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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77화 (77/168)

77화

카이델이 99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굳게 먹었건만 저 멀리 황궁 정문이 보이자 말머리를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다른 방법은 없어.’

카이델의 얼굴을 확인한 문지기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카이델은 이즈멜에게 만남을 청했다. 이즈멜이 카이델의 요청을 수락하고, 곧 황태자궁의 응접실에 둘을 위한 다과가 준비되었다.

10분쯤 기다렸을까. 이즈멜은 짜증스러운 기색을 조금도 감추지 않으며 걸어 들어왔다.

“용감하군. 제 발로 찾아오다니.”

“들으셨습니까.”

이즈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내 동생을 울리고, 엘레노어에게 몹쓸 짓까지 했다는 것? 그럼. 들었지.”

몹쓸 짓이라니.

카이델의 눈썹이 불만으로 삐딱하게 솟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반대 입장이었다면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엘레노어가 공평하게 만들겠노라 약속했다지.”

이즈멜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솟았다.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일단 던지고 보았을 엘레노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올 거면 엘레노어가 와야지. 네가 왜.”

“엘레노어가 왜 옵니까?”

카이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이 흉흉했다.

카이델을 둘러싼 검은 기운에 움찔한 이즈멜이 자리에서 덩달아 일어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공평하기 위한 겁니다. 아이들이 바라는 것처럼.”

이즈멜의 어깨 위에 카이델의 손이 얹혔다.

“뭐, 뭐 하는 거야?”

“저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다음 순간, 카이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카이델은 이즈멜의 볼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가 곧바로 몸을 물렸다. 닿지 않았지만, 피차 서로를 위해 그것이 나았다.

‘!’

닿은 느낌도 들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정말 닿지 않은 게 맞나?

닿았는데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아니야, 닿지 않았어.

닿지 않았으니 괜찮은 거지?

이즈멜이 넋 나간 얼굴로 제 뺨을 부여잡았다. 머릿속이 아주 바쁘게 돌아갔다.

카이델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루카스에게는 적당히 둘러대 주십시오. 서운할 것 없이 전부 공평해졌다고요.”

***

카이델이 100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이즈멜보다도 더 불편한 놈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아드리안이 어둑한 정원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그의 표정 역시 살벌했다.

“늘 그리 반가운 분은 아니시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요.”

아드리안이 팔짱을 단단히 꼈다.

“엘레노어와 내 사이, 개인적인 일이야.”

“그 개인적인 일, 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만.”

“아이들이 보게 된 것은 유감이야. 다음부터는 주의하지.”

다음부터는?

아드리안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그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다음 같은 것은 없을 겁니다. 각하께서는 오늘처럼 ‘실수’만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애초에 정말 실수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다음이 없길 바라는 것은 소후작의 개인적인 바람이겠지. 뜻대로 되진 않을걸. 난 어떻게든 다음 기회를 잡을 거거든.”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아드리안이 물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카이델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세상의 모든 시름과 고난을 홀로 짊어진 사람 같았다.

“시에나가 그러는데, 공평해야 한다더군.”

“그게 무슨…….”

“잠시만 가만히 있어.”

카이델이 아드리안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잡았다. 사람 같지 않은 악력에 아드리안의 입이 꾹 다물렸다.

쪽.

그 순간 카이델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아드리안이 몸을 움직이며 거리 조절에 실패한 탓이었다.

“미친…….”

두 사람이 나직이 욕설을 지껄이며 서로를 확 밀쳐냈다. 카이델은 제 입술을, 아드리안은 제 뺨을 벅벅 문질러 닦아냈다.

“뭡니까?”

“움직이지만 않았어도 닿지 않을 수 있었어.”

입술 주변이 붉게 달아오를 때까지 힘주어 닦아낸 카이델이 말했다.

“전하께도 그대에게도 엘레노어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했으니 이제 공평해졌군. 이 일은 이제 끝난 거야. 엘레노어와 상관없이 해결된 거지.”

아드리안은 그제야 카이델의 꿍꿍이를 알아챘다. 아드리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흑기사라는 건데…….

“엘렌도 이 해결 방법에 동의했습니까?”

“엘레노어는 몰라.”

그나마 다행인가. 아드리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뭐가 되었든 엘레노어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추한 꼴이었던 것은 확실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카이델이 물었다.

“알았다면 동의했을까?”

아드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안 그래 보여도 은근히 짓궂은 데가 있어서…….”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계획을 들었다면 눈을 빛내며 동조했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평생을 놀려먹었겠지.

“엘렌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동의한다. 시에나에게는 알아서 둘러대. 서운해하지 않도록.”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히 망각 속에 남겨두어야 할 밤이 그렇게 흘러갔다.

***

카이델이 진짜 해결했다.

대체 어떻게 해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해결했다.

아이들도 조용하고, 다른 두 사람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평소 둘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분명 그 일로 입을 대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도대체 뭘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엘레노어가 거실 소파에 앉아 서류를 뒤적거리는 아드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리안.”

“응?”

아드리안이 곧바로 엘레노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이델이 뭘 어떻게 한 거야?”

하지만 엘레노어의 질문을 듣자마자 곧바로 다시 시선을 떨궜다.

“몰라도 돼.”

“아 왜. 궁금하단 말이야.”

엘레노어가 칭얼거리자 아드리안이 픽 웃었다.

“궁금할 것도 많다.”

“무슨 얘기 했는지 말해 주면 안 돼?”

“응, 안 돼.”

아드리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평소였다면 적당히 넘어가 주었을 텐데, 가차 없는 태도였다.

“궁금해하지 마. 다쳐.”

아드리안이 진저리치듯 잘게 어깨를 떨었다.

‘카이델이 무섭게 대했나?’

엘레노어가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있을 때였다. 아드리안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엘렌, 다음 주 금요일에 시간 돼?”

“금요일? 아마도. 왜?”

“다음 주에 아카데미 동기 모임이 있는데, 같이 갈 수 있을까 하고.”

동창회?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물었다.

“그럼 드와이트는 누구랑 가?”

“그건 그 녀석이 알아서 고민해야지.”

아드리안이 시크하게 대답했다. 엘레노어가 빠르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런 자리는 좀 불편…….”

엘레노어가 거절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아드리안이 슬쩍 덧붙였다.

“선상 파티라던데.”

“갈래! 나 갈래!”

엘레노어가 번쩍 손을 들었다. 아드리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래, 가자.”

선상 파티.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곳에 가게 된다니.

크고 아름다운 배 위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샴페인을 터뜨리고, 기분 좋게 알딸딸해지면 갑판에서 불꽃놀이를 보는 거다.

상상 속에 푹 빠져든 엘레노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재밌겠다! 신난다!

아드리안은 그런 엘레노어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엘레노어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른다는 건 정말로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다.

그때 알베르가 편지 트레이를 들고 다가왔다.

“아가씨 앞으로 황궁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아드리안과 엘레노어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황태자일까.

아드리안이 슬쩍 엘레노어의 표정을 살폈다.

공작도 거슬렸지만, 황태자 역시 만만찮은 상대였다. 오페라를 보며 신경전을 벌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열이 뻗쳤다.

“전하께 온 거야?”

아드리안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척,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아니…….”

하지만 엘레노어의 대답에 아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안심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황후 폐하께 온 거야.”

“황후 폐하?”

“응.”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봉해진 편지를 뜯었다. 편지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엘레노어 에버렛 양.

황후입니다. 그동안 잘 지냈지요?

오랜만에 차 한잔 하며 이야기나 나눌까 하여 초대장을 보냅니다.

궁 안이 적적하니, 엘레노어처럼 총명한 말벗이 그리워져요.

부디 날 위해 시간을 내주길 바라요.」

황후의 초대였다.

엘레노어의 손끝이 파들파들 떨렸다. 벌써부터 긴장이 되었다.

이건 안 재밌어……. 안 신나…….

엘레노어의 눈꼬리가 축 내려갔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엘레노어의 옆으로 다가온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들었다.

“황후 폐하가 한번 보자셔. 무서운데.”

“괜찮을 거야. 그냥 학부모 상담이라고 생각해.”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 별로 도움 안 되거든?”

“그래 놓고 잘할 거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편지를 톡 내려놓으며 웃었다.

“난 다 알아.”

***

얌전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엘레노어가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했다. 전에도 구경했던 황후궁의 정원이었다.

초록이 짙어진 낮의 정원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엘레노어는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 황후를 독대하기는 처음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신경이 쓰였다.

‘앉아 있어도 되나? 서서 기다리는 게 예법에 맞나?’

나무 그늘에 새하얀 티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엘레노어는 의자 끝에 살짝 걸터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빙빙 돌기를 반복했다.

“엘레노어, 오랜만이에요.”

그때 등 뒤에서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왜 그렇게 서 있어요? 다리 아프지 않아요?”

“앉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레노어의 말에 황후가 작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것 없어요. 편하게 이야기나 나누고 싶었던 거니까. 앉아요.”

먼저 자리에 앉은 황후가 손을 내밀어 앉기를 권했다. 엘레노어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편하게 이야기나 나누자는 말은 왜 항상 불편한 사람이 꺼내는 것일까.

전생에서나 이번 생에서나 변함없는 법칙이었다.

“요즘 루카스가 공부에 열심이라는 소문을 들었어요.”

“네, 아이들이 서로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어 주는 것 같아요.”

“엘레노어가 잘 가르친 거지요. 그 애에게 좋은 친구들이 생겼다니 다행이네요. 덕분에 내 마음도 한결 편해요.”

황후의 말에 엘레노어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입안이 마르는 기분에 찻물을 들이켰다.

“요즘 날이 더워서 냉침차로 준비했어요. 입에 맞나요?”

“네! 너무 좋아요.”

엘레노어가 바짝 군기 든 신병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는 그런 엘레노어의 반응을 보며 즐겁게 웃었다.

“갈 때 찻잎을 챙겨 줄게요. 더울 때는 이만한 게 없지요.”

황후가 우아하게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엘레노어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끄러운 그녀의 몸짓을 보며 감탄했다.

이즈멜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타고난 우아함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 같았다. 엘레노어는 절대 가질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렇게 스치듯 이즈멜을 생각한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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