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시-작!”
엘레노어의 신호로 보물찾기가 시작되었다.
잠시 눈을 붙인 아이들은 다시 쌩쌩해져서 이곳저곳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해.”
엘레노어는 느긋하게 걸으며 그런 아이들과 그 곁의 세 보호자를 지켜보았다. 세 남자는 아이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전혀 덜하지 않은 열의로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저 남자들은 대체 뭐가 문젤까.’
엘레노어는 어째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준비한 것들에 건장한 장정들이 더 흥분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즈멜은 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바위틈을 헤집고 다녔고, 아드리안은 나뭇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으며, 카이델은 쪼그려 앉아 덤불 틈을 살피고 있었다.
허우대 멀쩡. 얼굴도 멀쩡.
거기다 제국의 어떤 사람보다 더 잘 교육받은 남자들이 아닌가. 공놀이와 보물찾기보다는 와인 한 잔이 더 어울릴 것이다.
‘가끔 동심을 찾고 싶을 때가 있지…….’
하지만 엘레노어는 복잡한 생각을 질질 끄는 사람이 아니었다. 빠르게 납득한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섰다.
엘레노어만 모르는 이유로 열심을 내던 카이델의 손끝에 무언가 톡 닿았다. 카이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드디어……!”
카이델은 설레는 마음으로 쪽지를 펼쳐 들었다.
-아끼는 깃펜. 이즈멜.
쪽지에 적힌 유려한 글씨를 확인한 카이델의 얼굴이 와락 구겨져 들어갔다. 곧바로 종이를 원래대로 접은 카이델이 그것을 대충 처박아 두었다.
“쓸데없는 것이었군.”
한편 순수한 기쁨을 느끼며 방긋 웃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데미안이었다.
“찾았다!”
나무껍질 사이에 끼워진 쪽지를 발견한 데미안이 작게 환호했다. 자수정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근사한 망원경. 아드리안 블레이크.
그때 저 멀리서 시에나와 루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전하의 깃펜이야.”
“내가 찾은 게 네 것보다 훨씬 멋져. 은으로 만든 나침반이라고.”
“흥, 나침반을 어디다 써?”
“그렇게 치면 깃펜은 어디다 쓰는데?”
“공부할 때 쓰지, 바보야. 너랑은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시에나가 톡 쏘아붙였다. 루카스는 뭔가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마땅히 반격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타도 시에나 블레이크.
언젠가는 반드시 말과 논리로 자근자근 밟아 주리라. 하지만 그 ‘언젠가’가 오늘은 아니었다. 루카스가 데미안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데미! 너도 보물 찾았어?”
데미안이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제 끝난 건가 싶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환희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근원으로 향했다.
“마지막 보물은 내 차지야, 엘레노어.”
이즈멜이었다.
허리를 숙이고 이곳저곳을 들쑤시던 카이델과 아드리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향해 걸어가며 짝짝 손뼉을 쳤다.
“축하드려요, 전하.”
“고마워, 엘레노어.”
“이상하게 그게 전하의 손에 들어가니까 마음이 불안하네요…….”
“타당한 추론이야. 어떻게 찾아낸 건데, 시시하게 흘려보낼 수는 없지.”
이즈멜이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눈부시게 예쁜 미소였다. 하지만 엘레노어에게는 그 미소가 꼭 저승에서 온 경고장처럼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빨리 써 줘요. 그게 마음 편할 것 같아요.”
“그래?”
음. 이즈멜이 생각하듯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카이델과 아드리안이 보였다.
“좋아. 결정했어.”
이즈멜이 다시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엘레노어, 곧 있을 황궁 무도회에서 내 파트너가 되어 주겠어?”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파트너…… 저랑요?”
“응, 그대랑.”
“잘 생각해 보신 거 맞아요?”
엘레노어의 말에 이즈멜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제가 춤에 재능이라고는 없다는 거.”
“잘 알지.”
“그런데도 저한테 파트너를 청하신 거예요? 과연 그게 좋은 생각일까요?”
이즈멜이 생각에 잠겼다. 엘레노어와 함께했던 첫 춤의 기억은 분명 즐겁고 유쾌했지만, 동시에 얼얼하고 욱신거리기도 했다.
‘그때 정말 아팠지…….’
이즈멜의 어깨가 잠시 움츠러들었다.
“응.”
하지만 멍든 발등을 참작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엘레노어와 함께 무도회의 첫 춤을 추고 싶었다. 발등이 아니라 온몸에 검푸른 멍이 들더라도 결론은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난 엘레노어, 그대와 첫 춤을 추고 싶어.”
***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정원. 찻잔이 달그락대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티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달리아 모리스를 제외하면 그랬다.
늘 그렇듯 모리스 백작 부인의 손에 억지로 떠밀려 온 달리아는, 따분함을 이겨내기 위해 테이블보의 문양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고 있었다.
그런 달리아의 곁에 바짝 붙어 앉은 버나데트가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달리아, 그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이요?”
“이젠트 공녀가 지금껏 늘 황태자 전하의 파트너로 참석해왔던 것 알죠?”
“그럼요. 알지요.”
달리아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사교계 가십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전하께서 공작저로 사람을 보내셨다지 뭐예요? 다가올 황궁 무도회에는 함께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요.”
“가끔 혼자서도 오셨잖아요. 이번에도 그런 것이겠지요.”
달리아의 말에 버나데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니에요. 이번에는 달라요. 전하께서 다른 영애에게 직접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청하신 것 같더라고요.”
“그래요?”
이번에는 달리아도 약간 놀랐다. 황태자는 만인의 연인 같은 이미지였지만, 그 완벽한 처세술 덕에 한 번도 염문에 휩쓸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관심이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달리아가 다 식은 차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모리스 백작 부인이 보았다면 기겁할 광경이었다.
“그런데 그 상대가 누군지 알아요?”
“알 리가 없죠.”
“그렇죠. 달리아는 매번 사교 모임에 오면서도 은근히 소문에는 느리잖아요.”
버나데트가 재밌다는 듯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달리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게, 엘레노어 에버렛이래요.”
번쩍.
달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엘레노어 에버렛……?”
달리아의 적극적인 반응에 신이 난 버나데트가 말을 이었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이젠트 공녀 같은 미인도 마다하시고 선택하신 사람이 에버렛 영애라니……. 놀랍지 않아요?”
“그러네요.”
“발렌타인 공작과 블레이크 소후작과도 한참 이야기가 많았잖아요. 그러고 보면 확실히 뭔가 매력이 있나 봐요.”
달리아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엘레노어의 외모가 어떻든, 그런 것은 달리아의 관심 밖이었다.
“그렇겠죠. 꽤 귀엽잖아요.”
“하긴. 그거 들었어요? 지난번에 에버렛 영애가 무도회에서 입었던 드레스 디자인이 불티나게 팔렸대요.”
버나데트가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모임에는 에버렛 가에도 초대장을 보낼까 봐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네요.”
버나데트의 말에 달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보내도 오지 않을 거예요. 그런 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도 한번 보고 싶네요.”
버나데트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에버렛 영애를 알아요?”
“안다기보다는, 알았었죠. 어렸을 때 일이지만요.”
달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버나데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쩜 좋아. 두 사람이 친구인 줄도 모르고 달리아 앞에서 에버렛 영애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네요.”
“걱정 마요, 버나데트. 친구 아니니까.”
달리아의 목소리가 한층 싸늘해졌다.
“엘레노어와 내가 친구가 될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
오늘은 엘레노어와 아이들이 음악 수업을 위해 후작저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드리안은 후작가의 응접실 소파에 앉아 벽에 걸린 가족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란히 앉아 있고, 아드리안은 두 사람의 뒤에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한쪽 어깨로 머리를 차분하게 땋아 내린 엘레노어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블레이크 후작가의 가족 초상화에 엘레노어가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는 가족 그 이상의 의미였다.
‘스무 살 때인가? 저 때까지만 해도 볼이 통통했는데.’
아드리안의 입꼬리가 슬쩍 솟았다.
언제부터였더라. 엘레노어에게 우정 이상의 무언가를 느낀 것이.
***
열네 살 여름방학이었다. 아드리안은 드와이트의 방에서 며칠째 지내고 있었다. 백작저 사람들은 익숙하게 그런 아드리안을 받아들였다.
“가자, 리안.”
“식탁 위에 꼭 꽃이 있어야 해?”
“투덜대지 말고 빨리 오기나 해.”
이른 아침, 엘레노어는 화병에 꽂을 꽃을 따기 위해 들판으로 향했다. 아드리안은 귀찮다며 툴툴거리면서도 화병을 집어 들고 엘레노어의 뒤를 따랐다.
“화병은 조심해서 들어. 잘못하면 깨지니까.”
“조심해서 들고 있어.”
“그렇게 흔들흔들하지 말라는 소리야.”
두 사람은 포플러나무가 늘어선 길을 나란히 걸었다.
아드리안은 걷는 내내 엘레노어와 딱 세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엘레노어와 달리 아드리안의 입은 꼭 닫혀 있었다.
엘레노어가 힐끔 그런 아드리안을 눈짓했다.
“왜 그렇게 말이 없어?”
“그야 네가 계속 말을 하니까.”
그런가. 엘레노어가 겸연쩍게 웃었다.
“학교 이야기 해 줘. 아카데미 다니는 건 어때? 재밌어?”
“그럭저럭.”
“그럭저럭……. 예쁜 여자애들은 많아?”
“몰라.”
아드리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엘레노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드리안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모르긴 뭘 몰라.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애는 없어?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