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엘레노어와 이즈멜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서 만났다. 영문도 모른 채 맑게 반짝거리는 초록색 눈동자, 어딘지 무겁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
“왜 그런 것 같아?”
이즈멜이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툭 물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엘레노어는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오해받고 싶지 않으니까요……?”
엘레노어의 대답에 이즈멜이 낮게 웃었다.
“그래, 물론이지.”
이 헛똑똑이 아가씨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단번에 알 것 같은데.’
그 허술함마저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느껴지는 걸 보니 상사병도 이쯤 되면 중태였다.
이즈멜은 엘레노어의 마음이 어디로 기울었는지 눈치채고 말았다. 눈치가 빠른 것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사실 전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카이델을 보는 엘레노어의 시선은 뭔가 조금 달랐으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생각하냐고?”
“별것도 아닌 일을 제가 너무 부풀려 생각한다고 생각하세요?”
엘레노어는 카이델에게 마음이 있다. 본인들만 모를 뿐, 곁에서 보면 다 티가 났다.
“글쎄.”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이즈멜은 밀려오는 갈증에 남은 와인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하지만 오래 가문 땅에 물 한 컵을 부은 것처럼 입안이 금세 말라 버렸다.
‘그래서?’
이즈멜은 제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엘레노어의 감정을 눈치챘으니 포기하고 마음을 접는 것이 맞는 건가? 아니면 엘레노어가 아직 제 감정을 자각하지 못했으니 밀어붙여 보아야 하나?
“나는 그저…….”
고민하던 이즈멜이 무심결에 손에 힘을 주었다.
챙그랑.
얇디얇은 와인 잔이 이즈멜의 손안에서 순식간에 깨어졌다. 당황한 이즈멜이 저도 모르게 깨어진 유리 조각에 손을 댔다.
“안 돼요!”
엘레노어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이즈멜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즈멜의 검지를 타고 붉은 선혈이 흘렀다.
“깨진 유리를 손으로 건드리시면 어떡해요.”
이즈멜에게 성큼성큼 다가선 엘레노어가 그의 손을 살폈다. 유리가 박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녀가 깨끗한 치마폭으로 이즈멜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조심하셔야죠. 안 그러시던 분이…….”
“…….”
“아프세요?”
“아니.”
이즈멜은 그런 엘레노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손을 꼭 붙잡은 부드러운 손, 상처를 이리저리 살피는 눈, 끊임없이 그를 걱정하는 입.
“깊이 베인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에요. 집무실에 상비약이 있나요? 아니면 사람을 불러올게요.”
“엘레노어.”
“네?”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어 이즈멜과 눈을 맞췄다. 그가 다친 게 못내 신경 쓰이는지 미간에 옅은 골이 패어 있었다.
이즈멜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엘레노어는 그런 그에게 압도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를 예감한 심장이 조금씩 박동하는 속도를 더했다.
“나랑…….”
이즈멜이 떨리는 입술을 뗐다.
이즈멜은 엘레노어를 똑바로 바라보며 느릿하게 물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반쯤은 충동이었고, 반쯤은 쭉 생각해 왔던 것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었다.
붙잡고 싶었다. 엘레노어의 관심도, 시선도, 손길도 다 제 것이었으면 했다.
머리로는 이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급해도 너무 급하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할 수 없을 말 같아서, 이즈멜은 엘레노어를 붙잡고 말았다. 이즈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그대만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은데.”
엘레노어와 있는 동안에는 관의 무게만큼 과중한 업무도, 구렁이 같은 대신들과의 기 싸움도, 나라 간의 팽팽한 긴장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줄 수 있어. 그대가 되라 하는 그 무엇이든 되어 줄 테니.”
이즈멜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심장이 금세라도 터져나갈 것 같은 긴장을 느끼며, 이즈멜이 말을 맺었다.
“다른 것 신경 쓰지 말고, 내 곁에 있어 주면 안 되나?”
엘레노어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너무 놀라 심장도 뛰는 것을 잠시 잊은 것 같았다.
농담이신가?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
엘레노어는 방금 제가 들은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려 애썼다. 하지만 너무 놀란 탓인지 머릿속이 고장이 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전하, 그…….”
“…….”
“그으…….”
엘레노어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런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저, 저는요…….”
엘레노어의 초록빛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명백하게도 곤란한 표정이었다.
그것을 빤히 지켜보던 이즈멜의 머릿속이 서서히 냉정을 찾아갔다.
‘역시 무리였지.’
이즈멜이 속으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내내 꾹꾹 눌러둔 감정을 드디어 터뜨렸다는 후련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더 좋은 때를 기다리지 못했다는 후회가 그 모든 감정을 덮었다.
이즈멜은 또 한 번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지금이라도 말을 거두고 장난처럼 넘어가는 것,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여 끝을 보는 것.
이즈멜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엘레노어는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그의 얼굴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쓸데없이 귀엽긴.’
이즈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즈멜이 갑자기 픽 웃자 엘레노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지금 그대 표정을 그대도 꼭 봐야 하는데.”
“네?”
“조금 더 지켜보다가는 얼굴이 와인보다 붉어질 것 같아서. 긴장 풀어.”
이즈멜은 결국 한 발짝 물러나기를 선택했다. 그답지 않은 충동적인 전진, 싱거운 후퇴였다.
엘레노어를 영영 잃을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이 이즈멜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엘레노어는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성으로서도 그랬지만 인간으로서도 그랬다. 엘레노어는 좋은 친구였고, 신하였고, 때로는 스승이었다.
“내 청혼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대답도 못 할 만큼?”
이즈멜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그는 여유롭고 장난기 넘치는 평소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돌아와 엘레노어를 마주했다.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엘레노어가 이즈멜의 장난을 깨닫고 펄쩍 뛰며 외쳤다.
“아, 정말! 깜짝 놀랐잖아요.”
이즈멜은 엘레노어의 얼굴에 번져가는 안도감을 보았다. 입안이 썼지만, 그는 억지스러울 정도로 밝은 표정을 지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가볍게 흘겨보며 말했다.
“진짜 심장 내려앉는 줄 알았다구요. 아니,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하세요?”
“아예 농담은 아닌데. 정말 생각 없어?”
“전하!”
엘레노어가 여태 꼭 잡고 있던 이즈멜의 손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차 했는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즈멜이 피식 웃으며 장난처럼 덧붙였다.
“오늘은 실패.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네.”
“다음 기회고 뭐고 약부터 바르세요. 흉 질까 마음이 조마조마하단 말이에요. 약상자 어디 있어요?”
엘레노어는 이즈멜의 만류에도 기어이 약상자를 가지고 왔다. 상처 위에 연고를 듬뿍듬뿍 바른 뒤 붕대까지 칭칭 감고 나서야 마음이 좀 놓였다.
“조심 좀 하세요, 전하. 귀한 몸, 소중히 여기시라구요.”
“다치면 그대가 치료해 주나?”
“황궁의들은 괜히 있게요?”
“그들이야 좀 놀고먹으라지. 세상에 우리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 뭐든지 균형이 맞아야 건강한 거잖아.”
엘레노어가 픽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마음을 쓰시는데요? 이제는 전하께서 털어놓아 보세요.”
그녀의 부끄러운 고민을 털어놓았으니, 이제는 이즈멜의 고민을 들을 차례였다.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즈멜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건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일이야. 확실해지기 전에는 발설하지 않으려 했어. 그러니 공식적인 발표가 있을 때까지 그대도 비밀을 지켜줬으면 해.”
이즈멜의 말에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보통 고민은 아닌 듯했다.
“그런 이야기를 제게 하셔도 괜찮아요?”
“그대를 믿으니까.”
이즈멜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나의 고민이 그대에게는 고민을 해결할 열쇠가 되어 줄 것 같군. 기묘하게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즈멜이 엘레노어와 눈을 맞추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댄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엘레노어. 요즘 국제 정세가 무척이나 불안정하다는 것, 알고 있나?”
“신문에서 이야기하는 걸 본 것 같아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해.”
이즈멜이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어쩌면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겠어. 벨리움 영토가 전쟁터가 되는 일만은 막겠지만, 참전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쿵.
엘레노어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전쟁이라니.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엘레노어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상황에서 문해 교육 사업을 진행하는 게…….”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 흔들리는 민심을 진정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지. 미리 말해 주지 못해 미안해.”
이즈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장 일이 터지지는 않을 확률이 높아. 이제 곧 겨울이라 그쪽이나 이쪽이나 군량 공급이 쉽지 않을 테니까.”
“아…….”
“하지만 만약의 상황은 대비해야지. 카이델은 우리 군의 총사령관이야, 엘레노어. 요새에서 군사 훈련을 맡고 있고.”
이즈멜의 말에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델른에 있을 때 내가 그를 불러들였어. 상황이 갑자기 악화되는 바람에. 지금 카이델이 그대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야. 무척이나 중대한 사안인 데다 보안이 철저해서…….”
“이해했어요.”
“전쟁이 반드시 터진다는 건 아니니 지레 겁먹지는 마. 이런 식의 도발은 몇 번이나 있었어.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하기는 하지만…… 늘 그렇듯 유야무야될지도 모르지.”
이즈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그 녀석이 그대를 피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를 해 주고 싶었어.”
엘레노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수로라도 다행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내내 목구멍의 생선 가시처럼 박혀 있던 서운함은 어느새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엘레노어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이즈멜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니 엘레노어. 더는 일에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마. 속상해하지도 말고.”
이즈멜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른 놈 때문에 행복한 것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다른 놈 때문에 시무룩해 있는 건 더 싫으니까.”
***
카이델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엘레노어는 훨씬 가뿐한 마음으로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종종 전쟁에 대한 걱정이 올라왔지만,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라는 이즈멜의 말이 있었기에 매번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지.’
엘레노어는 제국어 기초 교재를 만드는 데 정성을 쏟았다. 엘레노어가 초고를 써내면 아드리안이 그것을 보기 좋게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하녀들과 인쇄소 사람들도 끊임없이 의견을 주며 엘레노어를 도왔다.
그렇게 불철주야 일한 것이 한 달.
엘레노어와 이즈멜이 손발을 맞춘 결과물이 세상에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