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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79화 (79/168)

79화

“그때 그분이네! 너한테 매번 편지 보내던 분!”

남자의 말에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안녕하세요. 마르스 델리온입니다. 아드리안의 룸메이트였죠.”

아드리안의 룸메이트라니.

엘레노어가 얼른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마르스. 엘레노어 에버렛이에요.”

“드디어 만나네요. 아드리안이 틈날 때마다 보고 있던 편지의 주인공.”

“틈날 때마다요?”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드리안이 수줍은 듯 괜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답장은 안 했어도 읽기는 열심히 읽었구나.’

엘레노어가 설핏 웃었다. 한참이나 늦었지만, 그때 느꼈던 서운함이 스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마르스가 호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들 궁금해했습니다. 애인이냐고 물으면 아니라는데, 편지 읽는 표정은 수상하기 짝이 없었거든요.”

“그쯤 해 둬, 마르스.”

아드리안이 마르스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며 만류했다. 그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제프리가 툭 덧붙였다.

“드와이트의 쌍둥이 동생이시래.”

“아, 그래?”

다들 드와이트와도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 엘레노어가 어색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엘레노어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쩐지 얼굴이 좀 익숙하다 했더니. 졸업식 날 오셨죠?”

“네, 갔었어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드리안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한눈에 반해서 그때 드와이트에게 소개를 부탁했었는데…….”

“어머, 그래요?”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드리안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닥쳐, 그리핀.”

“어째서인지 아드리안한테 뒤통수를 얻어맞았었지요.”

엘레노어의 시선이 아드리안의 뺨에 꽂혔다. 그는 맞은편에서 능글거리며 실실 웃고 있는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에서야 맞은 이유를 알았네요. 하하.”

오랜만에 만난 탓인지, 그동안의 근황을 주고받는 데만 한 시간이 훌쩍 흘렀다. 엘레노어는 멍하니 앉아 향 좋은 와인을 홀짝거렸다.

가끔 배가 크게 출렁거릴 때를 제외하고 나면 선상 파티라고 특별할 것은 없었다. 엘레노어의 환상이 약간씩 깨어졌다.

그렇다고 심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아드리안의 학창 시절 이야기가 끝도 없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남자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인 아드리안은 평소와는 좀 달랐다. 직설적이고 까칠한 건 사춘기 시절과 닮았지만, 훨씬 성숙해 보였다.

‘너무 마셨나. 화장실 가고 싶다.’

조금씩 홀짝거린다는 게 꽤 많이 마셨다. 엘레노어가 슬쩍 눈치를 살피곤 몸을 일으켰다.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

“어디 가?”

시선이 쏠린 탓에 화장실에 간다고 대놓고 말하기가 민망했다. 엘레노어가 대충 둘러댔다.

“아, 그냥 구경.”

“같이 가.”

응, 넌 같이 못 가.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어깨를 꾹 눌러 앉혔다.

“아니야. 넌 이야기 마저 나눠. 그냥 쭉 둘러만 볼 거야.”

그제야 엘레노어의 의중을 눈치챈 아드리안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래. 조심하고.”

볼일을 마친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돌아가려 걸음을 뗐다.

‘누구지? 친구들인가?’

드레스를 잘 차려입은 여자들이 아드리안을 쭉 둘러싸고 있었다. 웃으며 슬쩍슬쩍 어깨를 건드리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확실히 오랜만에 본 친구가 반가워 순수하게 다가간 것 같지는 않았다. 엘레노어와 함께 온 것을 봤을 텐데도 그들은 무척 적극적이었다.

“흐응, 인기 많았다더니 진짜네.”

엘레노어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느른하게 기울였다. 어쩐지 미묘했다.

저 사람들을 다 뚫고 자리에 앉아야 하나, 아니면 돌아가기를 잠시 기다려야 하나.

엘레노어가 멈춰 서서 잠시 고민하던 때였다. 저 멀리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달리아 모리스?”

상대도 엘레노어를 발견한 것 같았다. 먼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안녕.”

엘레노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달리아가 슬쩍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공작저에서의 만남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달리아가 교재 개발에 관여했다는 것을 아는 엘레노어는 그녀를 보는 게 약간 껄끄러웠다.

잠시 머뭇거리던 달리아가 물었다.

“너희 오빠랑 왔니?”

“아니, 아드리안.”

엘레노어의 말에 달리아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다들 궁금해하는 파트너가 너였구나.”

엘레노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아가 제안했다.

“잠시 갑판에 나가서 이야기할래?”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은 어둑한 갑판으로 나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자 속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엘레노어는 난간을 붙잡고 찰랑거리며 반짝이는 물결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웠다.

그때 달리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교재 일 말이야.”

“네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데.”

달리아가 어깨를 움찔했다.

“……유감이야. 치사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엘레노어는 말없이 달리아와 눈을 맞췄다. 긴장한 달리아가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거절하려고 했어. 정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막내 공자를 오래 가르쳐 왔고…….”

달리아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엘레노어를 볼 수 있을지 몰랐다.

장황하게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이던 엘레노어가 손을 들어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러니까…… 너 나한테 미안하구나?”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지만, 결국 요약해 보면 그것이었다. 엘레노어는 단단히 팔짱을 낀 채 달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정곡을 찔린 달리아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맞아. 미안해.”

흠. 엘레노어가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달리아는 힐끔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그래. 용서할게.”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그녀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정말?”

달리아가 얼떨떨한 듯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먼저 사과해 줬잖아. 네 입장이 곤란했던 것도 이해해. 기분 좋지는 않지만, 진짜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그런데도 달리아는 아직 뭔가 찝찝한 얼굴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몰라. 그냥 뭔가…… 좀 더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좀 싱겁달까.

달리아의 말에 엘레노어가 허리를 척 짚었다.

“더 화내 줄까?”

달리아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어느덧 그녀의 얼굴은 순하디순하게 녹아 있었다. 엘레노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글쎄. 인생은 짧잖아. 오래 화나 있고 싶지는 않아.”

엘레노어가 난간에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아드리안에게 바로 돌아간다는 게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걱정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 들어가 볼게.”

엘레노어가 달리아를 향해 대충 팔을 휘적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엘레노어가 막 돌아선 찰나, 달리아가 그녀를 불렀다.

“엘레노어.”

왜 그러냐는 듯 엘레노어가 고개를 돌렸다.

“네 것을 지키고 싶으면 주변을 조심해. 사람을 너무 믿지 마.”

“무슨 소리야?”

의미심장한 말에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달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는 말 못 해. 하지만 내 말 명심해. 주변을 잘 둘러봐.”

달리아가 후다닥 자리를 떴다. 엘레노어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한 말을 곱씹었다.

그냥 뱉은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짚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요즘 엘레노어의 일상은 평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주변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거지?’

아드리안, 카이델, 이즈멜의 얼굴이 차례로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중 의심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달리아가 말하는 걸 보면, 아나이스가 또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엘레노어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옆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혹시, 엘레노어 에버렛?”

나이가 지긋한 백발노인이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누구시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컸구나.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도 너를 찾아갔었단다. 내 이름은 아스터 로고스토아다. 혹시 기억하느냐?”

아스터 로고스토아.

어렸을 때는 까맣게 몰랐지만, 이제는 엘레노어도 그에 대해 잘 알았다.

벨리움 선대 황제의 책사, 아카데미 전대 교장을 역임한 그는 전설적인 학자였다. 학문의 깊이가 깊은 것은 물론, 인망도 두터워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의 이름을 딴 학파가 존재할 정도였다.

“앗,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레노어 에버렛입니다.”

엘레노어가 재빨리 치맛자락을 붙잡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그때는 귀여운 꼬마 아가씨였는데, 이제는 세련된 숙녀가 다 되었구나. 시간이 어쩌면 이리도 빠른지…….”

아스터가 껄껄 웃으며 손으로 풍성한 수염을 쓸어내렸다. 옆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모습에 엘레노어의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네 근황은 신문에서 보았다. 문득문득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순간 여기저기서 네 이야기가 들려오더구나. 어찌나 반갑던지.”

“감사합니다.”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아봤지. 난 아직도 네가 면접 마지막 질문에 답했던 말을 기억한단다.”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저는 그때 받은 질문도 기억이 안 나는데요?”

“오늘이 세계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지.”

엘레노어는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지 정확하게 알 것 같았다. 주입식 교육의 잔재였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대답했겠네요.”

“오, 기억하고 있느냐?”

기억하다마다요. 아마 지금 묻는대도 같은 대답을 했을 텐데요.

엘레노어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날 들은 것 중 가장 인상 깊은 대답이었지. 네 대답을 통해 내가 내내 고민하던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어. 고맙다, 엘레노어.”

다른 사람의 명언을 슬쩍 빌려온 사람에게는 지나친 칭찬이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푹 조아리자, 그는 겸손하기까지 하다며 그녀를 더욱 추켜세웠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지? 괜찮은 아이가 있느냐?”

엘레노어가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학생들은 모두 탁월한 인재예요.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훌륭한 아이들이랍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기대가 되는구나.”

아스터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가 물었다.

“그다음 일은, 생각해 보았느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끝나면 말이다.”

엘레노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잖아도 요즘 가장 고민하는 문제였다.

“요즘 열심히 고민하는 중이에요.”

“그래? 그렇다면 제안을 하나 하고 싶구나.”

아스터가 엘레노어를 보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세계를 자유롭게 누비며 공부하고 싶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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