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아나이스의 눈물에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당황한 이즈멜이 카이델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자자, 데려가.”
곤란한 상황을 떠넘기는 것에 카이델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하.”
“왜, 아까부터 춤추고 싶어 하지 않았나. 별일도 아니잖아. 그냥 한 곡 춰.”
이즈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연회의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그냥 맞춰 주라는 뜻이었다.
‘거절하면 그대만 모양이 나빠질 거야.’
카이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 순간 아나이스의 입매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카이델을 향해 바짝 다가섰다.
“감사해요, 각하.”
***
엘레노어를 발견한 아드리안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손에는 샴페인 한 잔과 주스 한 잔을 들고 있었다.
“엘렌.”
아드리안의 부름에도 엘레노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나이스와 카이델을 지켜보고 있었다.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자 비로소 엘레노어의 시선이 아드리안에게로 향했다. 엘레노어가 작게 투정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한참 기다렸네.”
“응, 잠시 이야기 나눌 게 있어서.”
그렇구나. 엘레노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앞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이젠트 공녀 때문에 신경 쓰여?”
“응?”
멍하니 있던 엘레노어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드리안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그 이후로 처음 보는 거잖아. 아니야?”
아, 그 얘기를 하는 거구나.
엘레노어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각하께 할 말이 있다던데.”
“그래?”
엘레노어 앞으로 주스 잔을 밀어놓은 아드리안이 넌지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엘레노어는 별말 없이 주스를 쭉 들이켰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엘레노어의 표정은 평소와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생기가 없었다.
‘샴페인은 안중에도 없네. 엘렌답지 않게.’
엘레노어가 홀의 중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카이델과 아나이스가 함께 춤을 추는 것이 보였다. 장내의 모든 이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아나이스가 카이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엘레노어의 눈에는 두 사람이 유독 정다운 한 쌍처럼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렸다. 그림처럼 잘 어울린다는 말은 저 두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드리안도 비슷하게 느낀 듯 입을 열었다.
“잘 어울리네. 분위기도 어딘지 비슷하고.”
“그러게.”
엘레노어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씩 웃었다. 아나이스를 계속 보고 있어 봐야 기분만 나빠질 것 같았다.
“네가 준 선물, 하고 왔어.”
그때 아드리안이 슬쩍 손목을 내밀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초록색 보석을 본 엘레노어의 표정이 밝아졌다.
“예쁘다. 잘 어울려.”
엘레노어가 활짝 웃었다. 얼굴에 엷게 드리웠던 그림자가 한순간 거두어졌다. 평소의 엘레노어였다.
그제야 아드리안은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넌 그렇게 웃는 게 잘 어울려.”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픽 웃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래, 그렇게 웃으라고.”
아드리안이 팔을 뻗어 엘레노어의 코를 톡, 건드렸다. 엘레노어가 눈을 깜빡하며 콧등을 살짝 찡그렸다.
“나 오늘 화장했거든! 얼굴 건드리면 안 돼, 바보야.”
“평소랑 똑같은데?”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멈칫했다.
“……평소에도 예쁘다는 거야, 오늘이 특히 별로라는 거야?”
“말 안 해 줘. 비밀이야.”
엘레노어가 보챘지만 아드리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손등을 꼬집었다.
“아.”
별 느낌도 오지 않았지만, 아드리안은 괜히 아픈 척 소리를 냈다. 엘레노어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많이 아팠어?”
아드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마음이 약해 힘껏 꼬집지도 못하는 주제에, 혹시 아팠을까 봐 슥슥 손으로 문질러 주는 것이 좋았다.
‘그냥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아드리안은 생각했다.
그가 엘레노어의 기분을 풀어주면 엘레노어는 그냥 픽 웃어 버리고, 그가 툭 던진 장난에 엘레노어가 발끈하는 이런 순간. 이런 순간이 영영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
“할 말이 뭐지?”
“의외로 성격이 급하시네요, 각하.”
그런 면도 매력적이지만.
아나이스가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보통 남자였다면 간은 물론 쓸개까지 가져가라며 애걸했을 만큼 매혹적인 미소였다.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어쩐지 조금 긴장이 되었다. 반드시 그를 유혹하겠다고 마음먹었건만, 그녀가 홀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카이델이 직구를 던졌다.
“내게 관심이 있나?”
한시라도 빨리 대화를 끝내기 위함이었다. 아나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이 좋아요.”
아나이스가 카이델의 단단한 팔을 손끝으로 긁듯이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확실하고 노골적인 유혹이었다.
“당신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요. 우린 완벽한 파트너가 될 거에요. 모든 면에서.”
“미안하지만 난 당신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
카이델이 아나이스에게서 슬쩍 몸을 물리며 말했다.
“따로 마음에 품은 이가 있다. 그러니…….”
“알아요. 엘레노어 에버렛.”
이 정도 반응은 이미 예상했었다. 아나이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제가 다가가지 못할 이유는 없죠.”
“내가 그 마음을 받아줄 일은 없을 거야. 당신 부친과의 관계를 생각해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니 그쯤 해 둬.”
“싫다면요?”
아나이스가 당돌하게 물었다. 카이델은 급작스레 피로가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더 이상 정중하지 못하겠지. 내 마음이 변할 일은 없으니 자존심을 지키도록 해.”
카이델이 아나이스를 보며 경고했다. 아나이스는 저를 그저 귀찮은 짐짝처럼 내려다보는 시선에 충격을 받았다.
‘진짜 날 보면서도 아무 감정이 안 든다고?’
평생을 공주처럼 대접받으며 살아온 아나이스였다. 어디서도 이런 취급은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아나이스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자존심은 각하께서 지키셔야 할 것 같아요. 에버렛 영애가 대놓고 세 사람을 저울질하고 있는데 그 위에 제 발로 올라서셨잖아요.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는 못 하죠.”
카이델이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슥 끌어 올렸다.
“잘 알고 있군. 내 발로 올라선 거야. 내 선택이고, 내 사랑이니 그에 따르는 책임도 내가 질 거다. 남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
사랑.
조금의 의심도 없이 터져 나온 그 단어에 아나이스의 마음 한구석이 바스러졌다.
오래 좋아해 왔다. 어린 시절, 그를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이 사람이라 생각했다. 언젠간 그도 그녀를 봐줄 거라 굳게 믿으며 기다렸다. 카이델 같은 남자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제국에 아나이스, 그녀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엘레노어 에버렛, 그 품위 없는 여자라니. 그녀보다 나은 구석이라곤 없고 괴짜 같은 일만 일삼는 엘레노어 에버렛, 그녀를 사랑한다니.
“에버렛 영애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신데요?”
아나이스가 툭 물었다. 카이델이 아나이스와 눈을 맞췄다.
“전부.”
카이델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나이스가 만족하지 못한 듯 그를 올려다보자, 카이델이 말을 조금 더 덧붙였다.
“나는 엘레노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 생각해. 그렇게 예쁜 사람은 본 적이 없어.”
“말도 안 돼.”
이 남자는 미적 감각이라는 게 없나? 아나이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좋아. 웃는 얼굴도, 놀란 얼굴도, 짜증이 난 얼굴도 좋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좋아. 엘레노어 에버렛이라는 이름도 마음에 들어.”
아나이스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단단히 미쳐 있었다.
엘레노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목소리도 얼굴도, 조금 전까지와는 천지 차이였다.
그는 정말 사랑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리 애써도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패배의 예감이 아나이스의 척추를 타고 흘렀다.
아나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에버렛 영애를 마음에 두고 계신 것은 아시죠? 황후 폐하께서도 그녀를 기꺼워하세요. 오늘도 접견 내내 그녀를 딸처럼 옆에 앉혀 두셨죠.”
카이델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황후가 엘레노어를 아낀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혹시 그녀가 엘레노어를 황태자비로 점찍어둔 것이라면…….
카이델의 동요를 느낀 아나이스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황가의 일원이 될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각하께 승산이 있을까요?”
잠시 말없이 아나이스를 바라보던 카이델이 입을 열었다.
“그야 엘레노어가 선택할 일이지. 승산 같은 건 따질 필요 없어. 내게 확률이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연주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카이델이 자연스럽게 아나이스에게서 두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뿐인 거지.”
가볍게 묵례한 카이델이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아나이스는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완패였다.
‘이건 말도 안 돼. 겨우 그런 여자 때문에……. 가만 안 둬.’
***
무도회가 끝나고 몇 주가 흘렀다.
“말도 안 돼.”
책상 앞에 앉아 책장을 휙휙 넘겨 보던 엘레노어가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내 생각과 똑같은 게 우연히 나올 수가 있나?”
아드리안이 넌지시 일러주었던 뫼젠어 교재가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엘레노어가 종이에 그리며 구상했던 것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장점은 물론 단점까지도.
엘레노어가 서랍을 열었다.
‘분명 그때 그 계획서가 있을 거야.’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사업 계획서가 보이지 않았다.
‘왜 없지? 버렸을 리가 없는데…….’
엘레노어는 결코 사업 관련 서류들을 버리지 않았다. 사소한 메모 한 장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사업 계획서를 잃어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혹시 다른 책 사이에 끼어들어 간 것은 아닌지 열심히 찾았지만, 엘레노어가 찾는 문서는 없었다.
그때 문득 선상 파티에서 달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 것을 지키고 싶으면 주변을 조심해. 사람을 너무 믿지 마.’
‘주변을 잘 둘러봐.’
그 순간 등줄기가 쭈뼛하며 소름이 돋았다. 달리아가 말해 주고자 했던 것이 이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다.
“이것도 아나이스가 꾸민 일일까?”
엘레노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말 주변 사람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이상하기는 했다.
뫼젠어 교재를 물끄러미 보던 엘레노어가 중얼거렸다.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는데…….”
엘레노어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판단한 이상 그냥 지나갈 수는 없었다. 이번 일은 엘레노어가 폐기한 아이디어인 만큼 아무 피해 없이 지나갔지만, 만약 그녀가 사력을 다한 결과물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만약 정말 내 문서에 손을 댄 범인이 있다면, 어떻게 색출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