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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93화 (93/168)

93화

카이델과 루카스만 문제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두 사람에게 잔뜩 잔소리를 늘어놓은 엘레노어가 옆방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즈멜과 시에나가 있는 방이었다. 첫 번째 방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곳도 엉망이었다.

“루카스가 좋아, 데미안이 좋아?”

이즈멜이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시에나가 대답했다.

“둘 다 좋아요.”

“그런 거 없어. 한 명만 골라야 해.”

이즈멜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시에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도 루카스랑 조금 더 친하긴 해요. 아주 조금. 모래알만큼.”

시에나의 대답에 이즈멜이 한참이나 웃었다.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나랑 카이델이랑 삼촌 중에서 누가 제일 잘생겼지?”

시에나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다 잘생겼어요.”

“알아.”

이즈멜이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1등이야?”

흐음. 시에나는 세 사람의 반짝거리는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이즈멜이 기대감에 찬 눈으로 시에나의 판단을 기다렸다.

“객관적으로 공작님이 제일 잘생겼어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즈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소파에 다시 등을 기댔다. 소심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그래도 저는 전하처럼 예쁜 사람이 더 좋아요.”

시에나가 이즈멜을 살살 달래듯 말했다. 단순한 그는 또 그 말에 슬며시 웃고 말았다.

“물론 제일 인기 많은 얼굴은 우리 삼촌 같은 타입이에요.”

“어째서?”

이즈멜의 질문에 시에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휴, 전하는 여자의 마음을 하나도 모르시네요. 당연한 건데.”

“그럼 시에나 네가 가르쳐 줘. 왜 당연한데?”

시에나가 통통한 다리를 척하고 꼬며 말했다.

“일단 공작님부터 생각해 보세요.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기셨지만, 너무 완벽하면 원래 다가가기 힘든 법이라고요. 거기다 공작님은 좀 인상이…….”

“더럽지.”

“전 차갑다고 하려고 했는데요.”

시에나가 눈썹을 으쓱했다.

“전하께서도 그렇게 다가가기 쉬운 인상은 아니에요.”

“어째서? 공작이랑 달리 난 늘 웃고 있는데.”

“웃는다고 다 되는 게 아니거든요.”

시에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즈멜이 다리를 꼬며 제 입가를 슥슥 매만졌다.

“웬만한 언니들보다 전하께서 더 예쁘게 생기셨어요. 그럼 옆에 가기 좀 부담스럽죠.”

“그 이유는 납득이 가는군.”

이즈멜이 더 해 보라는 듯 짧게 턱짓했다.

“우리 삼촌이 딱 적당하죠. 모난 데 없이 잘생기고 인상도 순하고……. 그렇다고 전하처럼 막 예쁘게 생긴 건 아니고요.”

시에나가 날카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이즈멜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말이었다.

어느덧 엘레노어의 부탁은 의식 저편으로 멀어졌다. 이즈멜은 이 야무진 어린이와의 대화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이즈멜이 회심의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이랑은 누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시에나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히 삼촌이죠.”

이즈멜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물었다.

“아니, 시에나. 주관적인 감정을 좀 배제하고 생각해 봐.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우리 삼촌이라니까요?”

시에나가 답답하다는 듯 소파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리며 대답했다. 약간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삼촌이 없으면? 카이델이랑 나, 둘뿐이면?”

다급해진 이즈멜이 조건을 덧붙였다.

“삼촌이 왜 없어요? 우리 삼촌 있는데.”

“없애버렸다고 치고.”

이즈멜의 말에 시에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시에나의 입술이 삐죽삐죽하기 시작하더니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서서히 차올랐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즈멜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없애버린다는 게 아니라……. 가정법이야, 가정법.”

“우리 삼촌 왜 없애요!”

시에나가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엘레노어가 방으로 들어왔다. 엉엉 울고 있는 시에나를 본 엘레노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애를 얼마나 잡았으면!’

엘레노어가 시에나를 꼭 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엘레노어의 가슴팍이 시에나의 눈물로 동그랗게 젖어 들어갔다.

“왜 울어, 응?”

하지만 이즈멜을 탓하지는 않았다. 오늘 모인 까닭이 압박에 적절히 대처하는 법을 대처하는 법이니 어쩌면 이것도 경험일 터였다.

“선생님, 전하가 우리 삼촌 없애버린대요.”

“……으응?”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물음표 백 개가 떠올랐다.

엘레노어가 설명을 요구하듯 이즈멜을 바라보았다. 이즈멜이 멋쩍은 듯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그게 말이지. 엘레노어……. 아주 자그마한 오해가 있었어. 내 잘못이 아예 없다는 건 아니고.”

엘레노어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이즈멜은 변명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눈썹 끝을 늘어뜨렸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이야기야.”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방에서는 루카스가 카이델을 울 것 같은 얼굴로 만들어 놓더니, 이 방에서는 시에나가 울음을 터뜨린다. 엘레노어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결말이었다.

***

엘레노어의 의도대로 흘러간 방은 딱 하나뿐이었다. 아드리안과 데미안이 마주 앉은 방이었다.

“끝났어?”

엘레노어가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드리안과 데미안이 엘레노어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앞의 두 방과 달리 공기부터가 차분했다. 엘레노어의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응. 데미안은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

아드리안이 데미안을 보며 씩 미소 지었다.

“시종일관 차분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던걸.”

“정말?”

“거기서도 지금 했던 만큼만 하면 돼, 데미. 잘했어.”

아드리안이 엄지를 들어 보이자 데미안이 배시시 웃었다.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아드리안에게도 칭찬을 건넸다.

“리안, 너도 잘했어.”

“그냥 난 시키는 대로 한 것밖에 없는데?”

“그걸 못하는 사람들도 많더라고…….”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중에 루카스랑 시에나도 다시 봐줄 수 있어?”

“기꺼이. 그런데 왜?”

“카이델은 루크한테 완전히 말렸고, 전하께서는……. 나도 모르겠다.”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 사람이 응접실로 향하자, 미리 앉아 있던 네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시에나의 눈은 붕어처럼 부어 있고, 카이델은 반쯤 영혼이 나간 얼굴로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이즈멜은 엘레노어와 시에나의 눈치를 살살 살피고 있고, 루카스는……. 그저 즐거워 보였다.

엘레노어가 네 사람을 쭉 둘러보았다. 혼나기를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모습들에, 엘레노어는 또 스르륵 물러지고 말았다.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요.”

엘레노어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좋아. 나도 배고팠거든.”

“나도요!”

“난 스테이크 먹을래! 스테이크 먹으면 키 큰대요.”

“스테이크를 먹어서 키가 큰 게 아니라…….”

순식간에 방이 왁자지껄해졌다. 대가족이 모인 것처럼 훈훈하고 친밀한 분위기였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엄격할 수 있을까. 어쩐지 힘이 쭉 빠졌다.

‘이제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네.’

엘레노어는 문득 그 사실을 실감했다. 아이들의 시험이 끝나고 나면, 더는 이렇게 모일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눈만 마주치면 서로에게 시비를 걸고 으르렁거리지만, 아이들에게는 그저 한없이 자상한 세 사람이었다. 다 함께 모여 복작거릴 때면 공기마저 평소보다 상쾌했다.

‘아이들이 아카데미로 떠나고 나면…….’

벌써 서운하다니. 이러면 안 되는데.

엘레노어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속도 많이 썩이고 마구 안겨 올 때면 온몸이 욱신거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들이었다.

이런 게 부모의 마음, 아니, 스승의 마음이겠지.

“왜 그런 표정이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때 엘레노어를 물끄러미 보던 아드리안이 툭 물었다. 걱정 섞인 눈빛이었다.

“그냥. 이제 애들 아카데미로 가 버리고 나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

“아.”

아드리안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의 눈가가 조금 촉촉해졌다.

“벌써 마음이 허해. 이래서 처음부터 안 하려고 피했던 건데. 결국 이렇게 진심이 되어 버린단 말이야.”

그가 엘레노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즐거웠잖아. 안 그래?”

“응…….”

“그리고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고. 방학하면 올 텐데, 뭐.”

그럼 또 제발 아카데미로 빨리 돌아가 주길 바라게 될걸.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에게 농담을 건넸다. 엘레노어가 작게 웃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으면 편지를 써도 되고, 아니면 같이 보러 가도 괜찮겠다. 교수로 일하고 있는 친구를 알아. 출입증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거야.”

아드리안은 늘 그렇듯 순식간에 엘레노어를 달래 놓았다. 그가 엘레노어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며 씩 웃었다.

“지금은 그냥 같이 웃고 즐거워하자. 나중에 정말 울적해지는 날이 오면, 그때도 같이 서운해 해 줄 테니까.”

***

식사가 끝나고, 아이들은 황태자궁의 정원을 마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즈멜과 엘레노어가 그늘에 앉아 차를 홀짝이며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아드리안은 그 모든 풍경에서 조금 떨어져 서 있는 카이델에게 다가갔다.

“각하.”

“소후작?”

아드리안이 말을 걸어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카이델의 목소리 끝이 살짝 올라갔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드리안이 대화를 청했다. 이 또한 뜻밖의 일이었다. 카이델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각하께서는 데미안이 졸업 후에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 아십니까?”

“……아니.”

죄책감을 느낀 카이델이 작게 대답했다. 요즘 많이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데미안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아드리안은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오늘 데미안과 이야기를 좀 나누었는데,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더군요.”

카이델의 발걸음이 멈췄다.

“의사?”

“물론 훌륭한 일입니다만, 고위 귀족들에게는 흔치 않은 일 아닙니까.”

아드리안은 ‘흔치 않은 일’이라 에둘러 표현했지만,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카이델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그렇군. 이유에 대해서도 말해 주던가?”

“어머니 때문이라 하더군요. 사람들에게 소중한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 더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카이델이 나직이 침음을 흘렸다. 데미안을 볼 때마다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이었다.

그런 카이델을 흘끗 쳐다본 아드리안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각하 때문이라고도 했습니다.”

“나?”

“지금까지 형이 자기를 지킨 것처럼, 어른이 되어서는 자기가 형을 지켜 주고 싶다고요.”

아드리안의 말에 카이델이 숨 쉬는 것을 멈췄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용암처럼 뜨거운 감정이 훅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눈물이 흐르지는 않는데, 울음이 터지기 직전처럼 목이 따끔거렸다.

아드리안이 그런 카이델의 어깨를 툭 두드린 뒤 그를 지나쳐 갔다.

“멋진 동생을 두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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