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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43화 (43/168)

43화

“선생님 생일이요?”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백작 부인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다들 와서 함께 축하해 줄래요?”

“네!”

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큰 소리로 입 모아 대답했다. 소소하게 정보나 조금 캐내 볼까 했던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수확이 컸다.

“그런데요…….”

그때 내내 얌전히 있던 데미안이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혼자 말고, 우리 형이랑 같이 와도 될까요?”

“형이라면, 발렌타인 공작 각하 말인가요?”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까요……?”

자수정보다 영롱하게 빛나는 자안이 백작 부부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인형처럼 곱상한 아이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조심조심 건네는 부탁을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물론 함께 와서 축하해 주시면 감사한 일이지요. 하지만 각하께서는 워낙 바쁘신 분이시니…….”

“감사합니다. 형이 정말 좋아할 거예요.”

냉큼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백작 부부도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마주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작이 엘레노어의 생일파티를 그리 달가워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데미안이 즐거워하니 된 것 아니겠는가.

“저도 삼촌이랑 같이 와도 되나요?”

“그럼. 아드리안은 어차피 매년 왔으니까.”

백작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에 이어 시에나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형님이랑 같이 와도 돼요?”

“황……태자 전하 말씀이십니까?”

백작 부부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쎄한 감각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어쩐지 일이 너무 커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발렌타인 공작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황태자라니…….

“와 주시면 큰 영광이겠지만,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런 사사로운 자리에 걸음 하시기에는 너무 바쁘신 분이 아닐는지요.”

“우리 형님은…… 못 와요? 데미안네 형도 오고, 시에나네 삼촌도 오는데?”

백작이 에둘러 곤란함을 내비치자 루카스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 미세한 움직임은 꼭 울음이 터질 전조처럼 여겨졌다. 결국, 백작은 두 손을 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드와이트의 상사분이시기도 한데요. 축하해 주시면 무척이나 기쁠 겁니다.”

“헤헤, 알겠어요! 제가 꼭 오라고 형님한테 일러둘게요.”

“그럴 필요까지는…….”

그때 밖에서 대기하던 알베르가 똑똑 문을 두드리며 마차의 도착을 알렸다. 이제는 정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오늘 이야기 즐거웠어요!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에나가 치맛자락을 잡고 야무지게 인사했다. 그러자 남자아이들도 그럴싸하게 예를 갖췄다. 어깨너머로 형들이 하는 것을 본 것인지 제법 태가 났다.

“우리도 즐거웠어요. 앞으로도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아요.”

백작 부인이 친절하게 웃으며 마주 인사를 건넸다.

“아! 오늘 이야기는 선생님한테는 비밀로 하는 게 어떨까요? 짠하고 놀라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깜짝 파티!”

시에나의 의견에 루카스도 손뼉을 치며 동조했다. 잠시 고민하던 백작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깜짝 파티라니 귀여운 생각이네요. 좋아요. 그럼 정해지는 대로 정식 초대장을 보낼게요. 엘레노어 몰래.”

“감사합니다!”

백작 부부는 직접 나가 아이들을 배웅했다. 마차에 느른하게 기대서서 엘레노어를 기다리던 카이델이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당황한 것은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발렌타인 공작 각하?”

엘레노어가 아닌 백작을 마주한 카이델은 무척 당황했으나 이내 군인처럼 반듯한 자세로 서서 백작과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진작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말씀 편히 하셔도 괜찮습니다, 각하.”

“아닙니다. 그럴 수는……. 저는 이게 편합니다.”

서로가 한없이 어려운 두 사람이었다.

먼저 들어가라. 가는 걸 보고 들어가겠다. 들어가는 걸 보고 가겠다. 어찌 그리할 수 있겠는가.

잠시의 실랑이 끝에 공작가의 마차가 떠나고, 백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여보.”

“네?”

“엘레노어랑 드와이트에게 정말 비밀로 해도 괜찮을까……?”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기절하듯 잠든 엘레노어는 그 중대한 오류를 바로잡아 줄 도리가 없었다.

“그럼요. 괜찮을 거예요. 다 같이 식사하면 복작복작하고 좋죠.”

“그렇겠지?”

“그럼요. 깜짝 놀랄 거예요.”

전부 틀렸지만 딱 하나 맞은 게 있다면 그것이었다. 정말 깜짝 놀라기는 했으니…….

“이번에는 좀 더 크고 화려하게 준비할까 봐요. 손님들도 많이 오시니까.”

***

엘레노어의 생일 선물로 뭘 준비해야 할까.

세 남자에게 던져진 중대한 숙제였다. 아이들에게서 생일파티 초대장을 건네받은 세 남자의 머릿속이 한없이 복잡해졌다.

아드리안에게 엘레노어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르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렇게 세 개가 요즘 제일 인기 있는 디자인입니다.”

아드리안의 앞에 반지 케이스 세 개가 내밀어졌다.

“음.”

아드리안은 확신 없는 표정으로 반짝이는 보석들을 내려다보았다.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생각이 많아졌다.

‘괜히 말했나. 조금 더 기다릴 수도 있었는데.’

그날 이후로 엘레노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답을 듣지도 못했다. 사실 대답을 듣고 싶은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보석상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아드리안이 가게를 나섰다.

“소후작?”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아드리안을 멈춰 세웠다. 그가 천천히 돌아서자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 하나와 반가운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각하. 데미안.”

데미안이 생긋 웃으며 마주 인사를 건넸다. 카이델은 아드리안이 나온 가게를 힐끔 쳐다보았다.

보석 가게라니. 어쩐지 감이 좋지 않았다.

“내일 각하께서도 오십니까?”

“그래. 초대를 받아서.”

“시에나가 말하기로는 데미안이 직접 부탁했다고 하던데요.”

아드리안이 데미안을 보며 씩 미소 지었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카이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내일 전하께서도 오신답니다.”

“그것참…….”

반갑지 않은 소식이군.

카이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드리안도 공감한다는 듯 쓰게 웃었다.

두 사람은 이즈멜이 엘레노어에게 무도회 파트너를 청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엘레노어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발그레 물들어 가던 것도.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아드리안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뒤 몸을 돌렸다.

“선물은 정했나?”

그때 카이델이 불쑥 물었다. 아드리안은 귀찮음을 꾹 누르며 다시 돌아섰다.

“예, 정했습니다. 각하께서는 준비하셨습니까?”

“막 사러 나온 참이야.”

“동생과 함께 나오시다니 보기 좋습니다.”

예의 바르게 대답한 아드리안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잠시 머뭇대던 카이델이 용기를 냈다.

“엘레노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아나?”

“당연히 알지만…….”

미쳤다고 그걸 말해 줄까.

아드리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카이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데 어쩐지 뺨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안 돼. 보면 안 돼.’

아드리안은 후회할 줄 알면서도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가르쳐 주세요.’

데미안의 보라색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백작 부부를 녹아내리게 한 바로 그 눈빛으로.

하…….

아드리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쩌겠는가. 애초에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데미안, 가까이 와 봐.”

아드리안이 데미안에게 작게 손짓했다. 데미안이 쭈뼛쭈뼛 다가서자 아드리안이 허리를 굽혀 데미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엘레노어는 꽃을 좋아해. 너만 알고 있어.”

너희 형한테는 비밀이다.

아드리안이 데미안의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집어 놓았다. 데미안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보자.”

***

한편 이즈멜에게는 또 다른 정보원이 있었으니, 아드리안 이상으로 엘레노어와 긴 시간을 함께한 이였다.

“부르셨습니까?”

“오, 어서 들어와.”

그래, 드와이트 에버렛이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이즈멜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곧 생일이라지?”

“예? 예…….”

드와이트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개 막내 보좌관의 생일까지 챙기는 상사라니! 드와이트는 무척 감격했다.

하지만 감동은 오래가지 않아 와장창 깨어졌다.

“그래서 조언을 좀 구할까 했지. 자네라면 엘레노어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이즈멜이 테이블 쪽으로 몸을 바싹 기울였다. 그가 지긋이 드와이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뭔가 쓸 만한 걸 내놓아 보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드와이트는 진땀을 흘리며 엘레노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많은 남매가 그렇듯, 드와이트는 엘레노어의 취향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담 갖지 말고 생각해 봐.”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드와이트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갔다.

“먹는 것?”

“구체적으로?”

“딱 봤을 때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는 것들은 거의 다 좋아합니다.”

그 순간 이즈멜은 드와이트에게서 쓸 만한 조언을 구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직감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드와이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술…….”

“술?”

이즈멜의 귀가 번쩍 띄었다.

‘하긴, 저번에도 소후작과의 식사 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했었지.’

잊었던 옛날 일을 떠올린 이즈멜이 피식 웃었다.

“자주 찾지는 않습니다. 한 번씩 친한 사람과 있을 때 과하게 즐겨서 그렇지요.”

“소후작 같은?”

이즈멜의 말에 드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드리안이 고생을 많이 했었지요.”

추한 꼴도 많이 보고요.

만취한 엘레노어를 떠올린 드와이트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이즈멜이 고개를 저으며 빙긋이 웃었다.

“아니, 드와이트. 장담하는데 분명 귀여웠을 거야.”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인걸.

***

꽃집에 들어선 카이델이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엘레노어가 꽃을 좋아하나?”

형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꽃집 안을 구경하던 데미안이 곤란한 얼굴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선물하실 건가요?”

그때 풀물이 든 에이프런을 두른 가게 주인이 다가오며 말을 붙였다.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인분께 선물하시는 꽃이라면 역시 장미 꽃다발이 제일 인기지요. 요즘은 리시안서스도 유행하고요.”

잠시 고민하던 카이델이 말했다.

“꽃다발보다는 키울 수 있는 화분이 더 좋겠어.”

“좋은 생각이세요. 그럼 키우기 편한 것들로 보여드릴게요.”

“데미안, 네가 골라 봐.”

데미안은 한참을 고민하다 붉은색의 제라늄을 골랐다.

“들어 줄까?”

두 손으로 화분을 꼭 감싸 든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카이델이 가볍게 데미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무심결에 한 행동이었다.

“네가 고른 것을 알면 엘레노어도 좋아할 거다.”

데미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살짝 깨문 입술 사이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상점이 늘어선 거리를 천천히 걷던 카이델이 우뚝 멈춰 섰다. 독특한 분위기의 잡화점이었다.

카이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예쁜 오르골이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소년과 소녀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자장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보고 있는 것만으로 나른해졌다.

‘요즘 엘레노어가 좀 피곤해 보였지.’

카이델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선물하시기 위한 거라면, 포장해드릴까요?”

“부탁하지.”

점원의 질문에 카이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카드도 포함되어 있는데, 메시지를 쓰시겠습니까?”

카이델이 점원에게서 펜을 받아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짧은 한 문장을 빠르게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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