 대한 반응은 예상보다 더 뜨거웠다. 엘레노어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아드리안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기존과 전혀 다른 접근법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드러낸 이들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호평 일색이었다. 여성지에는 아이들의 수준에 맞춰 체계적으로 짜인 커리큘럼이 혁신적이라는 리뷰가 실렸다. 황실과 발렌타인, 블레이크의 이름이 따라붙은 점이 깐깐한 학부모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예상보다 더 잘됐네.”

“응, 추이도 좋고.”

“쫄딱 망할까 봐 진짜 걱정했었는데 한시름 놓았어…….”

좀 전까지 부글부글 끓던 속에 살랑, 봄바람이 불었다. 그뿐인가. 꼬집어 주고 싶을 만큼 얄밉던 아드리안은 더없이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어렸을 때처럼 뽀뽀라도 해 주고 싶을 만큼.

엘레노어의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슬슬 솟았다. 긴장이 풀린 엘레노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헤실헤실 웃는 엘레노어를 보던 아드리안이 물었다.

“그래서 그 돈은 다 어디 쓸 거야? 요즘 너는 돈 쓸 시간도 없어 보이는데.”

“그야…….”

무심코 솔직하게 대답하려던 엘레노어가 어깨를 움찔했다.

따뜻한 섬에서 예쁜 빛깔의 칵테일을 홀짝이며 누워, 해변을 달리는 미남들이나 구경하고 파도 소리에 잠이 드는 그런 여생을 위한 준비랄까. 항상 동경했던, 노동도 없고 의무도 없으며 책임은 더더욱 없는 그런 인생 말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지만 그런 이야기까지 늘어놓기는 조금 민망했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일종의 노후 자금이야.”

“노후 자금?”

정말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아드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노후 자금 확보는 중차대한 일이야.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내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게 사람한테 얼마나 큰 여유를 주는지 알아?”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말해 봐. 인센티브는 얼마나 원해?”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이 얼마를 요구하든 흔쾌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에게 떼어 주는 돈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사업이 아무런 문제도 없이 굴러가는 데는 아드리안의 도움이 컸다. 그는 제 일처럼 발 벗고 나서 엘레노어가 교재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엘레노어는 그런 그에게 어떻게든 제대로 된 보상을 해 주겠다 마음먹었다.

“인센티브는 됐고, 나랑 저녁 먹자. 둘이.”

그런데 돌아온 아드리안의 대답은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엘레노어가 눈썹을 찌푸리며 눈을 부릅떴다.

“나 진짜 많이 떼 줄 생각이었는데, 너 나중에 배 잡고 후회한다?”

“후회 안 해. 그게 내가 제일 바라는 거야.”

아드리안이 눈을 휘며 웃었다.

“너만큼 나랑 오래 붙어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사업에, 앞으로는 피아노 수업에…….”

아드리안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하나하나 꼽아 보던 엘레노어가 눈을 크게 떴다. 일주일 중에 닷새는 그를 보고 있었다. 요즘은 남매인 드와이트보다 그의 얼굴을 훨씬 자주 보는 듯했다.

“그런데도 또 같이 놀고 싶어? 지겹지도 않아?”

“응.”

팔짱을 낀 채 그런 엘레노어를 빤히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지겨워질 것 같지도 않아.”

***

엘레노어가 질끈 올려 묶은 머리를 재차 만지작거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오늘은 카이델이 처음으로 아이들의 체력 훈련을 맡기로 한 날이었다.

“엘레노어.”

“일찍 오셨네요? 안녕, 데미.”

배시시 웃으며 마주 인사한 데미안이 안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갔다. 이제는 제집처럼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데미안이 쌩하니 멀어지자 순식간에 현관에는 엘레노어와 카이델, 단둘만 남겨졌다.

“이제는 여기가 정말 편한가 봐요. 이제는 대답도 곧잘 하고…….”

“그대 덕이야.”

“집에서는 여전히 말을 잘 하지 않나요?”

“아직은. 차차 나아지겠지.”

데미안이 달려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이델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레노어가 저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렸다.

‘그나저나 오늘도 참 잘생기셨네요.’

훈련복 차림의 카이델은 흐트러짐 없이 정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모습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헐렁한 셔츠가 팽팽하게 당길 정도로 딱 벌어진 어깨와 얇은 천 너머 느껴지는 근육의 존재감에 엘레노어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순간 카이델이 엘레노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뜨끔한 엘레노어는 나쁜 짓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후다닥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컸나? 들린 거 아냐?’

엘레노어는 제게 옮겨온 카이델의 시선을 느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승마를 즐기나?”

카이델이 물었다. 그제야 엘레노어는 제가 지금 승마복 차림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엘레노어가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전에 배워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드와이트가 가르치는 데 재능이 없는 건지, 제가 형편없는 학생인 건지 도통 늘지를 않더라고요…….”

“원한다면 가르쳐 줄 수 있어.”

엘레노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이델이 불쑥 제안했다. 엘레노어를 내려다보는 그의 낯에 미묘한 긴장이 서렸다. 분명 그가 호의를 베푸는 상황인데, 카이델은 그녀가 혹시라도 거절할까 봐 마음을 졸이는 것처럼 보였다. 산책하러 가자는 말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다.

“조, 좋아요.”

엘레노어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재빨리 고개를 푹 숙인 그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카이델은 평소와 다른 차림의 엘레노어가 신기한지 그녀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약간 민망해진 엘레노어가 횡설수설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어쨌든 체술 수업이니 저도 구색을 갖춰야 할 것 같아서……. 제일 편한 옷으로 입었는데 이상한가요?”

“전혀.”

카이델이 고개를 저었다.

“잘 어울려. 무척이나.”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엘레노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은근히 직설적인 그의 표현 방식은 엘레노어를 곧잘 당황하게 했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미리 둘러보고 싶은데.”

다행히도 카이델이 시기적절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엘레노어는 열 오른 뺨을 감추기 위해 성큼성큼 그를 앞질러 걸었다.

“저곳인가?”

탁 트인 잔디밭을 가리키며 카이델이 물었다.

“네, 따로 연병장은 없어서…….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저 정도 공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주변을 둘러보며 카이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몸을 굽혀 잔디 상태를 살피던 카이델이 문득 시선을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치자 카이델의 푸른 눈동자가 가늘게 일렁였다.

“공작저에는 연병장이 있어.”

뜬금없는 말에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야 당연히 그렇겠죠. 기사단이 있는데요.’

엘레노어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델이 얼른 덧붙였다.

“토질도 곱고 훈련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지.”

“우와……?”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걸까. 엘레노어가 말끝을 길게 늘이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순간에도 엘레노어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음 중 카이델의 말에 담긴 속뜻과 가장 가까운 것은? (3점)

1. 있는 그대로의 정보 전달

2. 느이 집엔 이거 없지?

3. 이런 곳에서 나는 수업 못 한다.

“그대가 편히 앉아 있을 만한 자리도 있어. 커다란 차양도 있고.”

2번으로 슬쩍 기울던 엘레노어의 마음이 순간 멈칫했다. 동시에 머릿속에 한 가지 선택지가 더 떠올랐다.

4.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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