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65화 (65/168)

65화

이즈멜에게서 온 편지를 본 엘레노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제국의 역사를 되짚는 데서 시작된 여덟 장의 장황한 편지를 두 줄로 요약하면 이랬다.

‘우리 집에서 오페라 보고 갈래? 좋은 와인도 있는데.’

이건 꼭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 스케일은 좀 다르지만, 결국은 그거였다.

적당히 예의 바른 답장을 보낼까.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런 겉치레는 걷어내도 괜찮을 만큼은 그와 친했다.

「전하께

혹시 하고 여쭙는 건데요. 데이트 신청인가요?

엘레노어 에버렛.

추신. 편지가 너무 길어서 읽느라 힘들었어요.」

***

「엘레노어에게

그렇다면?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추신. 이번에는 짧게 썼으니 용서해.」

***

「전하께

거절할게요. 죄송하지만 지금은 일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엘레노어 에버렛

추신. 편지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무척 공손하게 드리는 말씀이랍니다. 최대한 친절하고 부드러운 억양으로 읽어 주세요.」

***

「엘레노어에게

요청사항대로 읽으려고 노력은 했는데, 여전히 마음이 아파.

그렇다면 약간 제안을 바꿔 보지.

아이들과 함께 오는 건 어떤가? 업무의 연장처럼,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분위기는 좀 덜 살겠지만, 좋은 와인 대신 맛있는 주스를 준비할게.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추신. 그대가 원한다면 그대 잔에는 몰래 와인을 따라 줄 수도 있어. 그것도 일종의 포도 주스니까.」

***

「전하께

그렇다면 뭐……. 분부대로 해야지요.

엘레노어 에버렛

추신. 업무 중 음주는 하지 않아요. 그래도 집에 갈 때 슬쩍 챙겨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

아무튼, 그런 이유로 엘레노어와 아이들은 수업이 끝난 뒤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이즈멜이 보낸 사두마차는 다섯 사람이 탔는데도 여유로울 만큼 컸다.

“삼촌도 같이 가니까 좋다.”

시에나가 활짝 웃으며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아드리안은 그런 시에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형도 같이 갔으면 좋을 뻔했는데, 그치.”

엘레노어가 데미안에게 속닥속닥 귓속말했다. 출장 때문에 카이델만 함께하지 못한 것이 못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노어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재미있을 거야. 끝나면 선생님이 데려다줄게.”

“집까지요?”

“응, 공작저까지.”

엘레노어의 말에 데미안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들뜬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엘레노어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은 아드리안에게 향했다.

평소였다면 말을 붙여도 한참 전에 붙였을 아드리안인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처럼 창밖만 보고 있는 그는 익숙하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살그머니 그를 불렀다.

“리안.”

아드리안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응?”

“오늘따라 왜 말이 없어?”

“내가?”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지적했다.

“아까부터 한마디도 안 했잖아.”

아드리안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냥 오늘따라 생각이 많네.”

“무슨 생각?”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반짝거리는 초록색 눈동자를 빤히 보던 아드리안이 툭 대답했다.

“네 생각.”

농담으로 받아들인 엘레노어가 작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흥. 말해 주기 싫으면 말아라, 뭐.”

아드리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엘레노어가 정말 자신을 좋아했던 걸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은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쳐왔던 걸까.

며칠 내내 아드리안을 괴롭힌 생각들이었다.

그는 책상에 쌓인 편지 더미를 읽고 또 읽었다. 그때도 분명 여러 번 읽었던 것이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보니 모든 것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엘레노어가 눈앞에 있는 이 순간, 이미 지나버린 시간을 되짚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치게 될 뿐.

“진짠데.”

아드리안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엘레노어가 화제를 돌렸다.

“넌 오페라 좋아해?”

“나름대로. 너는?”

아이들을 슬쩍 곁눈질한 엘레노어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솔직히 말할게. 놀리지 마.”

“응.”

“딱 한 번 봤는데, 중간부터는 완전히 곯아떨어져서 기억이 안 나. 차라리 그냥 연극이나 음악회였다면 괜찮았을 텐데.”

엘레노어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지만, 아드리안에게는 그저 귀여운 투정으로만 보였다.

“이번에도 그러면 어쩌지?”

아드리안이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긴. 잘 자고 상쾌하게 일어나면 되지.”

“그래도 황궁에서 초청받은 건데…….”

엘레노어가 불안한 듯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나중에 혹시라도 내가 졸면 네가 깨워 줘야 한다?”

“알았어.”

***

엘레노어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이즈멜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엘레노어의 눈이 꼭 감긴 것을 확인했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엘레노어는 이즈멜과 아드리안 사이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런 엘레노어를 한참이나 관찰하던 이즈멜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목이 아프지 않을까?”

차라리 기대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즈멜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아드리안이 냉큼 대답했다.

“제 쪽으로 기대게 하겠습니다.”

아드리안이 엘레노어 쪽으로 손을 뻗자 이즈멜이 그의 손목을 턱하고 붙잡았다. 순간 세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달라졌다.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 속, 두 사람이 싱긋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냐. 내 쪽으로 기대게 해.”

“어찌 전하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른 의도가 아니고?”

아드리안과 이즈멜 사이에 불꽃이 튀든 말든, 엘레노어는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아드리안이 제안했다.

“그럼 그냥 엘레노어가 알아서 기대도록 하지요.”

“그래, 그러지.”

극적으로 타협한 두 사람은 다시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의 시선은 무대에 있었지만, 그들은 엘레노어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렇지. 조금만 더…….’

‘그쪽으로 가면 안 되는데!’

이즈멜과 아드리안은 은근슬쩍 엘레노어 쪽으로 어깨를 밀어 넣었다.

‘옳지.’

엘레노어의 고개가 이즈멜 쪽으로 움직이면 이즈멜이 웃고, 아드리안 쪽으로 움직이면 아드리안이 웃었다.

1분 동안에도 희비가 수차례 교차했다. 웅장한 오페라보다 이편이 훨씬 흥미진진했다.

‘!’

그때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댔다.

승리감에 도취된 아드리안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척추를 타고 짜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간신히 표정을 관리한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힐끗 바라보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부터 살짝 벌어진 입술, 그의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엘레노어의 머리카락. 그의 온 신경은 어깨로 향해 있었다.

그때였다.

오페라가 절정으로 치달으며 무대에서 큰 소리가 나자, 엘레노어가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깼나?’

이즈멜과 아드리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눈은 여전히 감긴 채였다.

다음 순간, 이즈멜의 어깨 위에 툭, 무언가 내려앉았다. 엘레노어에게서 이름 모를 꽃향기가 훅 풍겼다.

‘좋은 냄새…….’

이즈멜의 입매가 눈에 띄게 솟았다. 그가 엘레노어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이즈멜의 시선이 길고 풍성한 속눈썹부터 약간 눌린 뺨, 살짝 열린 입술을 천천히 훑었다.

어쩐지 입안이 마르는 느낌이었다. 귓가에 둥둥 울리는 심장 소리가 혹여나 엘레노어를 깨우지 않을까, 이즈멜은 실없는 걱정을 했다.

그때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에게 손을 뻗어왔다.

“뭐 하는 거지?”

이즈멜이 곧바로 그것을 저지했다. 아드리안이 소곤소곤 대답했다.

“엘레노어가 아까 당부했습니다. 혹시 졸거든 꼭 깨워 달라고요.”

이즈멜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대의 어깨에 기대 있을 때는 깨우지 않았으면서.”

“이제야 생각이 났습니다.”

아드리안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이즈멜이 한쪽 눈썹을 슥 추켜올렸다.

“다시 잊어.”

이즈멜의 당당한 요구에 아드리안이 제 귀를 의심했다.

“예?”

“생각이 났다는 사실까지도 잊어. 그냥 기억하지 못한 거로 해.”

엘레노어를 힐끔 쳐다본 아드리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원망할 텐데요.”

“괜찮아.”

이즈멜이 씩 웃었다.

“원망은 내가 아닌 그대가 들을 테니까.”

“전하……!”

“쉿. 엘레노어가 자잖아.”

이즈멜이 입술 위에 검지를 슥 대며 눈을 휘었다. 아드리안의 말문이 턱 막혔다.

“피곤할 텐데 푹 자게 해 주자고. 응?”

***

“내가! 졸면! 깨워 달랬지!”

오페라가 끝나고, 박수 소리에 놀라 깨어난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리며 말했다. 아드리안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이즈멜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깜빡했어.”

이즈멜이 잘했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황태자만 아니었더라면……. 아드리안이 마음속으로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즈멜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오페라는 어땠어, 엘레노어?”

“좋았어요.”

자동 반사처럼 튀어나온 대답에 이즈멜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흠. 그가 과장된 몸짓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엘레노어를 놀려먹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만 놀리세요, 전하.”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찌릿, 노려보았다.

“미안. 그래도 이걸 보면 다시 내가 좀 좋아질걸.”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올린 이즈멜이 옆자리에 놓아둔 상자 하나를 건넸다. 살짝 열어 안에 든 것을 본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와인이었다.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요.”

“별로 농담 같지 않던데. 다시 가져갈까?”

이즈멜이 손을 내밀자 엘레노어가 품에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줬다 뺏는 건 치사한 거예요.”

엘레노어의 말에 이즈멜과 아드리안이 함께 웃었다.

엘레노어가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다들 재밌었어?”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재밌었어요.”

“재밌었다니 다행이다.”

시에나와 루카스 사이에 얌전히 앉아있는 데미안은 어쩐지 좀 지쳐 보였다. 둘 다 보통 수다쟁이가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가자, 데미.”

엘레노어가 손을 내밀자 데미안이 얼른 그것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함께 마차를 타고 공작저로 이동했다.

“와, 저기가 공작저야?”

“네.”

저 멀리 보이는 회색 벽돌 건물에 엘레노어가 입을 떡 벌렸다. 저택이라는 말보다는 성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곳이었다.

정문을 통과하고 나서도 한참을 달린 후에야 마차가 멈춰 섰다. 문을 열고 내린 엘레노어가 데미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데미안?”

그때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신사가 둘을 향해 다가왔다. 데미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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