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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74화 (74/168)

74화

재워 주기라.

카이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깨워 주는 방법은 알겠는데, 한 번도 누군가를 재워 준 적은 없었다. 물론 누군가 그를 재워 준 적도 없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엘레노어가 눈을 깜빡거렸다.

이 남자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부모님이나 유모가 토닥이며 재워 준 기억이 있을 법도 한데, 카이델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엘레노어가 더듬더듬 설명을 덧붙였다.

“이불도 끌어 덮어 주고, 토닥토닥 해 주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일도 서로 이야기하고요.”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은 저를 토닥거리는 형이 상상이 가지 않는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주말에는 같이 운동을 하는 것도 좋겠어요.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연병장이 잘 닦여 있던걸요.”

“연병장에 가 보았다고?”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이 놀고 싶어 해서요. 혹시 훈련 중이면 돌아가려고 했는데, 기사님들이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기사님들……?”

카이델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다들 엄청 친절하셨어요. 먼저 와서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봐 주시고, 차양도 손수 쳐 주시고요. 아이들도 좋아하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랬단 말이지.”

요즘 훈련량이 좀 부족했던 것 같군.

카이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보지 않아도 훤하게 그려지는 그림에 카이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엘레노어가 경쾌하게 말을 이었다.

“다들 좋은 분들 같았어요. 머무는 내내 잘해 주셨는데 인사를 못 드리고 왔네요.”

“들소 같은 놈들이야. 인사는 내가 전해주지.”

돌아가자마자 네놈들은 전부 집합이다.

고요하게 끓는 그의 질투를 까맣게 모르는 엘레노어는 그저 해맑게 웃었다. 카이델이 싱긋 마주 웃었다. 엘레노어에게는 그저 다정하기만 한 미소였다.

***

그렇게 카이델과 데미안을 배웅한 엘레노어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심코 앞뜰을 슥 지나치려던 엘레노어가 발걸음을 멈췄다. 누군가를 본 것 같았다.

여기 있을 리가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누군가.

“전하……?”

엘레노어가 손등으로 두 눈을 박박 비볐다.

황태자 전하가 왜 우리 집 앞뜰에?

분수대 앞에 서 있던 이즈멜이 그런 엘레노어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현실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왜 여기 계세요?”

“그대는 왜 여기 있는데?”

“우리 집이니까요!”

“나도 같은 이유야. 그대의 집이니까.”

이즈멜이 저벅저벅 걸어와 엘레노어의 앞에 새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엘레노어가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이즈멜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보통 데이트 신청은 이렇게 한다던데. 집 앞에 찾아가서 꽃을 내민다고.”

“데이트 신청 처음이세요?”

“응. 보통은 내가 받는 편이지.”

이즈멜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자연스럽고 태연한 태도였다.

약간 얄미웠지만, 칙칙한 무채색의 망토를 뒤집어써도 반짝거리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납득이 되었다. 그럴 만했다.

“오늘 저녁은 나한테 양보해. 데이트하자.”

“오늘 저녁? 지금이요?”

그의 말을 잠시 곱씹던 엘레노어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이즈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이렇게 갑자기?”

“생각할 틈을 주면, 그대는 또 물고기처럼 빠져나갈 궁리만 할 테니까.”

정곡을 찔린 엘레노어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드리안과 카이델이 성큼 다가오는 것도 어색했지만, 이즈멜은 무려 황태자였다. 무도회에서 그와 저 사이의 거리감을 느낀 이후로, 엘레노어는 어쩐지 그를 대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즈멜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싫다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특유의 농담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얼굴을 붉히다 보면 시간이 쏜살처럼 흘러 있었다. 그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세어 봤는데, 지금까지 여덟 번 차였더군. 그대에게.”

“차이다니요! 그리고 오페라 같이 봤잖아요.”

엘레노어의 말에 이즈멜이 한쪽 눈썹을 슥 추켜올렸다.

“아이들 셋에 소후작까지 있는 자리를 데이트라고 할 수 있나? 심지어 그대는 내내 잤잖아.”

“그건…… 그렇지만.”

지금 이 상황만 보아도 그랬다. 말 몇 마디로 엘레노어를 꼼짝 못 하게 만든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냈다.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리시면 옷 갈아입고 올게요.”

엘레노어의 말에 이즈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우 눈부셔.

엘레노어가 서둘러 방으로 올라갔다. 적당히 화사하고 가벼운 드레스를 걸치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거울을 물끄러미 보던 엘레노어가 연지를 꺼내 입술에 톡톡 두드렸다.

‘그래도 데이트니까.’

확실히 이즈멜은 데이트에 익숙한 남자는 아니었다.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다니! 준비라고는 필요 없는, 그야말로 완성형 얼굴을 타고난 남자의 무심함이리라.

빨리 나가 보려던 엘레노어는 이즈멜이 후드로 된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이런 여름 날씨에 망토라니, 상상만으로도 땀이 났다.

드와이트의 방에 들러 챙이 넓은 모자를 챙겨 든 엘레노어가 후다닥 계단을 내려갔다.

“전하, 이거 쓰세요.”

“모자?”

“여름에 그런 망토가 웬 말이에요. 덥지도 않으세요?”

이즈멜이 조심스럽게 망토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눈에 띌까 봐…….”

“그런 차림이면 더 눈에 띄어요, 전하.”

아니나 다를까 이즈멜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엘레노어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가 손수건으로 땀방울을 훔치며 씩 웃었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그가 모자를 고쳐 쓰는 동안 엘레노어가 물었다.

“어디 가고 싶으신데요?”

이즈멜이 대답했다.

“오늘 장에 축제가 열린다더군. 첫날이라 볼거리가 많을 거라던데.”

“축제요?”

“가 본 적 있나?”

엘레노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드와이트나 아드리안이 북적거리는 곳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엘레노어도 자연스레 그런 곳과는 멀어졌었다.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은 느낌에 엘레노어가 활짝 웃었다. 호의적인 반응에 이즈멜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즈멜과 함께 걸음을 옮기던 엘레노어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축제라면 사람이 많을 텐데……. 호위도 없이 나가셔도 돼요?”

이즈멜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 안 되지. 그러니까 몰래 나가는 거야.”

“네에?”

엘레노어가 기겁하며 물러섰다. 어쩐지 눈앞의 남자에게서 루카스의 모습이 보였다. 닮은 구석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무모하고 장난스러운 게 틀림없는 루카스였다.

이즈멜이 그런 엘레노어의 모자 위에 손을 척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대를 내 호위로 임명할게.”

그렇게 엘레노어는 황태자의 호위가 되었다.

***

양손에 먹을 것을 가득 든 엘레노어가 닭꼬치를 보며 말했다.

“저거 먹고 싶어요.”

“또?”

벌써 다섯 종류는 먹었는데.

놀라움이 가득 담긴 이즈멜의 물음에 엘레노어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처음 보는 엘레노어의 날카로운 모습에 이즈멜이 움찔하며 꼬리를 내렸다.

“그래, 먹어. 많이 먹어.”

닭꼬치를 두 개나 더 먹고서야 엘레노어는 주변의 풍경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길거리 음식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한국에서 먹던 것과는 당연히 다르지만, 그 감성만은 그대로였다. 짜고 달고 매운, 익숙한 맛. 건강한 맛에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지만, 가끔은 이런 맛이 그리웠다.

“사람이 진짜 많네요.”

엘레노어가 모자를 꾹 눌러쓰며 말했다. 이즈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눈에 덜 띄는 것 같기도 하고.”

이즈멜의 말대로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아무도 서로를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처음에는 모자를 꾹꾹 눌러쓰던 두 사람은 점차 편안한 마음으로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다.

“어, 다트네?”

엘레노어가 다트판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손가락질했다. 엘레노어가 관심을 가지자 주인이 얼른 다가와 지갑을 열도록 부추겼다.

“어렵지 않으니 한번 해 보시오. 상품도 있어.”

주인이 가리킨 선물더미는 그리 근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 이런 게임에서 상품이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때요? 우리 내기할까요?”

“내기?”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요?”

“나야 좋지. 해 본 적 있어?”

“없어요.”

여기서는.

하지만 전생의 회식 자리에서 여진은 다트의 여제로 불리곤 했다. 친구들은 여진의 운동 신경이 오로지 다트에만 몰려 있는 것 같다며 혀를 찼다.

엘레노어와 이즈멜을 번갈아 본 주인이 얼른 끼어들며 다트를 넘겨주었다.

“좋소. 큰 원부터 차례대로 2점, 4점, 6점, 8점이오. 가운데 까만 점이 10점이고.”

이즈멜이 먼저 선 앞에 섰다. 다트의 무게를 슬쩍 가늠해 보던 이즈멜이 이내 그것을 힘껏 던졌다.

“8점!”

나쁘지 않은데. 이즈멜의 실력을 가늠한 엘레노어가 손을 털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트를 쥐자 예전의 감각이 손가락을 타고 찌르르 흘러드는 것 같았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엘레노어는 이 순간 누구보다 진지했다.

후우. 호흡을 고른 엘레노어가 힘껏 다트를 던졌다.

“10점!”

“좋았어!”

엘레노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했다. 이즈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 본 적 없다며?”

“타고났나 봐요.”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즈멜이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두 번째 다트를 던졌다.

“10점!”

“그렇지!”

환호한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보며 씩 웃었다. 그 웃음에 엘레노어의 승부욕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10점, 10점, 또 10점…….

팽팽한 승부가 이어졌다. 엘레노어는 10점을 놓치지 않았고, 이즈멜 역시 처음을 제외하고는 내내 과녁의 정중앙을 명중했다.

“그대의 손에 승부가 갈리겠군.”

이즈멜이 엘레노어에게 다트를 전해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이 흘렀다. 승부욕이라면 지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그냥 지금 항복하시면 너그럽게 대해드릴게요. 간단한 소원으로.”

“어림없는 소리. 승부는 끝까지 가 봐야 아는 거지.”

“보셨잖아요. 어차피 제가 이긴다니까요.”

엘레노어가 이즈멜에게 제 가방을 맡겨 놓고 선 앞에 섰다. 이 순간 엘레노어의 세상에는 과녁과 그녀, 단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즈멜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엘레노어를 빤히 지켜보았다. 처음 보는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잘해.”

“마음에도 없는 말인 거 다 알아요.”

진심인데.

이즈멜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엘레노어에게 이기나 지나 그에게는 나쁠 게 없었다. 이기면 소원을 들어달라며 다가가고, 지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다가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 안 돼!”

그래도 내심 제가 이기기를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하늘은 이즈멜의 손을 들어 주었다.

다트가 엘레노어의 손을 떠나기 직전, 사람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달려가던 아이가 엘레노어와 퍽 하고 부딪친 것이다.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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