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카이델, 왜…….”
당황한 엘레노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당연히 아드리안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카이델이 나타나자 당황한 것이었다.
카이델은 엘레노어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카이델의 시선이 방 안의 풍경에 짧게 머물렀다가, 다시 엘레노어에게로 옮겨왔다. 그의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엘레노어는 그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가 차츰 창백하게 질리는 것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빤히 보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가 엘레노어의 맨발에 닿았다.
맨발.
‘아……!’
엘레노어는 지금 제가 아드리안의 셔츠 한 장만을 걸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엘레노어는 카이델의 두 눈에서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의 동요를 읽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당혹감? 확실히 당황한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분노? 그의 얼굴은 무서울 만큼 굳어 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하지만 그 또한 정답은 아니었다.
“카이델.”
엘레노어가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카이델이 힘껏 주먹을 말아쥐었다.
엘레노어가 지금의 모습을 해명하려 입술을 막 달싹였을 때였다.
“……실례를 저질렀군.”
희다 못해 푸르게 질린 카이델이 그녀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진심으로 사과하지.”
그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달칵.
문이 닫히는 순간, 엘레노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뇌가 멈춘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엘레노어의 얼굴에서 혈색이 가셨다. 잠시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엘레노어가 마음을 굳혔다.
카이델을 붙잡아야 했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아.’
엘레노어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카이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애가 탄 엘레노어가 반쯤 뛰다시피 계단을 내려갔다.
“엘렌.”
그런 엘레노어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계단을 올라오던 아드리안이었다.
“리안, 비켜 줘.”
엘레노어가 제 앞을 막은 팔을 힘껏 밀쳐냈다. 하지만 단단한 팔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드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를 가는 거야.”
“카이델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
“그런 차림으로?”
아드리안의 시선이 슬쩍 아래를 향했다. 커다란 셔츠 아래로 희고 가느다란 다리가 쭉 뻗어 있었다.
열린 단추 틈으로 보이는 빗장뼈도, 도드라진 손목뼈도, 조금 불그스름한 발꿈치도 전부 자극적이었다.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횡설수설 대답했다.
“아무래도 뭔가 오해한 것 같아. 해명하기도 전에 가 버려서…….”
“왜 해명해야 하는데?”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어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태양처럼 찬란하던 금빛 눈동자가 이 순간만큼은 서늘했다.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왜 그가 오해하게 두면 안 돼?”
그러게. 왜 안 될까.
엘레노어의 몸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팔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그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기로 했잖아. 그때 이야기해. 신발도 안 신고 어디를 나가려고. 안 돼.”
“그렇지…….”
엘레노어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의 말이 다 맞았다. 이런 차림으로 그를 쫓아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고, 그에게 방금 일을 해명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가 아드리안과 제 사이를 오해해 마음이 상하리라는 것도 결국은 추측에 불과했다. 어떤 약속도 하지 않은 관계이니, 사실 그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 의무도 없는 것이었다.
다 맞는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찝찝했다.
“네 말이 맞아. 너무 깜짝 놀랐었나 봐.”
엘레노어가 다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젖은 머리카락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도 덜 말랐네. 감기 걸리겠다. 빨리 올라가자. 머리 말려 줄게.”
“응.”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이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의자에 앉았다. 아드리안이 자연스럽게 마른 수건으로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어렸을 때는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에게 자주 해 주곤 했던 것이었다.
아드리안도 그 이야기를 했다. 아니, 했던 것 같다.
사실 엘레노어의 귀에는 지금 아무런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특별히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데, 그냥 무엇에도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엘렌?”
그때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저녁 뭐 먹고 싶냐고.”
“난 다 좋아.”
다 좋다.
아드리안이 제일 질색하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비도 오고, 너랑 형수님 숙소에 딸린 레스토랑이 좋겠다. 나가기 번거롭잖아. 각하께는 내가 메모 남겨 놓을게.”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걸을 수 있겠어? 마차를 빼 오려고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한참 기다려야겠더라고.”
“당연하지.”
엘레노어가 싱긋 웃어 보였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훨씬 가늘었다.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은 커다란 우산을 쓰고 나란히 델른 시내를 걸었다.
선선한 바람과 시끄러운 거리의 소음에 둘러싸이니 잡념이 좀 가셨다. 20분쯤 걸어 숙소에 도착하니 로비에 시에나의 엄마, 헤스티아가 서 있었다.
“헤스, 오래 기다리셨어요?”
“예약해 두려고 내려왔어요. 아드리안 말로는 비를 많이 맞았다던데, 엘레노어는 괜찮은가요?”
“네. 다행히 금세 몸을 녹일 수 있었거든요.”
엘레노어는 대답하며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카이델은 보이지 않았다.
“어서 들어가요. 배고팠을 텐데.”
헤스티아가 가볍게 엘레노어의 등을 떠밀었다. 엘레노어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진행되는 내내 엘레노어는 식당 문 쪽을 힐끔힐끔 살폈다. 하지만 번번이 카이델이 아닌 낯선 사람들만 들어올 뿐이었다.
그때 헤스티아가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는 바쁜 일이 있으셨나 보네요. 시에나가 입이 마르게 칭찬하던 분이라 한 번 꼭 뵙고 싶었는데.”
“방문에 메모를 남겨 두었는데. 아무래도 다른 용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아드리안이 제 몫의 고기를 슥슥 썰며 여상히 답했다. 엘레노어가 습관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아마 다른 일로 바쁜 것일 테다. 그는 늘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까.
어쩌면 다른 사람과 선약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아카데미 출신이니, 델른에 지인들이 있을 것이다.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닐 거야. 카이델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
엘레노어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돌아가기 전에 말할 기회가 분명 있을 거야. 괜찮아.’
***
삐걱. 삐그덕.
침대에 누워 책을 읽던 카이델이 눈썹을 찡그렸다. 소후작이 돌아온 모양이다.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여관의 나쁜 점이 이것이었다.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헤어졌나 보군.’
벽을 슬쩍 노려본 카이델이 입꼬리를 움찔했다.
몇 년 만인지 모를 낮잠을 자고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즐기는 여유인지 모르겠다.
책 한 권을 다 읽은 카이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드리안에게 저녁 식사 계획을 묻기 위해서였다.
쿵쿵쿵.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분명 아까 기척을 들었는데,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나?’
쿵쿵쿵,
이번에는 조금 더 힘주어 문을 두드렸다. 비척비척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이내 문이 활짝 열렸다.
“리안, 왔어?”
그리고, 엘레노어가 나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에 카이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엘레노어도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반가움은 찰나였다. 카이델은 이곳이 아드리안의 방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상기해냈다.
“……엘레노어.”
“카이델, 왜…….”
그의 시선이 방 안으로 이끌리듯 향했다.
어수선하게 던져진 신발, 바닥으로 반쯤 흘러내린 이불, 옆으로 던져진 베개, 흐트러진 시트.
점점이 흩어진 단서들을 이어 가다 보니, 자연히 머릿속에 연상되는 것이 있었다.
카이델의 심장이 발끝으로 추락했다. 카이델은 제가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폐가 한계까지 팽팽하게 부풀었다.
카이델의 시선이 엘레노어에게로 옮겨왔다.
젖은 머리카락, 약간 부은 눈, 아마도 아드리안의 것일 셔츠, 눈처럼 희고 가느다란 다리, 약간 불긋해진 맨발.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힌 카이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탈력감이 밀려왔다.
‘아…….’
얼굴 근육이 뻣뻣해지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카이델은 지금 제가 직면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카이델이 고개를 들어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갔다. 애써 부정하고 있는 것에 쐐기를 박는 듯한 표정이었다.
“카이델.”
엘레노어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카이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천천히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정신은 없었지만, 그가 계속 이렇게 엘레노어와 마주 보고 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은 돌아왔다.
“……실례를 저질렀군.”
카이델이 엘레노어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기계적인 행동이었다. 평생 몸에 익혀온 예의범절이 이런 순간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진심으로 사과하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카이델이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없었다. 하지만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카이델이 복도를 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어떻게 걷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인지 저도 모를 노릇이었다.
1층에 도착했을 때, 카이델은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이와 마주했다. 아드리안이었다.
아드리안이 카이델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각하, 외출하십니까?”
카이델은 말없이 길고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카이델의 시선이 아드리안이 들고 있는 녹색 드레스에 닿았다. 카이델의 눈에도 익은 것이었다. 엘레노어가 즐겨 입던 것이었으니까.
잠시 드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이델이 아드리안을 스쳐 지났다. 툭, 어깨가 강하게 부딪쳤다.
“윽.”
뒤에서 그를 의아하게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카이델은 돌아보지 않았다.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자, 찬비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굵은 빗방울이 피부를 세차게 긁으며 떨어져 내렸다.
“하.”
누군가 목을 콱 틀어쥔 것처럼 막혔던 숨이 뒤늦게 터져 나왔다. 카이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던 엘레노어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순간의 온도, 습도, 냄새……. 모든 것이 카이델의 가슴속에 각인되었다.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엘레노어의 선택은 아드리안 블레이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