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참 이상한 이즈멜은 요즘 ‘싫어요’ 노이로제에 걸렸다. 엘레노어 때문이었다.
‘보고 싶은데.’
연회 때부터 시작된 엘레노어의 ‘싫어요’는 화해한 이후로도 어쩐지 쭉 이어지고 있었다.
“같이 산책할래?”
“아니요. 오늘은 좀 쉬고 싶어요.”
“차 한잔하지.”
“감사하지만 요즘 좀 바빠서요. 다음에요.”
대답은 친절했지만 어쨌든 요약하면 거절이었다.
이즈멜은 제 가장 큰 연적이 카이델이나 아드리안이 아닌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카이델과 엘레노어 사이에는 데미안이 있었고, 아드리안과 엘레노어 사이에도 사업이 있었다.
이즈멜이 루카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왜 갑자기 열심이냐, 넌.’
간간이 말썽을 부리며 엘레노어를 황궁으로 소환하던 루카스는, 어느 순간 시에나 못지않은 학구열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좋아해야 할 일인데 이상하게 조금 아쉬웠다.
이즈멜 몫의 다과를 탈탈 털어가며 종알종알 늘어놓던 수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의외로 쏠쏠한 정보도 많이 담고 있었다.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벌이 앉았다거나, 아드리안이 두 손 가득 맛있는 걸 사 왔다거나, 체술 수업이 끝나면 카이델은 땀 냄새가 날 거라며 엘레노어를 슬슬 피한다거나…….
“숙제 끝! 나 간다?”
“잘 가라, 루크.”
팔을 크게 휘적휘적 흔든 루카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떠났다. 이즈멜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나.
한때는 만인의 연인이라 불리던 이즈멜이었다. 한 번도 누군가를 대하는 것이 어려웠던 적이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사람의 호감을 얻는 일이라 생각했었는데, 또 거절당할까 봐 무서워 편지도 쓰지 못하고 있다니.
그때 누군가 똑똑,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드와이트 에버렛입니다.”
“들어와.”
가볍게 묵례한 드와이트가 이즈멜의 앞에 정갈한 서류뭉치를 내려놓았다.
“결재 부탁드립니다, 전하.”
여느 때처럼 예의 바른 미소를 건넨 드와이트가 집무실을 벗어나려던 때였다. 이즈멜이 덥석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러게. 내가 왜 그랬지.
잠시 눈을 깜빡이던 이즈멜이 재빨리 그에게 의자를 권했다.
“잠시 앉지.”
“예.”
“요즘 야근이 잦다지? 업무량이 과중하다면 인력을 보충해 줄 수도 있어.”
“아닙니다. 아직 배우는 단계라 그렇습니다. 맡은 일을 더 완벽하게 해내려면 좀 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쉬엄쉬엄해.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이즈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격려했다. 물을 한 모금 꿀꺽 삼킨 그가 말을 이었다.
“다들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해 주는 걸 알아. 늘 고마워하고 있네.”
“영광입니다.”
“그래서 말이야. 자네들을 위한 복지를 조금 더 마련해 볼까 해.”
뜬금없는 이즈멜의 말에 드와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레노어와 같은 빛의 초록색 눈동자가 이즈멜을 담았다.
“복지 말입니까?”
“예를 들면 가족들을 초대해서 다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낸다든지…….”
이즈멜이 힐끔 드와이트의 눈치를 살피며 화두를 던졌다.
드와이트는 단번에 제 상관의 의도를 파악했다. 엘레노어를 만나기 위해 쥐어 짜낸 변명이었다.
‘늘 근사하고 우아한 황태자도 사랑 앞에서는 별다를 것 없는 사내구나.’
드와이트가 깊은숨을 내뱉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의뭉스럽게 대답했다.
“저희 부모님이 아시면 무척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부모님……?”
엘레노어가 아니고?
허를 찔린 이즈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런 이즈멜을 보며 드와이트가 빙긋 웃었다.
“전부터 제가 일하는 환경에 대해 궁금해하셨는데, 그런 복지가 생기면 꼭 한 번 두 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지. 백작 부부를 언제 한 번…….”
이즈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얼굴의 그는 뒤늦게 달력을 확인하며 허둥지둥했다.
드와이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전하, 잠시 실례를 무릅쓰고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즈멜이 달력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와이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언했다.
“사랑에 있어서는 늘 정공법이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부하에게 속내를 훤히 꿰뚫린 이즈멜이 얼굴을 붉혔다.
맞는 말이었다. 긴장되고 두렵더라도, 멋이 좀 없고 체면이 상하더라도 직접 표현해야 했다.
큼큼 헛기침한 이즈멜이 물었다.
“그렇게 티가 나던가?”
“기침만큼이나 숨기기 힘든 것이 사랑이라지 않습니까.”
드와이트는 이즈멜이 무안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업무 관련 화제를 꺼내 들었다. 공적인 대화를 잠시 나눈 뒤, 드와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즈멜이 문득 물었다. 유치하지만 내내 궁금했던 것이었다.
“자네는 내 편인가?”
카이델이나 아드리안 말고.
이즈멜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던 드와이트가 대답했다.
“저는 제 동생 편입니다, 전하.”
다시 한번, 맞는 말이었다.
***
“루크, 요즘 왜 이렇게 열심히 해. 응?”
루카스의 단어 시험지를 채점하던 엘레노어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끽해야 반타작이던 전과 달리, 요즘 루카스는 다른 두 아이에 비해서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 성적을 보여 주었다. 수학은 좀 약했지만, 다른 과목들의 성장세는 무서울 정도였다.
“기특해서 상이라도 줘야겠는데?”
엘레노어가 루카스를 살짝 안아 주며 말했다. 루카스는 칭찬이 쑥스러운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엄청 잘 쳤네, 너.”
그런 루카스의 시험지를 슬쩍 훔쳐본 시에나가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그러자 루카스의 뺨이 조금 발그레해졌다.
‘귀여운 녀석들…….’
엘레노어는 흐뭇한 얼굴로 그런 루카스와 시에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요즘 엘레노어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루카스의 풋사랑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자, 다들 집에 갈 시간이야. 오늘도 수고했어.”
숙제를 내주고, 아이들의 가방을 꼼꼼하게 챙겨 준 엘레노어가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카이델과 데미안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직도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는지, 둘 사이에는 사람 하나가 앉을 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데미한테도 인사하고.”
엘레노어의 말에 루카스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시에나도 인사를 건넸다.
“다음 주에 봐, 데미. 공작님도 안녕히 계세요. 아니, 안녕히 가세요.”
카이델은 시에나의 눈빛에서 약간의 살벌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나는 거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카이델을 향해 견제의 눈빛을 날렸다.
카이델도 꽤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선생님을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오래 기다리셨죠?”
시에나와 루카스의 하원 지도까지 끝낸 엘레노어가 거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아니, 그다지.”
“괜찮아요.”
엘레노어가 나타나자 발렌타인 형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꼭 대형견 한 마리와 자그마한 강아지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 편해질 수 있을지, 그게 궁금하다는 거죠?”
엘레노어가 1인용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카이델이 두 손을 깍지 껴 잡으며 대답했다.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제가 시키는 것들은 전부 다 하시는 거예요.”
“그러지.”
카이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노어가 씩 웃었다.
“일단 첫 번째는 스킨십이에요.”
“스킨십……?”
카이델과 데미안의 얼굴에 당혹감이 퍼져 나갔다. 첫 번째 관문부터 쉽지 않았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일단 둘이 붙어 앉는 것부터 시작해요.”
“…….”
“지금부터요!”
엘레노어가 재촉하듯 무릎을 탁탁 두드렸다. 카이델과 데미안이 얼떨결에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 앉았다.
그저 팔이 닿는 거리에 나란히 앉는 것뿐인데, 두 사람은 정말이지 어색해 보였다.
“원래는 손을 잡으라고 하려고 했는데…….”
카이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도 맞추라고 하려고 했고요.”
이번에는 데미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 해요.”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과 데미안이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잘생긴 얼굴 위로 안도감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처음부터 많은 걸 요구하기는 어렵겠어.’
한숨을 푹 내쉰 엘레노어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의욕이 불타올랐다.
얼마가 걸리든 반드시, 반드시 이 두 사람을 친해지게 만들리라.
자세를 바로 한 카이델이 물었다.
“두 번째는 뭐지?”
“두 번째는 같이 일상을 공유하는 거죠. 꼭 특별한 걸 함께할 필요는 없어요. 짬을 내서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사소한 일이라도 괜찮아요.”
카이델과 데미안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매일매일 식사를 함께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죠. 아침마다 깨워 주며 인사를 건넬 수도 있고요.”
“아침에 깨워 주기라.”
그 정도야 할 수 있지. 카이델이 중얼거렸다.
그때 문득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카이델의 기상 시간이 떠올랐다. 새벽 다섯 시, 동틀 무렵 눈을 뜨는 남자였다.
엘레노어가 격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데미안의 소중한 아침잠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안 돼요! 절대 깨우지 마세요!”
급변한 반응에 당황한 카이델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두 눈에서 의아함이 듬뿍 묻어났다.
“왜지? 방금까지는 분명…….”
“우리 데미는 자고 싶은 만큼 푹 자야 해요. 성장기잖아요. 아침 일찍 깨우시면 안 돼요.”
“아.”
“데미는 착해서 깨우면 또 싫은 티도 안 내고 순순히 일어날 거라구요.”
엘레노어의 말에 데미안이 배시시 웃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듯했다.
“대신 밤에 재워 주세요.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