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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03화 (103/168)

103화

엘레노어도 나름대로 일머리가 있는 편이었지만, 이즈멜의 깐깐한 기준을 통과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즈멜과 일한 지 겨우 일주일, 엘레노어는 슬슬 그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여기 단위가 빠져 있는데, 엘레노어.”

“앗, 죄송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이 페이지 순서도 황실 보고 지침과 다르게 되어 있어. 수정 부탁해.”

“앗, 넵.”

“이 부분은 설득력이 조금 부족해. 재무대신은 깐깐한 사람이야. 명분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가능한 한 걷어내고, 객관적인 수치만 남기도록 해.”

“넵…….”

“수정하면 나한테 먼저 확인받고.”

목소리만 다정하면 뭐하나. 내용이 하나도 안 다정한데.

이즈멜은 일하다가도 문득문득 고개를 들어 엘레노어 쪽을 쳐다보았다. 덕분에 엘레노어는 딴짓도 하지 못하고 출근 시간부터 퇴근 시간까지 일에만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이즈멜도 엘레노어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열심히 일했으므로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었다. 산처럼 쌓인 서류를 처리하고 나면 또 다른 서류 더미가 들어오는 식이었다.

엘레노어는 이즈멜의 책상을 힐끔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원래 황태자가 저 정도로 일이 많은가? 나중에 황제로 즉위하시고 나면 정말…… 나처럼 과로사하시는 거 아닌지 몰라.’

하지만 측은한 마음도 잠시였다. 이즈멜의 다정한 잔소리와 친절한 지적에 한바탕 시달리고 나면 그가 그렇게 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제발 재택근무 시켜 줘!’

한 시간에 1년씩 늙어가는 엘레노어와 달리, 이즈멜은 10년은 어려진 듯 생기가 넘쳤다.

엘레노어의 책상 옆에 딱 붙어선 이즈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하면서도 온종일 엘레노어 그대를 볼 수 있다니.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하하, 그런가요?”

저는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응, 그대를 보기만 해도 힘이 솟는 것 같아.”

“힘이 나신다니 다행이네요.”

저는 전하가 저를 보고 계시면 온몸에서 땀이 솟는 것 같습니다만.

“하루가 너무 빨리 가서 아쉬울 정도야. 시곗바늘을 붙잡아 두고 싶군. 퇴근 시간을 늦추든지…….”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퇴근을 건드리는 건 못 참지.

엘레노어가 도끼눈을 뜨고 이즈멜을 올려다보았다.

분노한 다람쥐 같은 엘레노어의 얼굴을 본 이즈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왜 그래?”

당황한 탓에 이즈멜은 그답지 않게 말도 더듬었다.

엘레노어는 아무 말 없이 이즈멜을 빤히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이즈멜의 붉은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엘레노어가 두 주먹을 꼭 그러쥐고 결연하게 말했다.

“전하, 저 오늘 한 번도 못 쉬었어요. 정확하게는 일주일 내내 그랬어요.”

“……응?”

“출근해서 지금까지 밥 먹을 때 말고는 내내 일만 했다구요. 잠깐 숨도 못 돌렸어요.”

어리둥절한 이즈멜의 얼굴을 보자 약이 올랐다. 엘레노어가 눈썹을 찡그리며 이즈멜에게 서운했던 것을 털어놓았다.

“계속 저 일 하나 안 하나 감시하시고!”

“감시한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간 건데…….”

“일 하나 끝내면 어떻게 아셨는지 바로 다음 일 주시고!”

“그대가 빠르게 해치우니까…….”

“그거야 빨리하고 쉬려고 그랬던 거죠!”

엘레노어의 콧등이 자꾸만 찡긋거렸다. 앙다문 입술도 움찔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단단히 뿔이 난 모양이었다.

‘어떻게 화를 내는 것도 귀엽지.’

이즈멜은 자꾸만 솟으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 내렸다. 콩깍지가 단단히 씐 건지, 엘레노어가 이상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짠하고 미안한 감정과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는 감정이 이즈멜의 안에서 사투를 벌였다. 이즈멜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이즈멜이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엘레노어.”

“…….”

“내 배려가 부족했어. 진심으로 사과할게.”

이런 사과까지 바란 건 아니었는데.

빠르게 진정된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엘레노어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니에요……. 일하러 왔으니까 일하는 게 맞는데, 제가 괜히 투정을 부린 것 같아요.”

“아니야. 일하면서도 중간중간 휴식 시간을 갖는 게 맞지. 그대가 너무 잘해 주는 바람에 내 욕심이 너무 앞섰어.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이즈멜의 말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었다.

“저 일 잘했어요?”

이즈멜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음 같으면 곧바로 내 보좌관으로 채용하고 싶은데.”

“하지만…… 종일 혼내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엄청 못하고 있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 말에 이즈멜이 펄쩍 뛰었다.

“혼내다니. 내가 언제 그랬어?”

“제가 오늘 온종일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수정하라는 거예요. 과장 안 하고 100번은 들은 것 같은데요.”

엘레노어의 말에 이즈멜이 피식 웃었다.

“그대가 못했으면 수정하라는 말도 안 했을 거야. 그냥 내가 직접 고쳤겠지. 수많은 수정사항을 일일이 설명하느니 그쪽이 덜 성가실 테니까.”

“흠.”

“정말이야. 그대에게 맡긴 일 중에 내 손으로 다시 해야 했던 건 하나도 없었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즈멜이 엘레노어 앞의 서류들을 손으로 짚어 주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대가 실수한 부분들은 그 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야. 황실에서 쓰는 지침과 정리 방식에 맞지 않았던 거지. 그대는 충분히 잘해 줬어. 이제 겨우 일주일인걸.”

엘레노어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낯선 일, 낯선 공간, 낯선 양식.

엘레노어는 어떻게든 빨리 적응하려 아등바등했던 것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게 기뻤다. 그녀를 믿어 준 이즈멜에게 일로 인정받고 싶었기에, 그의 칭찬은 의미가 컸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잠시 쉴까? 다과라도 들면서.”

이즈멜의 말에 엘레노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소파 앞 테이블에 신선한 과일과 온갖 간식들이 가득 차려졌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로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이즈멜은 소파에 앉아서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바빴다. 서류를 뒤적이기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사과를 아삭아삭 베어 문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이 그렇게 많으세요?”

이즈멜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조금. 신경 쓰지 말고 양껏 먹어.”

“늘 이렇게 바쁘셨던 거예요? 전하께서 쉬는 걸 못 봤어요.”

“최근에 좀 많이 바빠졌어. 늘 이랬으면 황궁 담 넘어서 도망쳤을 거야. 황태자니 뭐니 못 해 먹겠다고.”

이즈멜이 작은 토피 하나를 입에 넣으며 농담을 건넸다.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국가 기밀.”

이즈멜이 장난스럽게 입술 위에 검지를 대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모습마저도 지금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피곤해 보이세요.”

이즈멜이 눈가를 비비며 대답했다.

“오늘따라 눈이 좀 뻑뻑하군.”

“잠시 눈이라도 붙이세요. 조금 이따 깨워드릴게요.”

이즈멜이 피식 웃으며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당연히 장난인 줄 알았는데, 엘레노어는 무척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표정이었다.

이즈멜은 거절하려던 마음을 바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잠깐 정도는 쉬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 부탁하지.”

이즈멜은 소파에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다. 긴 다리가 소파 아래로 반쯤 튀어나왔지만, 지금은 그런 것 정도는 가뿐히 무시할 수 있을 만큼 피곤했다.

딱히 잠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소파에 몸을 누이는 순간 졸음이 벼락처럼 몰아닥쳤다. 이즈멜은 순식간에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정말 피곤하셨나 봐.’

머리를 대자마자 잔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이즈멜을 빤히 보던 엘레노어가 속으로 생각했다, 엘레노어는 씹어도 소리가 나지 않을 간식을 오물거리며 이즈멜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크으.’

눈도, 코도, 입도 잘생겼다.

거창하게 벨리움의 미래를 점칠 수는 없겠지만, 미래의 황제와 황태자들도 전부 잘생겼으리라는 것은 감히 예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생김이란 대대손손 내려오는 것이므로.

엘레노어는 이즈멜의 얼굴 위에 내려앉은 햇볕이 신경 쓰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곤히 잘 자고 있었지만, 혹여나 눈이 부셔 잠에서 깰까 봐 걱정이 되었다.

‘밤잠은 제대로 자시나 몰라.’

엘레노어가 이즈멜이 누운 소파의 팔걸이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눈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잠시라도 푹 주무셨으면 좋겠다.’

10분쯤 지났을까. 이즈멜이 잠에서 깨어났다. 짧게라도 잤다고 머리가 한층 개운했다.

‘정말 순식간에 잠들었군. 누가 있어서 못 잘 줄 알았는데.’

이즈멜이 부스스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누군가의 새하얀 손바닥이 가득 찼다.

‘손?’

그의 손에 비해 한없이 작은 손이었다. 이즈멜이 슬쩍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엘레노어가 팔을 뻗어 그의 눈 위에 우산처럼 손을 드리우고 있었다. 햇빛이 눈에 거슬릴까, 마음을 써 준 것이었다.

‘그대는 참…….’

이즈멜은 숨죽인 채 가만히 누워 엘레노어의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가 엘레노어의 손금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다가, 둔덕 아래로 투명하게 비치는 푸른 핏줄에 잠시 멈추었다가, 어울리지 않게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손가락으로 다시 올라갔다.

‘이렇게 작은 손이 든든하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상한 기분이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무언가에 압도된 듯 숨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심장에서 시작된 간질거림이 혈관을 타고 번져갔다.

늘 완벽하게 다듬어진 모습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태자란 그런 자리였다. 빈틈이 드러나는 순간 그것을 노리는 자들이 순식간에 덤벼들곤 하는 자리.

하지만 엘레노어에게는 어쩐지 자꾸만 틈을 내어주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불안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허용하고 싶어졌다. 더 다가와도 된다고. 더 요구해도 된다고. 나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즈멜이 손을 뻗어 엘레노어의 손을 감싸 쥐었다. 작은 손이 그의 손안에 완전히 숨겨졌다.

“전하? 깨셨어요?”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던 엘레노어가 깜짝 놀라 이즈멜을 내려다보았다.

“응.”

“이제 좀 덜 피곤하세요?”

“그대가 햇빛을 가려 준 덕분에 잘 잤어.”

이즈멜이 싱긋 웃었다. 그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엘레노어는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잡힌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일 거다.

엘레노어 에버렛은 무방비하게 잠이 들면 곁에 앉아 그늘을 드리워 줄 사람이라서.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면 되레 그것을 조심스럽게 가려 줄 사람이라서.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참이나 엘레노어를 올려다보던 이즈멜이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너무 잘해 주지 마, 엘레노어.”

“네?”

이즈멜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달콤씁쓸한 웃음이었다.

“자꾸 욕심내게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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