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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19화 (119/168)

119화

“선생님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맞아. 선생님이랑 가야 재밌는데.”

델른으로 떠나는 날 아침, 아이들이 엘레노어를 찾아왔다.

아이들은 침대 위로 꼬물꼬물 올라와 앉아서는 아쉬운 듯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엘레노어가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러게. 선생님도 너희가 학교 가는 거 꼭 보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

“아직도 많이 아파요?”

“아니. 거의 다 낫긴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장거리 여행은 무리라고 하더라고.”

“히잉.”

아이들의 얼굴이 시무룩해지자, 엘레노어가 밝은 목소리로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선물은 다들 잘 받았어?”

“네! 완전 마음에 들어요!”

“고맙습니다!”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나가 쪼르르 다가와 자랑하듯 머리 리본을 보여 주었다. 땋아 내린 머리끝에 앙증맞게 묶인 하늘색 리본이 사랑스러웠다.

“헤헤, 오늘 하고 왔어요.”

“예쁘다. 잘 어울릴 줄 알았어.”

엘레노어가 시에나의 말랑한 뺨을 꾸욱 눌렀다가 놓았다. 다음번에 보면 귀여운 젖살이 쏙 빠져 있으리라 생각하니 약간 아쉬웠다.

창밖에서 다그닥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을 데리러 온 황실 마차 소리인 듯했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출발할 시간이네.”

엘레노어의 말에 아이들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어딜 가든 잘 해낼 걸 알아. 그래서 선생님은 걱정 하나도 안 해.”

선생님은 이제 다 가르쳤어.

엘레노어가 루카스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트려 놓으며 웃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입술을 삐죽삐죽 하는 게, 아직도 아기 같았다.

“그래도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식사는 거르지 말고 꼭꼭 챙겨 먹어야 해. 알았지?”

아이들이 힘없이 대답했다.

“네…….”

“또 세 사람 괜히 다투지 말고,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잘 지내고. 그렇다고 다른 친구들을 밀어내지는 마.”

일단 잔소리를 시작하자 해 줄 말이 끝도 없이 떠올랐다. 담백하게 보내려 했는데, 자식을 처음으로 떼놓는 엄마 같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열심히 공부하는 건 좋은데, 또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공부만큼 잘 노는 것도 중요해. 공부만 하면서 보내기엔 너희는 너무 어리니까…….”

엘레노어가 덧붙일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또…….”

“걱정 하나도 안 한다면서 걱정 엄청 많이 하는 것 같은데요.”

그런 엘레노어를 보던 루카스가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엘레노어가 머쓱하게 웃으며 뺨을 붉혔다.

“그러네. 선생님이 원래 좀 오지랖이 넓어. 알아서 잘할 텐데 말이야.”

그때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집사 알베르가 문을 조금 열고 아이들을 불렀다.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읏차.”

엘레노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엘레노어는 아이들의 옷차림을 정성껏 정돈해 주고, 가방을 잘 챙겨 들었는지 확인해 주었다. 이제는 습관처럼 익숙해진 행동들이었다.

“이젠 진짜 갈 시간인가 봐, 얘들아. 도착해서 잘 쉬고, 적응하고 나면 편지 꼭 하고. 알았지?”

“네에.”

엘레노어는 한 명 한 명 힘껏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갈비뼈를 다친 게 이만큼 안타까웠던 적이 없었다.

‘아냐. 차라리 다행이야. 안기라도 했으면 정말 울어 버렸을지도. 그건 꼴불견이잖아.‘

엘레노어가 애써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고마웠어.”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우리한테요? 왜요?”

“너희는 나한테 배웠다고 하지만, 실은 내가 너희에게 배운 게 훨씬 많거든.”

엘레노어의 대답에 루카스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난 선생님한테 아무것도 안 가르쳐 줬는데?”

“아냐. 루크한테도 배울 점이 얼마나 많은데.”

엘레노어가 작게 웃으며 루카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가끔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루카스의 천진함은 늘 엘레노어를 웃게 했다. 엘레노어는 벌써부터 루카스의 엉뚱한 말들이 그리워졌다.

가만히 서서 눈물을 글썽이던 데미안이 작게 속삭였다.

“보고 싶을 거예요, 선생님.”

“나도, 데미. 편지해.”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뺨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려 주었다.

꾹꾹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은 눈에 촉촉하게 눈물이 어렸다.

엘레노어가 세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잘 가. 내 제자들.”

***

“아가씨 천천히요. 너무 빨리 걷지 마시고요.”

마리의 잔소리에, 엘레노어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내 방 안에만 있다가 밖에 산책하러 나오니 좀 살 것 같았다.

“이 정도는 괜찮아. 사실 나는 이미 다 나은 것 같은 기분인걸.”

“주치의 선생님이 신신당부하고 가셨어요. 절!대! 무리하게 운동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고요.”

마리의 강경함에 엘레노어가 두 손을 들었다.

에버렛 백작가 사람들 유난스러운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알았어. 조심할게.”

카이델과 아이들이 체술 수업을 하던 뒤뜰을 거닐자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곤란해하던 카이델의 얼굴을 생각하자 웃음이 났다.

‘즐거웠는데.’

시에나와 루카스, 데미안이 델른으로 떠나니 인생의 한 챕터가 끝난 것 같은 시원섭섭함이 밀려왔다.

시험이 끝나고는 자주 보지도 못했었는데, 어쩐지 벨리움이 텅 빈 것 같았다. 누가 에버렛 사람 아니랄까 봐,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었다.

“아이들은 잘 적응하고 있겠지?”

카이델에게 듣기로는 아주 의젓하고 씩씩하게들 갔다고 하던데.

“그럼요. 얼마나 야무진 분들인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마리의 말에 엘레노어가 환하게 웃었다.

“아가씨! 델른에서 편지가 왔어요.”

그때 에밀리가 편지 한 통을 들고 다가왔다. 엘레노어는 혹시 아이들에게서 온 것일까 하는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뛰지 마시라니까요, 아가씨!”

“미안 미안. 델른에서 왔다니 너무 반가워서 그만.”

엘레노어가 설레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아가씨 도련님들이 보내신 거예요?”

“음…… 아니.”

엘레노어가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 봐야겠다. 중요한 편지네.”

편지는 아스터로부터 온 것이었다. 엘레노어는 방문을 닫고 책상 앞에 앉아 차분하게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엘레노어 에버렛.

그간 건강히 잘 지냈느냐? 황태자 전하와 협업한 건은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벨리움 전체가 이처럼 학구열에 불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란다. 그 결과도 무척 긍정적인 것 같더구나.

평민들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열어 준다라…….

나는 평생 엘리트 중의 엘리트를 육성하는 일에만 힘써 왔다. 나는 내가 한 일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네가 제시한 시각은 내게 또 다른 세상을 보여 주었단다.

오늘 편지한 것은, 전에 제안한 것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다.」

아스터의 편지를 읽던 엘레노어가 숨을 헙 하고 들이쉬었다.

“벌써 결정해야 한다고? 아직 1년이 되려면 한참 멀었는데.”

잠시 잊고 살고 있었다. 아직 고민할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리 약속한 기한이 남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요즘 국제정세가 심상치 않아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단다.

네가 얼마나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 아니, 사실 무척 나빠.

아직은 각국의 지원을 받고 있지만, 상황이 더 악화한다면…… 모를 일이지. 네게도 델른이 훨씬 안전한 곳이 될 거란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연구에만 집중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임은 안다. 하지만 분명 네게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너와 꼭 함께하고 싶은 생각에 한 번 더 강조하마. 학회 연구생 자격은 무척이나 특별한 것이란다.

이 과정을 마치면 너는 각국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되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너 스스로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고 말이야.

어려운 시기, 속세와 떨어져 너 스스로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행운일 거다.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마.

건강해라.

-아스터 로고스토아.」

편지를 끝까지 읽은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너무 갑작스러운데.”

분명 탐나는 기회였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스터의 말대로 쉽게 오지 않는 기회였다. 수많은 사람이 꿈꾸는 영예이자 특권이었다.

엘레노어는 전생에서 돈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유학을 떠올렸다.

주변 친구들이 교환학생이다, 어학연수다, 해외 대학원 진학이다 하며 바쁠 때, 엘레노어는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과외를 풀타임으로 뛰어야 했다.

괜찮다며 스스로를 달랬지만, 사실은 부러웠다. 해외 연수 경험이 없는 것은, 강사 일을 할 때 주변 동료들이 그녀를 깎아내리는 약점이 되기도 했다.

“그때 그 기억이 한이 되었던 건가…….”

엘레노어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탐난다.

가고 싶다.

“하지만 5년은 너무 길어. 방문객만 받을 수 있다는데, 그 먼 거리를 어떻게 오가겠어…….”

엘레노어는 엄청난 유혹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저었다.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미련이 남았지만, 카이델을 생각하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카이델에게 물어봐야겠다. 상황이 안 좋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

엘레노어는 일단 카이델과 툭 터놓고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

“뫼젠 측에서는?”

“사흘 안으로 결정하겠답니다.”

“느려. 내일 중으로 결정해달라 전해라. 아르혼은?”

“가능하답니다.”

“좋아.”

군사 회의는 열두 시간을 내리 이어졌다. 카이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목마른 화초처럼 흐늘흐늘해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카이델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지친 듯하니 오늘은 이만하지.”

카이델의 말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카이델이 제 부관에게 남은 일과를 지시했다.

“레온하르트, 저녁 훈련은 네가 맡도록 해. 불침번은 제스인가?”

“예, 지금 깨울까요?”

“아니, 조금 더 잘 수 있게 해.”

카이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도 고생했다. 다들 지쳐 있을 텐데, 푹 쉬어라. 상황이 상황인 만큼 건강 관리에 늘 유념하도록.”

“예, 각하!”

카이델이 공작저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조나단이 그를 맞았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각하.”

“그건 뭐지?”

“에버렛 가에서 온 서신입니다.”

씰룩.

카이델의 입꼬리가 눈에 띄게 솟았다. 그는 설레는 마음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냈다.

꼭 선물상자를 뜯어보는 소년 같은 모습에, 조나단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감돌았다.

「안녕, 카이델.

의논하고 싶은 게 있는데, 시간 될 때 와 줄래요?

늦어도 괜찮아요.

빨리 보고 싶어요.」

편지보다는 메모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카이델은 그것을 몇 번이나 읽고 또 곱씹었다.

‘어떻게 글씨도 이렇게 귀엽게 쓰지.’

헨리가 카이델의 겉옷을 받아 들며 말했다.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나중에.”

“예?”

퇴근 후 목욕. 내내 변하지 않던 일과였는데?

“말을 준비해 줘. 옷만 금방 갈아입고 나올 테니.”

엘레노어가 빨리 보고 싶다잖아.

카이델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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