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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60화 (60/168)

60화

“그런데 데미안은 왜 안 온 거예요?”

사각사각. 마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숙제로 내어준 문제를 풀던 시에나가 물었다.

“친척 어른이 오셔서 이번 주는 집에 있을 거래.”

엘레노어가 대답해 주자 시에나는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책상에 엎드려 늘어져 있던 루카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부럽다.”

“부럽다고?”

엘레노어가 찹쌀떡처럼 말랑말랑한 루카스의 볼을 살짝 집었다가 놓았다.

‘완전 말랑해! 귀여워!’

엘레노어의 심장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엘레노어는 일부러 눈매를 축 늘어뜨리고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서운하다. 루크 네가 오지 않으면 난 보고 싶을 텐데.”

루카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번쩍 몸을 일으킨 루카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나도 보고 싶을 건데요!”

“나는 루크가 좋은데 루크는…….”

루카스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도 선생님 좋은데.”

엘레노어의 눈이 무지개처럼 둥글게 휘어졌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이!”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시에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도 선생님 좋아요. 루크가 좋아하는 것보다 더!”

“정말?”

엘레노어는 턱을 괴고 티격태격하는 둘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노곤해지는 풍경이었다.

“황실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그때 알베르가 마차의 도착을 알려왔다. 엘레노어가 활짝 웃으며 루카스에게 손짓했다.

“루크, 집에 갈 시간이야.”

루카스를 보낸 뒤, 엘레노어는 시에나의 손을 잡고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블레이크 후작저에서 다 함께 식사하기로 한 날이었다.

“선생님이랑 삼촌이랑은 언제부터 친구였어요?”

“오래됐지. 진짜 어렸을 때부터 봤으니까.”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시에나는 잔뜩 들떠 재잘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뽀얀 뺨에 분홍빛 홍조가 어린 시에나는 당장이라도 깨물어 주고 싶은 복숭아 같았다.

“삼촌은 어렸을 때랑 지금이랑 똑같아요?”

“음, 아니. 얼굴은 비슷한 것 같은데 성격은 좀 달랐어.”

“어땠는데요?”

“지금보다 좀 까칠했지. 말수도 좀 더 적고.”

“까칠한 삼촌이라니, 상상이 잘 안 돼요.”

“아카데미 시절에는 편지에 답장도 잘 안 해 줬어. 한 다섯 통 보내면 그제야 한 통쯤 보내주곤 했다니까. 그것도 엄청나게 무성의하게.”

그건 지금 생각해도 좀 괘씸하다.

어릴 적 아드리안과 제 모습을 되짚어 보던 엘레노어가 입술을 삐죽였다. 옆에서 시에나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게 다 삼촌의 업보네요.”

좀 더 고생해 봐야 해.

시에나의 말에 엘레노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업보? 그런 말도 알아? 누가 가르쳐 줬어?”

“책에서 봤어요.”

“시에나는 면접 준비는 걱정 없겠다. 선생님보다 훨씬 말을 잘하는 것 같아.”

엘레노어의 말에 시에나가 강아지처럼 헤헤 웃었다.

“아카데미 입학하고 나면, 선생님한테 편지 백 통 보낼 거예요.”

“진짜? 백 통이나?”

시에나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백 통은 좀 많은 것도 같고.

“루카스랑 데미안이랑 나눠서 백 통 쓸게요. 선생님도 답장 보내줘야 해요!”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서고, 내리자마자 클로드와 아드리안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 공주님들 왔구나!”

클로드가 시에나를 번쩍 안아 들자, 시에나가 클로드의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거슬거슬한 수염이 여린 뺨을 긁는 감촉에 시에나가 콧등을 찌푸렸다.

“안녕, 할아버지. 수염 아파요.”

“아 참, 그렇지. 미안하구나.”

시에나를 살포시 땅에 내려놓은 클로드가 엘레노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엘레노어가 자연스럽게 클로드를 꼭 껴안았다.

“잘 지내셨어요?”

“나야 늘 그냥 그렇지. 바쁘고, 정신없고, 소식 한 통 없는 딸도 보고 싶고……. 엘렌, 너는?”

“저도 늘 그냥 그렇죠. 바쁘고, 정신없고, 후작님도 보고 싶고.”

클로드가 시원하게 웃으며 엘레노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서 들어가자. 음식 식겠다.”

후작 부인과도 짧게 포옹을 주고받은 엘레노어가 식사가 준비된 방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의자를 빼주었다.

“고마워.”

맞은편에 앉아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시에나가 흐뭇하게 웃었다.

나이스, 삼촌.

식사는 훈훈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 흘러갔다. 언제나 그렇듯 클로드는 입이 마르도록 엘레노어를 칭찬했고, 아드리안과 시에나가 옆에서 열심히 동조했다. 엘레노어는 민망함에 몇 차례나 얼굴을 붉혀야 했지만,

“선생님이랑 삼촌이랑 같이 저녁 먹으니까 기분이 엄청 좋아요.”

“그래?”

엘레노어가 되묻자 시에나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좋아.”

옆에 앉아 있던 아드리안이 잔을 살짝 들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엘레노어는 자꾸만 제 뺨을 간지럽히는 그의 시선을 모른 척, 제 앞에 놓인 파이를 포크로 콕콕 찔러댔다.

그런 둘을 지켜보던 클로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정확하게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클로드의 입매가 아주 미묘하게 솟았다. 이럴 때는 그냥 모르는 척해 주는 것이 상책이었다.

식사가 거의 마무리되고, 다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댔다.

아드리안과 시에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케이크는 초콜릿 케이크인지, 딸기 생크림 케이크인지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후작 부인은 시에나의 어머니에게 전해 줄 것이 있다며 일찍 자리를 떴고, 클로드는 잔에 남은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평화로운 가족의 한때를 지켜보고 있으니 티파티 이후로 내내 불편했던 마음이 녹는 느낌이었다. 아나이스의 말도, 달리아가 귀띔해 준 충격적인 사실도 잠시 잊혔다.

그때 클로드가 엘레노어에게 제안했다.

“엘렌, 내 집무실에서 잠깐 이야기나 나누는 게 어떠냐?”

“네, 좋아요.”

엘레노어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와이트도 같이 식사했으면 좋았을 텐데. 못 본 지 반년은 족히 된 것 같구나.”

“그러게요. 요즘 많이 바쁜 것 같더라고요. 어딘지 정신도 없어 보이고요.”

“뫼젠에서 왕녀가 방문했다더니, 그 때문인 것 같구나.”

엘레노어가 익숙하게 푹신한 의자를 빼 앉으며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요. 왕녀님이 드와이트랑 꽤 잘 맞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신기한 일이야.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인데…….”

클로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가 책상 위에 놓인 안경을 집어쓰며 말했다.

“종이를 바꾼 이야기는 리안에게 전해 들었다. 훌륭하게 대처했어.”

“별것 아니었어요.”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것 아니기는. 너는 좀 더 너 스스로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어, 엘렌.”

“지금도 충분히 관대한 것 같은데요…….”

엘레노어가 소심하게 항변했다.

“시에나가 샐러드 한 접시를 다 비운 건 손뼉을 치며 칭찬해 주면서, 네가 해낸 일에 대해서는 매번 별것 아니라고 넘겨 버리지 않니. 습관처럼.”

클로드가 엘레노어를 지그시 바라보며 조언했다. 안경 너머의 금빛 눈동자가 따뜻하게 반짝였다.

“이제 원고가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네, 부지런히 작업하면 다음 달 정도면 끝날 것 같아요.”

“그다음 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았느냐?”

클로드가 책상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이며 물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모호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일단 시험까지는 아이들에게 최대한 집중할까 해요.”

클로드의 질문은 엘레노어에게 새로운 고민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끝내고 나면, 그때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어쩌면 지금이 기회인지도 모른다. 전생에서 현생까지 이어져 온 지독한 일복의 굴레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날 기회 말이다.

물론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한 일은 의외로 무척 즐거웠다. 커다란 성취감도 느꼈고,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하지만 엘레노어가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결심한 인생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것이었다.

엘레노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 지금까지 찍어낸 교재를 한데 모아 엮는 일도 남았으니 너무 급하게 고민할 것은 없지. 천천히 생각하려무나.”

클로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음번에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때도 날 찾아와 줄 테냐?”

“당연하죠. 생긴다면요…….”

안 생길 것 같지만.

그때 누군가 다급하게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후작님, 르벤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클로드의 비서가 빠른 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렀다.

“급한 일인가?”

“예. 당장 보고드려야 할 사안입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에버렛 영애.”

비서가 클로드의 맞은편에 앉은 엘레노어를 흘끗 쳐다보았다.

“저는 그럼 나가 있을까요?”

엘레노어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려 하자 클로드가 손짓으로 만류했다. 그가 비서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몇몇 가문에서 투자 철회를 요청했습니다.”

“갑자기?”

클로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엘레노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예, 그런데 그 규모가 제법 큽니다.”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말해 주게.”

클로드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그의 눈치를 살피던 비서가 대답했다.

“5분의 1 정도입니다.”

철렁.

깜짝 놀란 엘레노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렇게 예고도 없이 5분의 1이나 되는 세력이 투자를 철회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클로드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시야가 아득해지는지 그가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 누르며 숨을 가다듬었다.

“확실한가?”

“예, 확실합니다.”

“이유는 파악했고?”

“죄송합니다. 현재로서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대답도 내어주지 않는 상황입니다.”

비서의 말에 집무실 안의 분위기가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담요처럼 보들보들하던 공기가 이제는 모래알처럼 서걱거렸다.

“아무래도 직접 가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서의 말에 클로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편이 좋겠군.”

클로드가 엘레노어 쪽을 바라보았다.

“엘렌, 미안하게 되었구나. 상단 쪽에 뭔가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아드리안에게 데려다주라고 전하마. 미안하다.”

“아니에요.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

“그럼 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다.”

이번에는 엘레노어도 거절할 수 없었다. 엘레노어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클로드가 빙긋이 웃었다.

“우리 딸은 착하기도 하지.”

엘레노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그가 옆에 걸려 있던 외투를 집어 들며 말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말아라. 별일 아닐 테니.”

엘레노어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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