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드와이트에게 대강의 일에 대해 전해 들은 하녀들은 내내 엘레노어의 눈치를 살폈다. 엘레노어가 의연함을 유지할수록, 분위기는 자꾸 축축 처졌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지?”
“네, 두 시간쯤 남았네요.”
“그럼 잠시 일하고 있을게. 드와이트가 도착하면 불러 줄래?”
엘레노어는 하녀들을 물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잡념을 떨쳐내는 대는 일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급한 일도 없는 거야.’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뒤적이던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정신없이 바쁠 것을 예상해 미리 일을 전부 처리해 둔 탓에 해야 할 일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교재 연구나 해야겠다.
엘레노어가 두툼한 외국어 교재를 꺼내 들었다. 빳빳하던 책은 어느덧 흐물흐물해져 반질반질하게 손때가 묻어 있었다.
‘뫼젠의 왕녀라고 했지.’
엘레노어가 뫼젠어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장을 펼쳐 들었다. 뫼젠어에 대한 설명은 몇 줄 나와 있지 않았다.
-오로지 뫼젠에서만 사용되는 언어다. 동사에 대한 규칙이 무척 까다롭지만, 동시에 무척 논리적이기도 하다.
엘레노어는 뫼젠어를 할 줄 알았다. 아드리안과 드와이트가 아카데미로 떠나 있는 동안, 엘레노어도 집에서 제가 모르는 것들을 배우고 익혔기 때문이다. 뫼젠어도 그중 하나였다.
그 시간에 그냥 다른 거나 공부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전환에 별로 도움은 안 되는 것 같네.”
혼자 설렌 거로도 모자라 질투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붉은 제라늄은 여전히 생기를 뽐내며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엘레노어의 시선이 문득 창밖을 향했다. 엘레노어는 창밖 풍경에서 평소와 다른 지점을 찾아냈다. 저 멀리 보얗게 흙먼지가 일고 있었다.
‘뭐지?’
자세히 보니, 누군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엘레노어가 창가에 바짝 붙어 알쏭달쏭한 그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썼다.
“……카이델?”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런 체격의 사람은 엘레노어의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백작저 정문에 다다른 그가 말의 속도를 늦추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선명히 보였다.
엘레노어는 방을 박차고 나갔다.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계단을 내려온 엘레노어가 달려가 현관을 열어젖혔다.
“……엘레노어?”
도어노커로 손을 뻗던 카이델은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자 깜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바로 앞에 엘레노어가 서 있었다.
친밀하다기에는 약간 멀지만, 정중하다기에는 또 조금 가까운 거리.
달려왔는지 엘레노어의 호흡이 거칠었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고,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르지 않은 숨이 새어 나왔다.
서로의 주변을 이리저리 배회하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그 순간 카이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리고 화려한 연회용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엘레노어는 숨이 멎을 듯 아름다웠다.
뻔한 표현인 것을 알지만, 사실이 그랬다. 카이델은 숨을 쉬는 것도, 적당한 시점에 눈을 돌리는 것도, 제가 하려던 말도 잊고 눈앞의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엘레노어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도 모르게 달려와서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는데, 눈앞의 그를 본 순간 머릿속이 백지가 된 것만 같았다.
‘내가 왜 그랬지?’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이나 말없이 서 있었다. 시간이 가는 것도, 집 안에서 하녀들이 둘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카이델의 등 뒤로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갔다.
그나마 조금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엘레노어였다.
“카이델?”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여기는 무슨 일로……?”
엘레노어가 묻자 그제야 카이델은 제가 이곳까지 달음질한 이유가 떠올랐다.
“황궁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야.”
“아…….”
“그대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엘레노어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한 번 고른 카이델이 엘레노어에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엘레노어, 오늘 그대를 에스코트할 기회를 내게 주겠어?”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많이 늦은 것을 알아. 꽃 한 송이 없이 이렇게 불쑥 청하는 것이 그리 낭만적이지 않은 것도. 하지만 엘레노어, 그대와 함께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해.”
늘 원했지. 앞으로도 그럴 테고.
“두 번 실수하지 않을 거야.”
애매한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레노어의 입가가 서서히 호선을 그리며 솟았다. 보일 듯 말 듯 하던 미소는 어느새 얼굴 가득 환한 웃음으로 번져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미지근한 공기가 엘레노어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내내 조금 서늘하게 식어 있던 마음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엘레노어의 작고 차가운 손이 카이델의 크고 따뜻한 손 위에 포개졌다.
“데리러 오실 때는 늦지 마세요.”
승낙이었다.
카이델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긴장이 풀린 그가 엘레노어의 손을 살짝 힘주어 잡았다.
“약속하지.”
엘레노어의 손등 위에 가볍게 입 맞춘 카이델이 말 등에 훌쩍 올라탔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물었다.
“왜 그렇게 서둘러서 가세요?”
“하던 일을 던져두고 왔거든. 준비도 해야 하고.”
익숙하게 고삐를 감아쥔 카이델이 싱긋 웃었다.
“나중에 봐.”
***
화려한 연회장.
삼삼오오 모여 선 이들은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기 바빴다. 궁금하지도 않은 안부를 물으며 적당히 예의를 차리고 나면,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온갖 소문들이 대화의 공백을 차지했다.
어느 누가 돈을 크게 벌었다더라, 누가 하녀와 바람을 피우다가 부인에게 걸렸다더라, 그 둘이 정원에서 딱 붙어 있는 걸 누가 봤다더라.
대개는 떠들어대는 소문의 종류도 다양하며, 그 주인공도 제각기 달랐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그거 들었어요? 뫼젠의 왕녀가 방문했다네요. 오늘 황태자 전하의 파트너로 참석한다던데.”
“어머, 그래요? 그럼 에버렛 백작 영애에게 파트너를 요청하셨다는 건 헛소문이었나 봐요?”
“확실한 건 전하께서 오시면 알게 되겠지만, 꽤 믿음직한 소식통이래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이젠트 공녀를 거절하시고 선택한 사람이 에버렛 영애라니요. 좀 의아했지 뭐예요. 아, 물론 에버렛 영애도 예쁘죠. 악의는 없어요.”
누군가가 던진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버렛 영애도 마음이 좀 그렇겠어요. 그렇게 떠들썩하게 소문이 났는데, 혼자 오려면 면이 안 서잖아요.”
“저였으면 그냥 불참했을 거예요. 좀 안됐네요. 이따 인사라도 다정하게 건네야겠어요.”
“이제쯤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늦네요.”
대부분의 사람이 입장한 지금, 엘레노어 에버렛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입장하지 않은 가문은 몇몇 후작가와 공작가 사람들뿐이었다.
“엘리엇 마르크 이젠트 소공작과 아나이스 로베르 이젠트 공작 영애 드십니다.”
그때 시종이 이젠트 공작가의 마차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신비로운 은발을 이리저리 꼬아 내린 공작 영애의 모습에 사람들은 감탄하며 서로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때 문이 다시 한번 활짝 열리며, 황가를 제외한 마지막 가문이 입장했다.
“카이델 이드리스 발렌타인 공작 각하와 엘레노어 에버렛 백작 영애 드십니다.”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순식간에 문 쪽으로 쏠렸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구석에 서서 거래처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아드리안도, 샹들리에의 빛이 가장 환하게 쏟아지는 자리에 서서 아름다움을 뽐내던 이젠트 공녀도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잠깐의 술렁임은,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순간 멎었다.
‘저 사람이 에버렛 백작 영애라고?’
‘원래 저렇게 예뻤던가?’
평소의 몇 배로 화려하게 성장한 카이델도 눈이 부셨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그 곁에 선 엘레노어에게로만 향했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 아래로 길게 뻗은 목,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 움직일 때마다 살랑살랑 춤을 추는 치맛자락까지. 카이델의 옆에 선 엘레노어는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 같았다.
엘레노어는 전혀 초라하지 않았다. 이 공간의 유일한 주인공처럼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떠들어대던 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 정도로.
카이델이 살짝 고개를 숙여 무언가 귀엣말을 하자 엘레노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에 여기저기서 뺨을 붉혔다.
“카이델, 나 집에 가고 싶어요.”
한편 카이델과 함께 연회장에 입장한 엘레노어는 긴장으로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카이델이 그런 엘레노어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세상에. 전부 이쪽만 봐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요. 왜 다들 아무 말도 안 할까요?”
“긴장할 것 없어. 그대가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없는 것뿐이니까.”
카이델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엘레노어는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그냥 나를 보고 있어.”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어 카이델과 눈을 맞췄다.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대를 보고 있을 테니.”
고개를 끄덕이는 엘레노어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부끄러움이 긴장을 이긴 것인지, 엘레노어의 손에서 떨림이 완전히 가셨다.
엘레노어는 카이델에게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군중 속에서 저를 보고 있던 이젠트 공녀와 똑바로 눈이 마주쳤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엘레노어의 얼굴에 꽂혔다.
엘레노어는 그녀에게서 저를 향한 적의를 읽어냈다.
‘내가 뭔가 저분께 실수한 게 있나……?’
엘레노어가 멈칫하는 것을 느낀 카이델이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왜?”
엘레노어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때 우렁찬 호각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황족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였다. 카이델과 엘레노어가 곧바로 계단을 향해 돌아섰다.
“황태자 전하와 힐데가르트 칼리에르 아르 데 뫼젠, 뫼젠의 왕녀 전하 드십니다.”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이즈멜과 힐데가르트가 반짝이는 대리석 계단 위에 등장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예를 표했다. 카이델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고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조심스럽게 허리를 세운 엘레노어는 이즈멜과 왕녀가 나란히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와, 아름다운 분이구나.’
왕녀는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풍성한 적갈색 머리카락에서는 윤기가 흘렀고, 고양이처럼 크고 날카로운 눈은 이지로 반짝였다.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으나 우아했고,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엘레노어의 시선이 그 옆의 이즈멜에게로 향했다. 평소와 달리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그는 무척 도회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조금 굳은 얼굴조차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잘 어울린다…….’
두 사람은 맞춘 듯 서로에게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엘레노어는 어쩐지 이즈멜이 조금 멀게 느껴졌다.
그때 엘레노어와 이즈멜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조금도 헤매지 않고 단번에 그녀를 찾아냈다. 엘레노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즈멜의 시선이 엘레노어의 곁에 서 있는 카이델에게로 향했다. 그의 기운이 한층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그 순간,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손을 잡았다. 엘레노어가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이델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어디를 그렇게 봐.”
카이델이 엘레노어에게만 들릴 만한 크기로 나직이 속삭였다.
“날 보고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