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방으로 돌아온 엘레노어는 제가 아직 카이델의 외투를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 돌려주고 올 걸 그랬네.”
의자 등받이에 외투를 걸쳐놓고 툭툭 털어 주름을 펼쳐놓았다. 그때 주머니 쪽에서 무언가 바스락대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엘레노어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잡히는 것을 꺼냈다. 상연 일자가 지난 연극 티켓 두 장이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엘레노어는 불현듯 조나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연극은 재미있게 보셨습니까?’
‘연극이요? 아, 오페라 말씀이세요?’
‘며칠 전에……. 아니, 아닙니다.’
엘레노어는 그가 말했던 연극이 이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엘레노어가 작게 중얼거렸다.
“왜 같이 보자고 하지 않았지?”
엘레노어는 살짝 구겨진 티켓을 잘 펴서 협탁 위에 올려둔 뒤. 폭신한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기어들어 갔다.
사각거리는 시트의 감촉도, 약간 빳빳한 베갯잇도 이제는 익숙했다. 머리만 대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 수 있을 만큼.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물끄러미 의자에 걸어둔 외투와 협탁 위의 티켓을 보던 엘레노어가 홱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자 옆방으로 통하는 문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의식한 적 없던 그 문에서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문 너머에 누가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잠이나 자자.’
오른쪽으로 뒤척이면 외투와 티켓이, 왼쪽으로 뒤척이면 닫힌 문이 엘레노어의 신경을 살살 건드렸다. 엘레노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확 덮어썼다.
그 순간 잠옷에 밴 카이델의 향기가 코끝을 살살 간지럽혔다. 예상치도 못한 복병이었다. 그 몇 분 새 그의 향기가 옷에 배었을 줄이야.
‘아, 제발!’
엘레노어가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한참을 버둥거리고 나서야 엘레노어는 간신히 잠이 들 수 있었다.
이상하게 후덥지근한 밤이었다.
***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옆방의 카이델도 마찬가지였다.
방에 들어온 카이델은 곧바로 두 방 사이를 가로막는 문의 걸쇠를 풀어두었다. 문은 아주 오랜 시간 잠겨 있었기에 걸쇠는 뻑뻑했고 약간 녹이 슬어 있었다.
간단하게 씻고 나온 카이델이 이불을 젖히고 침상에 누웠다. 자연스럽게 그의 몸은 엘레노어가 잠든 공작 부인 방 쪽으로 향했다.
그래, 공작 부인 방 말이다.
카이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진작에 엘레노어를 향한 카이델의 마음을 눈치챈 조나단이 일부러 그녀에게 저 방을 내어준 것이 틀림없었다.
‘자고 있을까.’
팔을 베고 누운 그가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저 나무로 된 문일 뿐이 건만, 이상하게 가슴이 술렁거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방 너머에 한 사람이 잠들어 있는 것뿐인데, 갑자기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전부 새롭게 느껴졌다.
“좋은 꿈 꿔, 엘렌.”
엘레노어 몰래 불러본 애칭이 간지러웠다. 저도 모르는 새 슬쩍 얼굴을 붉힌 카이델이 제 뺨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정신 좀 차려, 얼빠진 놈.”
***
습관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늘 그렇듯 다섯 시에 눈을 뜬 카이델은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눈을 떴는데 일어나야 하나. 아니면 엘레노어의 말대로 일곱 시까지 누워 있어야 하나.
카이델이 어색하게 뒤척이며 문 쪽을 쳐다보았다.
‘엘레노어는 아직도 곤히 곯아떨어져 있겠지.’
카이델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눈을 감고 잠든 엘레노어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출장의 피로가 싹 가셨다.
시침이 여섯 시를 가리켰다. 카이델은 더 참지 못하고 일어나 엘레노어를 마주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가 옷장 앞을 심각한 표정으로 서성였다.
입을 옷이 없었다.
“옷이 겨우 이것뿐인가?”
근사해 보이고 싶었지만, 또 너무 신경 쓴 티가 나는 것은 싫었다. 적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각이 살아 있고, 우아하면서도 편안해 보여야 했다.
그러니까 꾸민 듯 안 꾸민 듯 꾸민, 그런 느낌이 필요했다.
“그냥 셔츠 차림이 낫겠지.”
뭘 입을지 모르겠을 때는 역시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최고였다. 새하얀 셔츠를 집어 든 카이델이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올렸다.
카이델의 손이 멈칫했다. 새로운 고민이 그를 집어삼켰다.
‘단추는 몇 개나 풀지?’
끝까지 단정하게 전부 채워 올리는 것은 지나치게 차려입은 느낌이 났다. 하나를 풀면 조금 낫기는 하지만 어딘지 약간 답답해 보였다.
두 번째 단추를 풀자 쇄골이 드러났다. 그리고 과감하게 하나를 더 풀자 단단한 가슴팍이 슬쩍 존재감을 과시했다.
단추 두 개, 혹은 단추 세 개.
카이델은 은근한 유혹과 조금 덜 은근한 유혹 사이에서 격하게 갈등했다. 단추 세 개를 풀어헤친 그가 책상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나저나 꼭 해야 한다는 말은 뭘까.’
카이델의 매끈한 미간에 옅은 골이 팼다. 그가 문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느른하게 기울였다.
어느새 일곱 시, 곧 엘레노어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다. 그때 문 너머에서 무언가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무언가 둔탁한 것에 부딪히는 소리에 카이델이 벌떡 일어났다.
“아야. 쓰으읍…….”
이어서 희미하게 엘레노어가 칭얼칭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구에 몸을 부딪친 모양이었다. 카이델이 눈썹을 찡그렸다.
‘괜찮은 건가?’
카이델이 저도 모르게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때 건너편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델, 들어가도…….”
엘레노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카이델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엘레노어는 갑작스럽게 눈앞에 들이닥친 단단한 가슴팍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될까요?”
엘레노어가 침을 꼴깍 삼켰다.
“들어와.”
카이델이 의자를 빼주며 앉기를 권했다. 엘레노어가 자연스럽게 그가 권한 자리에 앉자, 카이델이 맞은편에 앉아 그녀와 눈을 맞췄다.
“잘 잤나?”
“네……. 푹 주무셨어요?”
“덕분에.”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앞에 물 잔을 밀어놓으며 말했다.
“할 말이 있다고 했었지.”
“네.”
“중요한 말이라고.”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에 관한 거예요.”
그 순간 카이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물을 꿀꺽꿀꺽 들이켠 엘레노어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요즘 데미가 전처럼 움츠러들어서 걱정 많이 하셨잖아요. 저도 그랬고…….”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서 웃음이 가셨다.
“밤새 둘이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러고 나니 최근에 데미가 왜 이상하게 행동했는지, 애초에 왜 그렇게 입을 닫고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됐어요.”
“뭐가 문제였지?”
“타프만 백작을 비롯한 당신 가문의 어른들 때문이었어요, 카이델.”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뭐……?”
엘레노어가 데미안에게 들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카이델의 얼굴은 시시각각 창백해져, 나중에는 거의 푸른빛이 돌았다.
“지금껏 혼자 꾹꾹 눌러 참고 있었던 거예요. 데미는 그렇게 참는 게 습관이 되었고, 너무 많은 것을 담아놓고 살다 보니 오히려 입을 열 수가 없었던 거죠.”
이 순간 카이델의 표정을 어떻게 형용해야 할까. 엘레노어는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분노와 충격, 안타까움……. 그 외에도 수많은 감정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크고 강렬한 감정은 다름 아닌 죄책감이었다.
엘레노어가 손을 뻗어 카이델의 손등 위에 얹었다.
“몰랐던 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아니, 내 잘못이 맞아. 변명할 여지도 없는 내 잘못이지.”
카이델이 낮게 가라앉아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다른 한 손으로 거칠게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래서 데미가 말하지 말라고 했나 보다.”
엘레노어가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냐는 듯 카이델이 고개를 들었다.
“데미는 제가 당신에게 말하는 걸 두려워했어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당신이 걱정할까 봐요.”
카이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런…….”
“그야 당신이 상처받는 게 싫으니까요.”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손을 꽉 잡아주며 말했다.
“자기 때문에 당신이 힘들지 않았으면 하니까.”
카이델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두 사람은 모르는 것 같지만…… 제가 볼 때 둘은 정말 많이 닮았어요.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도 그렇고, 혼자 전부 감당하려는 미련함도 그렇고.”
엘레노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신이 해야 할 건 자책이 아니에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고, 데미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죠.”
“솔직하게……?”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요.”
카이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엘레노어가 그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카이델.”
***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누군가 저와 각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음해하는 겁니다.”
카이델의 집무실.
타프만 백작은 시뻘게진 얼굴로 길길이 날뛰었다. 핏대를 세우며 제 억울함을 토로하던 그의 머릿속에 엘레노어의 얼굴이 스쳐 갔다.
이토록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라면, 분명 그 눈엣가시 같은 여자가 뭔가 손을 쓴 것이 틀림없었다.
“설마 그 근본 없는 여자가…….”
“타프만 백작.”
카이델이 외숙의 말을 날카롭게 끊어냈다. 그에게서 살기가 넘실거리는 것에, 백작은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데미안을 엄하게 대한 것은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교육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발렌타인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을…….”
“내가 백작에게 데미안의 교육을 일임했습니까?”
카이델이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것은 아니지만…….”
“발렌타인의 이름은 당신이 신경 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데미안은 단 한 번도 발렌타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고.”
잠시 침묵하던 백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가신들을 전부 등지실 생각입니까?”
카이델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필요하다면.”
“현명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가문이 흔들릴 겁니다.”
카이델이 외숙을 힐끗 쳐다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발렌타인은 그 정도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내 카이델은 백작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가 책상 위에 놓인 조나단의 메모를 점검하며 말했다.
“지금 당장 떠나십시오. 그리고 데미안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 수도와 공작령 출입을 금합니다.”
“각하!”
카이델의 명령에 백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수도 출입이 금지된다는 것은 귀족에게 굉장한 수치였다. 사교계에서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이델이 말했다.
“제가 베푸는 최대한의 자비입니다.”
백작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도 출입 금지령만은 막아야 했다.
“저는 각하의 외숙입니다. 헬레나의 오라버니란 말입니다. 제가 각하를 돕기 위해 얼마나 애써 왔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각하께서 저를 그리 대하실 수는…….”
“잘 압니다.”
카이델이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그것이 지금 내가 백작을 인내하는 유일한 이유일 겁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푸른 눈동자에, 백작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제가 무슨 말을 꺼내도 결코 카이델의 마음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카이델이 살짝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끝이라는 뜻이었다.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